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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수 Aug 22. 2022

풀은 보이지 않는 바람을 보여주고

황종례, <부드러운 힘>, 2017

[자연, 나의 눈에는 달리 보이고]_눈에 보이지 않으나 존재하는 세계를 보여주는 기민한 몸의 필치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폭풍우로 돌변할 때는 심술을 부리는 그리스 신화의 거인족 티탄 같다가, 무더운 여름날 붉게 달아 오른 얼굴을 시원하게 스칠 때는 세이렌(Seiren)의 달콤한 속삭임 같다. 바람이 적당하고 약하게 불 때에는 식물의 번식과 벌, 새 등의 이동을 손쉽게 도와주는 고마운 존재다. 언덕 위 풍력기를 돌려 우리에게 전기를 공급해주는 선한 역할도 한다. 그러나 바람의 질이 바뀌어 걷잡을 수 없이 거세게 불고 여기에 비까지 함께 세차게 위세를 더하는 날이면, 인간은 그야말로 바람이 만드는 극적이고 격렬한 광경 앞에 당황해할 뿐이고,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자연은 늘 위대하고 인간의 바램, 의지 바깥에 있다.


앵그르, 「호메로스의 신격화(L’Apothéose d’Homère; Homère déïfié)」 출처 – 호메로스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열린 연단



인간이 느끼고 때론 두려워하는 ‘바람’은 어떻게 생겼는가? 바람의 다른 이름은 폭풍, 질풍, 뇌우 같은 것들이다. 강함과 약함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바람의 형태를 그릴 수도, 그것이 어디로부터 시작해 불다가 어디를 향해 사라지는 것인지도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은 바람에 대해 실은 아는 것이 없다.      

예로부터, 예술은 바람(風)을 다양한 형태로 묘사했다. 서양의 경우, 호메로스가 쓴 <오디세이아>에서 폭풍은 단순한 기상현상이 아니다. 바람에 맞서 몸을 일으키는 바다의 거친 동요는 배를 탄 개인 혹은 집단의 용기나 자기 초월을 요구하는 일종의 시련이요, 영웅 신화의 크리셰다. 높이 수 미터에 달하는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드는 광경은 영국 화가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의 그림에도,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캔버스에도 자주 등장한다. 화면을 보면, 바람에 맞선 인간들은 무력함을 감추지 못한다. 과학적 관찰이나 지식, 경험으로도 위험을 막지 못하는 인간은 악천후 앞에서 한없이 나약하고 무능하다. 그런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은 신 앞에서 늘 겸손해야 한다 그림이 나에게 훈계하는 것만 같다. 그러나 화가들은 잊지 않고 어둠의 끝에 구름을 비집고 내민 미약한 빛을 비추고 고난 뒤에는 평온이 뒤따를 것임을 암시해준다. 희망이다. 이처럼 서양의 풍경화는 매우 극적인 시퀀스와 교훈을 감춘 그림이 많다.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Calais Pier, 1803, Oil painting on canvas, 172×240cmⓒNational Gallery


동양에서 바람은 파괴의 신이 아니다. 자연과 인간 사이를 매개하는 존재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보이지 않는 대기의 공간을 채워 객체를 자연의 일원으로 연결한다.  농부에게 바람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타협하고 이용해야 하는 대상이다. 바람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보이지 않으니 그릴 수 없다. 그러나 바람은 보이지 않을 뿐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니 보이지 않는, 실체 없는 것이 존재하는 실재하는 것을 빌려 그려야 한다. 바람은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폭포수의 낙하를 더욱 거칠게 하고 여린 풀을 땅에 엎드리듯 눕히고 우물물을 찰랑거리게 한다. 바람은 시냇물을 소용돌이치며 골짜기를 휩쓸고 스치듯 강의 선율을 만든다. 그것은 물을 골짜기에 머물지 않고 아래로 흐르게 하고 결국 바다로 향하게 한다. 바람은 멈춘 것을 이동하게 하는 힘으로 물질로 구성된 사물의 실체에 실려 존재를 드러내는 동(動)의 원동력이다. 이것은 동양 그림이 보이지 않는 대상을 묘사하는 우회적이고 은유적인 표현법이다.


동양 그림에서 바람은 오히려 고요와 정적을 극대화하는 장치 같다. 화면 속에서 공간을 압도하는 유동의 미는 정태에서 동태, 다시 동태에서 정태를 수시로 오간다. 휘몰아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지했다가 다시 휘몰아친다. 옛 그림에서 바람은 형체가 없기에 바람의 방향과 기세는 대나무, 버드나뭇가지, 물가의 야생초의 동적 호응을 이용해 비간 접적으로 보여준다. 남송(南宋)의 문인이었던 이적(李迪)의「풍우 귀목도(風雨歸牧圖)」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어느 날 시골 풍경을 묘사한 그림이다. 좌측 상단에서 우측 하단을 향해 화면을 가로지르듯 서 있는 버드나무는 몰아치는 바람의 세파에 압박을 받고 있다. 서양 처럼 비바람을 일일이 그어 그린 것도 아닌데, 버드나무의 모양을 보아 매몰차게 쏟아붓는 비바람의 정도가 한눈에 보인다. 

그러면, 이적을 비롯한 옛 화가들은 바람을 그리려 했던 걸까? 그들이 그린 것은 휘어진 나뭇가지도, 매서운 비바람도 아니다. 화가가 사실적이고 생동감 넘치게 그려내고 닿고자 했던 경지는 기국(氣國)이다. 화면에 나뭇가지를, 풀을, 물을 배치하는 가운데 기운이 들어올 입구와 기운이 나갈 출구를 정하고 기가 흘러 나갈 길을 만든다. 상하좌우 호응을 이루는 배치로 완벽한 구도, 기의 통로를 만드는 일이 때로는 천 년 전 어느 가을 산골 한 들녘 풍경이 되기도 하고 비탈진 산곡에 불어오는 가을바람을 맞으며 댓잎 흔들리는 대나무 풍경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에 화가들은 덧붙여 대나무가지 위에, 나뭇가지 위에 앉으려고 애쓰는 새의 날개 짓으로 바람의 세기와 움직임, 방향을 담았던 것이다.                



이적(李迪), 풍우귀목도(風雨歸牧圖), 12세기 남송, 120.7×102.8cm ⓒ대북고궁박물원

그렇다면 공예가들은 어떻게 ‘바람’을 표현할까? 나는 바람을 소재삼은 공예가들의 작품들 중에 도예가 황종례(黃鐘禮, 1927~ )의 작업을 제일 먼저 떠오른다. 황종례 작가는 한국 도예계의 1세대 작가다. 그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한국 도자 제작 전통이 끊어질 위태한 시점에 평양 근처에서 청자제작공장을 운영했던 황인춘(黃仁春, 1894~1950)이다. 오빠 황종구(黃鍾九, 1919~2003) 역시 아버지의 대를 이어 도예가로 활동하다 이화여대에 부임해 일평생 고려청자의 재현과 도예 교육에 힘썼다. 당시 황종례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서양화과를 전공했고, 일찍이 청전 이상범, 김옥진, 안동숙으로부터 초상화 및 사군자, 산수를 배웠다. 후일 대학원에 들어가서 도예로 전공을 바꿨다. 지금까지 그녀가 긴 시간 청자를 바탕으로 회화를 시도하는 것은 이처럼 그녀의 인생에서 만난 귀한 인연과 필연, 그녀의 취향이 하나로 결부된 필연이다.     


황종례, <부드러운 힘>, 분청귀얄문기, 2016, 국립현대미술관 개인전


황종례 작가는 분청의 장식 기법 중 하나인 ‘귀얄문’을 사용한다. 귀얄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행하는 역사 과도기에 호남지역에서 유행했던 장식기법이다. 귀얄은 과거, 풀칠이나 옻칠을 하기 위해 돼지털이나 말총을 넓적하게 묶어 만든 솔을 일컫는다. 귀얄 분청은 철분이 많이 든 태토로 빚은 분청사기를 생활용기로 쓰기 위해서 마치 얼굴에 분을 칠하듯 그릇의 표면에 뽀얀 백토물을 휘 돌려 입힌 것이다. 붓으로 그린 것이 아니기에, 뭉근한 백토물이 맺혔다 서서히 바닥을 향해 흐르는 모양이 무척 자연스럽다. 뿐만 아니라 작가가 한숨에  빠르게 돌린 것이고, 그저 무심히 돌린 것이기에 자연스럽고 빠른 손놀림에서 나오는 속도감이 특징이다. 아름답다는 말보다는 ‘멋지다’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혹자들은 이를 보고 현대미술의 추상화에서 볼 법한 현대성이 보인다는 평을 하기도 한다.         

귀얄문 발(鉢)은 황종례의 대표작이다. 발(鉢)은 일상생활에서 즐겨 사용하는 기물로 다완(茶碗)이나 항아리(壺)에 비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면이 평평하고 넓다. 다완은 그보다 기물이 작고 기벽이 누워 있어 기벽 바깥면보다 안쪽 면이 그림 그리기 좋다. 항아리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너른 표면이 있으나 대부분 형태가 크고, 굴곡이 심해 붓을 한 숨에 돌리기 어렵다. 이처럼 도자 용기의 표면 위에 그림을 그리는 일은 캔버스나 종이 같은 평면에 그림을 그리는 일과는 다르다. 기형과 각도에 따라 붓을 쥐고 몸을 사용해 운필을 운용하는 법을 달리 적용해야 한다. 특히 크고 굴곡진 화면에 작가가 일필휘지(一筆揮之)의 선을 구사하려면 몸 특히 손목과 팔의 운동 범위를 크게 사용할 줄  알아야한다. 머뭇거림없이 자연스러운 표현은 원숙한 작가의 필력과 경험이 필수다.



"그릇의 형태에 맞게 크게 붓을 놀려 그린 귀얄문은 참 특별하다. (…) 공예는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회화와 달리 그림의 바탕인 형태를 손으로 만든 뒤, 색을 조제하고 유약을 칠해 그림을 그린다. 때문에 조화로움을 추구하는 가운데 변격의 시도하는 마디의 재미가 있다. 재미있는 점은 도배할 때 사용하는 도구도 '귀얄'이다. 화장토 머금은 붓을 한 바퀴 돌려 얻은 문양은 동적이고 생동감이 느껴진다. 이 힘은 진취적인 도자의 특징을 대변한다.
내의 작업은 늘 정지된 것이 아니라 동적이다. 정적인 것은 발전하지 못한다. 움직여야 발전할 수 있다."

- 황종례 작가의 영상 인터뷰(2017, 클레이아크김해) 중에서


황종례, <부드러운 힘>, 분청귀얄문기, 2017, 작가 소장



황종례작가가 처음부터 귀얄문을 즐겨 사용했던 것은 아니다. 1970-1980년대에는 주로 녹유, 적색유, 그리고 검은 빛이 감도는 흑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색을 작은 기와 발의 형태로 제작했다. 1970년대 중반 이후에서야 분청의 귀얄문을 가져오고 기형-화면의 크기를 키워 회화성이 강조된 작업을 했다. 이 연작이 《부드러운 힘》이다. 그의 작업은 시기가 다른 옛 도자의 형태와 기법을 접목하거나 재현하는 일을 넘어 다양한 형태와 귀얄 기법을 끊임없이 변주하고 실험하는 일이다.  초벌 기물 위에 화장토를 바르고 흑색과 청색으로 발색되는 재료를 귀얄붓을 바꿔 묻혀 2번 혹은 3번의 갈필로 빠르게 돌린다. 귀얄기법은 표면이 채 마르지 않은 백토물 먹은 표면에 터치를 남겨야 함으로 빠른 필치가 관건이다.


ⓒ황종례, <부드러운 힘>, 분청귀얄문기, 2017,  ⓒ 클레이아크김해 <분청, 그  자유로운 정신>전


일필휘지로 그은 백색 혹은 흑색의 얇고 무수한 선들의 겹겹은 그야말로 산등성 무성히 우거진 갈대밭이 바람에 맞서 일어서고 눕는 광활하고 적막한 풍경 같다. 화면 속에는 사람도 없고 하늘과 땅의 구분도 없다. 모호한 경계가 화면을 횡으로 가로지는 배치는 정적이면서 동시에 동적이다. 손목을 반복적으로 그리고 빠르게 그리는 포물선들. 농도와 길이, 색이 미묘하게 다른 선의 겹침이 바람부는 대로 눕고 일어서 갈대 그리고 소리를 담고 있는 것이다.  위에 해나 달을 그린 것도, 아래 물결이나 젖은 땅의 질퍽거림을 그려넣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왜 나는 바람소리 웅웅 휘몰고 그에 맞추어 갈대가 쉭쉭 소리를 내어 응대하는 실로 진정한 ‘서풍송(四風頌), 즉 가을바람의 노래를 바라보고 있는가?

나의 눈과는 달리, 황종례의 면에는 갈대 하나하나를 잘 그려야겠다는 의지도 없고 자연을 그대로 묘사하겠다는 목표도 없다. 그저 무심하게 몸에 익었던 선, 속도를 따라 작가의 몸에 실린 빠른 리듬이 귀얄 붓에 실려 좌에서 우로 빠르게 진격했다. 손이 지나간 자리에 흙물과 귀얄붓 만난, 흔적만이 있는 무심(無心)의 화면보는 이의 경험과 보고자 하는 바에 따라 때론 들판에서 바람이 부는 대로 눕는 풀초처럼, 때론세차게 휘몰아치는 바람의 기세처럼.그렇게 우리의 눈에 가을날의 꿈(秋夢)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의 작업이 달리 보이는 것은 황종례 귀얄문기를 보는 감상의 즐거움이다.  그의 그림을 보며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님을 절감한다. 나는 풀을 보고 있는가, 바람을 보고 있나, 아님 그저 흔적인가.

무엇을 보든  그  모든 것에서 작업실에서 일생을 보내며 예술 세계를 재현하려 한 인간이 품은 고요한 심상, 자연을 바라보는 화안(畵眼)이 타인 우리에게 고스란히 느껴진다는 것이 흥미롭지 아니한가? ■홍지수_미술평론, 미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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