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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수 Aug 17. 2022

눈물의 색채

곽경화의 <Let it flow> 연작, 2016

[자연, 나의 눈에는 달리 보이고]_나의 지극한 삶이 물처럼 자연스럽게 흐르기를



수재水哉! 수재水哉!

by 공자孔子(B.C.551~B.C.479)



곽경화의 화제畫題는 물(水)이다. 그러나 실제 그녀의 작품 중에 뚜렷이 '물'이라고 지칭할만한 형상은 많지 않다. 흔히 우리가 물방울 하면 떠올리는 형상-위가 뾰족하고 아래가 둥근 형태가 더러 있기는 하지만, 그녀가 그리고 만든 모든 형상들을 명확하게 '물'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그녀가 그린 도판에는 대부분 수평과 수직만이 있다. 그것은 딱히 물이라 칭할 수 없는 모호하고 불특정 한 색으로만 가득한 화면이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작업을 볼 때마다 내가 물이 아닌 다른 대상을 보고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수평의 선을 보면서 나는 내가 전시장을 찾기 전 건너야 했던 비 젖은 한강을 떠올렸다. 그리고 버스 창 밖 너머로 하늘과 강이 만나는 수평선이 바람에 너울거리던 일 순간을 보았던 그때를 다시 곱씹었다. 아무런 형상도 없이 오직 수평의 붓질 자국만 가득한 푸른 화면에서 각자 자신의 일생 언젠가 보았던 강, 바다를 떠올린다.

'물'과 관계된 풍경을 소환하며 화면을 보다가 문득 ‘원래 물이 형태가 있었던가?’ 의문한다. 물은 어떤 형태든 취할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이 담긴 그릇의 모습에 따라 모습을 바꾼다. 이것이 물의 융통성이자 유연성이다. 작가는 어떤 형태든 취하고 될 수 있는 물의 유연성에 기대어 물의 다양한 면모와 의미를 궁구해왔다. 그것은 나의 피부를 흐르는 눈물 혹은 땀이 되었다가, 하늘에서 내리는 빗방울이 되었다가, 때로는 파도의 하얀색 포말이 되었다가, 유리컵 속 물이 되었다가, 어느 때에는 알약 속 알갱이가 되기도 한다. 그녀가 만들고 그린 물의 형상은 곧 그녀 자신의 일부일 수도, 그 다른 날 혹은 누구의 마음속에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 잔잔히 흘러가는 강물, 광활한 바다 등으로 탈바꿈한다. 그거나 그것은 어떤 것도 될 수 있는 무엇이다.




곽경화, Tears_2016,  glazed ceramics,  22×18×11cm




곽경화는 자신을 포함한 인간과 자신이 속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물을 그리고 만든다. 그녀에게 물은 자신을 이해하고 수신修身하는 경로이자 수단이다. 물은 자연의 생을 위해 귀하고 중한 존재이지만 도처에 흔히 존재한다. 물은 나의 몸 나아가 구름, 안개, 비, 강, 바다 등 여러 자연물의 형태 속에도 구체화되어 있다. 따라서 물은 인간과 동일하고, 세상은 나와 동일하다. 작가가 물의 이미지를 그리는 것은 곧 자신의 근원을 묻고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며 땅에서 시작하여 세상의 무엇이라도 잉태시킬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생명의 근원을 내 마음의 이미지로 구체화하는 일이다.

그녀의 물에 대한 사유는 나의 신체가 배출한 눈물로부터 시작했다. 눈물은 내 신체 내부에 고여 있다가 기쁨, 슬픔의 정서가 촉발할 때 분출한다. 눈물이 흘러 하늘과 땅이 흘린 눈물과 합수하면 눈물은 신이 거처하는 피안(彼岸)의 땅, 하늘과 바다에 이른다. 푸른 눈물이 모였기에 하늘, 바다, 물의 빛 역시 파랑이다. 그래서 파랑은 피안의 빛이요 승화의 빛이다. 믈은 생명을 잉태시키고 성장시키지만, 아무것도 해하지 않으며, 아래로 흐르면서도 항상 끊임없이 순환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물은 그 자체로 덕(德)이자 의(義)다. 따라서 청색은 거룩함, 승화, 초월, 지양, 희망, 생명의 근원을 상징하는 색이기도 하다. 이것은 고대 군자(君子)들 뿐 아니라 범인들 역시 오랜 세월 하늘빛과 물빛을 보며 관조하고 자신의 삶 가운데 함유하고자 했던 것들이다.   

   



곽경화_Untitled_2016, glazed ceramics, 30x39x2.5cm


곽경화_시적 순간 Poetic moment_2016_glazed ceramic




작가가 오직 푸른색으로 채운 이미지를 다시 들여다본다. 짙푸른 바다 혹은 물안개 짙은 새벽녘 풍경으로 짐작할 수는 있으니 때, 장소를 확정할 수 없다. 그저 색으로 질감으로, 붓질로만 그득한 모호한 화면이다. 망망한 대해 혹은 새벽녘 물안개 그 어느 쪽이든 신비하고 은밀하며 예측할 수도 없는, 그야말로 본질적으로 포착 불가능한 이미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앞에서 하늘과 맞닿아 있으면서 빛과 시간에 의해 시시각각 변모하는 아득한 물의 풍경을 떠올린다. 우리의 망막에 비친 세상의 풍경은 항상 움직이고 부유하며 어딘지 불안하게 떠도는 것이기에 모호한 푸름 속에 혹여나 처연하게 드러누운 바다가 혹은 서늘한 빛이 두꺼운 연무 속에서 파드득거리는 풍경이 존재할 것 같은 몽상을 그 속에서 본능적으로 느끼고 보고자 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무엇을 보겠다는 우리의 욕망과는 다르게 곽경화의 푸른 도화는 그저 흙의 표피를 덮고 있는 또 다른 흙의 층위 조합이며, 한때 흐르고 끈적거리는 물질이 불을 만나 번지고 흐르고 엉겨 붙은 화학작용의 결과물에 불과하다. 그것은 바다를, 강을, 짙은 안개를 떠올리게 하는 구상이지만 동시에 무엇이라고 지칭할 수 없는 정서와 정념이 가득한 추상이다. 이처럼 그녀의 물은 물질과 이미지, 구상과 추상 사이에서 기이하게 존재하고 있다. 환영과 풍경 사이의 경계에 그 어딘가에서 말이다.     


곽경화의 물에 대한 명상은 구체적 형상을 빚고 그 위에 그릴 때보다 같은 크기의 도판에 천천히 그리고 반복적으로 점을 찍고 수직과 수평의 선을 내리그을 때 가장 잘 드러난다는 생각이다. 도판 위 불규칙한 점과 흔들리는 선은 한순간도 정지할 수 없고 동요하지 않을 수 없는 살아있는 어느 인간의 숙명과 행위의 궤적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녀가 그린 점은 눈물이자 하얀 포말처럼, 수직선은 빛 혹은 비의 궤적처럼, 수평선은 하늘과 땅 혹은 하늘과 수의 경계처럼 우리 눈에 비친다. 하지만 이 모든 형상은 특정 자연을 재현하겠다는 목적, 의지와는 무관하다. 곽경화는 물 이미지들은 대상을 재현하는 회화가 아닌 자신이 대면한 세계에 대한 반응이자 자신의 삶과 감정을 면밀히 들여다보고 기록한 자기 고백이요, 성찰이며, 사소한 일기에 가깝다.




수평의 선을 반복적으로 그어 바다의 파도, 강의 물결을 그린다.       그것은 어쩌면 무엇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출렁이고 넘치려는 자신의 마음을 다독이는 일


작가는 다양한 안료를 물과 함께 적당히 섞어 나만의 색, 질감을 찾는다.




작가에게 청색은 단순한 색이 아니다. 그녀에게 청색을 자주 쓰는 이유에 관해 물으니, 그녀가 “파랑이 탄생했을 때 기뻐 환호한 자 누구였는가?”라는 파블로 네루다 Pablo Neruda의 말을 들려주었다. 이어 자신에게 푸른색은 물이라는 대상과 형태와 일치하는 색이자 자신의 감각과 존재와 일치하는 근원적 색이라고 했다. 또한 푸른색은 다른 재료, 색으로 대체될 수 없는 정체성과도 같기에 다른 재료를 시도해봤지만,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도 했다. 그녀가 종이나 캔버스 위가 아닌 흙 위에 그림 그리는 것은 다른 매체에 대한 호기심이나 이끌림이라기보다 캔버스 위에 물감 혹은 화선지 위에 안료와는 다른, 오직 불과 흙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푸른색의 스펙트럼과 질감, 깊이가 가장 그녀가 원하는 바, 감성에 적합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작가는 질료의 색을 단도직입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화장토와 다양한 색상의 안료를 섞고 환원불에 구워 자신이 원하는 푸른색을 찾는다. 그녀는 청색과 녹색, 옥빛, 유록색, 갈황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색을 청(靑)의 범주로 끌어들인다. 그녀의 파랑은 파랑다운 파랑이 아니라 좀 모자란 파랑, 청명한 파랑이 아니라 우울한 파랑, 강렬한 파랑이 아니라 희미한 파랑이다. 그것은 화면 위에서는 모두 파란색이지만, 색 하나만 단독으로 보면 파란색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색이다. 다양한 안료를 섞으며 자신이 원하는 색을 찾는 시간은 자신이 보았던, 보았을 것 같은 마음의 풍경을 수없이 끄집어내는 명상과 치유의 시간이다. 작가는 오직 자신이 원하는 색, 이미지에 다가가기 위해서 합당한 색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안료를 섞고 가마에 넣어 굽는 일을 반복한다.


곽경화, Let it flow_2016, glazed ceramics, 30x39x2.5cm



곽경화, Let it flow_2016, glazed ceramics, 230X43.5X2.5cm


 도자의 형과 색은 불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캔버스의 물감이 단순히 화면의 표피 위에 얹혀 있거나 붙잡고 있는 것이라면, 소성 후에서야 비로소 흙과 안료, 유약은 분리 불가능한 하나의 덩어리, 층위가 된다. 산화소성보다 환원이 도자와 유약을 하나로 결부시키고 색을 가라앉히는 효과를 낸다.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달리 도자 위에 안료 섞은 화장토로 운필의 묘를 살리거나 수정하기는 쉽지 않다. 뿐만 아니라 고온 소성 후에 어느 정도 명도로 발색할 것인지 가늠하기도 쉽지 않은 것이 도자 회화의 어려움이자 매력이다. 이처럼 도자의 물성과 발색은 비즉각적이고 의지로 관철할 수 없기에, 도화를 그리는 작가는 재료와 기법이 바뀔 때마다 지속해서 실험을 거듭하고 그리는 내내 발색을 예측하는 일이 수반된다. 그 일은 수없이 점을 찍고 원을 그리며, 선을 긋고 면을 채우는 회화의 반복적 행위만큼이나 지난하고 힘든 과정이다. 그러나 도자의 특성상 흙과 유약에 맞는 필력을 연마하고 꾸준히 재료와 도구, 소성을 개발하는 일은 자신이 그려내고 싶고, 말하고 싶은 이미지와 개념을 고민하는 일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렇다고 재료나 수법에 대한 지나친 탐미나 함몰은 알맹이 없는 껍데기를 치장하는 일에 불과하다. 오히려 지난 미술이 펼쳐왔던 관습적 시각이나 방법에 얽매이지 않고 새롭게 대상과 매체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확장하여 자신만의 사유와 이미지를 찾아내는 일이야말로 우리 시대 흙 작업에 필요한 것임을 푸르되 푸르지 않은 청색으로 자신의 물을 그리는 곽경화의 청화(靑花)를 보며 깊이 절감한다.■홍지수_미술평론, 미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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