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상 Feb 14. 2024

인어공주를 위하여

평일에도 서울역은 늘 복잡하다.


대합실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3층 카페의 자리를 운 좋게 차지하고 나서, 뜨거운 찻잔을 조심스레 쥐고는 후후 불어가며 홀짝인다.


나는 이런 복잡하고 분주한 모습에서 한 발치 건너 서서 이를 내려다보며 여유롭게 차를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스노우볼을 들여다보듯,  커다랗고 맑은 수정구슬 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했다 사라지는 그 광경이 이유 없이 나를 몰입시킨다.


생김도 제 각각, 옷차림도 제 각각, 손에 쥔 것도 모두 제 각각인 그 사람들 중에서 누구 하나를 찍어 눈으로 따라가며 관찰한다. 그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면 또 다음 사람을 정하고 예의 그 관찰을 계속하는데, 이 이상하고 심심한 놀이가 나는 퍽 즐겁다.


저 사람의 하루를 상상해 본다. 저 사람의 인생을 상상해 본다. 그렇게 그 사람을 눈으로 좇으며 나는 그 사람들의 인생의 궤적을 상상하며 마치 내 피조물을 보는 신이라도 된 듯 오만한 마음과 자세로 혼자만의 장난을 즐긴다.


‘인간은 참 묘한 존재’라는 언제나 같은 결론에 도달하지만 그 과정은 매번 새롭고 꽤 흥미로우며 때로는 감동을 주기도 한다.


 그 오묘하고 난해한 사람들과 꽤 오랜 시간을 나는 얽히고설켜가고 있지만, 정해진 시나리오가 없는 이 드라마는 언제나 나에게는 하드코어이자 스릴만점의 어드벤처다.

그러나 그 쉽지 않은 시간과 사건의 합작품이 또한 내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지, 나를 얼마나 성숙하게 하는지 나는 일찌감치 그 해 크리스마스에 배웠으니, 산타할아버지로부터 선물을 제대로 받은 격이다.  


나는 한 때 세상을 노래하던 꾀꼬리였다.

아름다운 황금빛 날개를 활짝 펴고 맑고 청량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면, 사람들은 모두 두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하였고, 황홀한 표정으로 나에게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신은 나에게 천재적 재능은 주지 않고, 천재를 알아보는 눈만 주었다.’는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한탄처럼 애석하게도 신은 나에게 아름다운 목소리를 주었지만, 너무나 짧게 허락했다.


나는 태생적으로 목청이 좋고 성량이 풍부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렵고 나를 아는 누군가는 허언증이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있지만, 진실로 진실로 말하건대 나의 목소리는 맑고 깨끗한 여름하늘처럼 쨍했고, 서라운드 효과라도 단 것처럼 쩌렁쩌렁 울렸으며,  쉽게 목이 갈라지거나 쉬는 일도 없었다.


그래서 언제나 응원, 웅변, 시 낭송 등은 나의 몫이었고, 그런 목소리는 필연적으로 음악선생님께 일찌감치 눈도장을 찍으며 10살의 나이에 학교대표로 독창대회에 발탁되는 일로 이어진다.


이미 학교대표로 선정된 6학년 언니가 지나치게 수줍음이 많아 무대에서 계속 떠는 바람에 고심하던 음악선생님 눈에 든 나는 바로 독창대회 준비에 투입됐고, 그 해 운이 좋게  지역대회에서 1위를 차지하면서 본격적인 나의 가수생활이 시작된다.


선배 언니와 달리 나는 애초에 나대기 좋아하는 성격이었으며, 무대에서 떨기는커녕 물 만난 고기처럼 특유의 오버스러운 제스처와 표정연기로 노래를 쥐락펴락 하였다.

목소리는 좋았지만 노래를 해본 적 없었기에 이렇게 갑자기 등장한 무명가수는 지역대회 1위를 하면서 벼락스타가 되었다.


내가 곧 노래였고, 내 노래가 전설이 되던 시절이었다.

나의 트로피는 학교의 자랑이 되었고, 언제나 마이크는 나의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스타가수의 삶을 만끽하고 있었지만, 앞서 말했듯이 나의 그 아름다운 목소리는 화려했던 꽃이 금세 시들어버리 듯 얼마가지 않아 조금씩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었다.


5학년 가을 무렵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목감기라고 생각했다.

목소리를 크게 내면 목에 모래가 있는 것처럼 껄끄럽고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금방 나아질 거라 생각한 것과 달리 목소리는 점점 갈라지기 시작하더니 첫눈이 내릴 때쯤 나는 우주 끝까지 뻗을 것처럼 높이 올라가던 고음을 잘 낼 수 없게 되었다.

건조하고 추운 겨울이 다가오니 일시적으로 이렇게 된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나는 여자아이들에게 흔치 않은 변성기를 정통으로 맞이하게 된 것이다.


무척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해도 예전의 목소리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차츰 받아들였지만 나는 나의 그 견고한 명성에 흠집을 내지 않고 국민학교 생활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기량이 예전 같지 않음을 이미 알고 있지만, 무대와 인기는 예나 지금이나 중독성이 강해 나는 그것을 선뜻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전성기를 지나 은퇴를 고민하는 운동선수 같은 마음이 되어 나의 치부를 숨기고 실력을 포장하는 데 급급했다.

노래를 거절하는 모습은 사춘기가 시작되는 소녀의 새침함으로, 지역대회 출전을 거절하는 모습은 후배에게 기회를 주려는 겸양의 미덕으로 둔갑했다.


그렇게 나는 무척이나 애쓰면서 나의 위태로운 가수생활을 연명해 가고 있었지만, 비밀은 언제나 그렇듯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을 그 숙명으로 하고 있었다.


국민학교 시절 나는 내내 여름과 겨울 ‘시즌제 크리스천’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재미난 이야기와 공연, 레크리에이션 그리고 무엇보다 맛있는 간식들이 가득한 여름성경학교와 크리스마스 축제는 내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유희이자 낙이었다.


각설이들이 빌어먹을 때에도 업계의 룰이 존재하듯, 나의 시즌제 종교생활에도 나름의 철칙이 있었다.


첫째, 여름에 나갔던 교회를 겨울에 다시 나가지 않는다.

당시 문화행사가 많지 않던 시골에서는 특히나 시즌제 크리스천이 종종 있었다. 그래서 이 생활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는 연거푸 두 번이나 같은 교회를 나가는 것은 위험했다.

기존 꼬맹이 신도들은 여지없이 눈을 흘기며 “선생님, 쟤는 여름성경학교 때 나와서 티셔츠 받고 간식 먹고 놀다가 교회 안 나온 애예요.”라며 나의 과거를 들추며 고자질을 했다. 그래서 환영받는 새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회를 옮겨서 나가야 했다.


둘째,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큰 교회를 중심으로 나간다.

작은 교회에는 신도 하나하나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게 높고, 지도선생님이 자주 연락하거나 살뜰히 챙겨준다. 물론 교회를 다니는 동안은 나쁘지 않으나, 이제 재미를 다 보고 내빼려는 상황에서 교회 측의 연락은 상당히 부담스럽고 불편했다. 나 정도는 빠져도 쉽게 티가 나지 않거나 쉽게 잊힐 수 있는 그런 교회가 적당했다.


셋째, 장황한 기도문을 준비하여 반드시 자발적인 회개를 통해 기존신자의 마음을 얻는다.

시골에 규모가 있는 교회가 많을 리가 없다. 이삼 년이 지나면 교회 순회는 원점으로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그럴 때는 반드시 회개기도문을 준비해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앞으로 나가 지난날 교회에 오지 않은 게으른 나의 죄를 회개하며 다시 신실한 어린양이 될 것을 다짐한다.


단언컨대, 내가 샛길로 샜다면 나는 분명 사기꾼이 되었으리라.

그렇게 무한한 거짓말로 점철된 나의 신앙생활과, 문화적 혜택에 대한 갈증이 어우러지며 나는 어쨌든 매년 여름과 겨울 한정판 크리스천이 되었다.


나의 목소리가 점점 빛을 잃어가던 5학년 겨울에도 역시 나는 성대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교회를 물색했다.

유난히 트리가 크고 반짝이기도 했지만, 친하게 지내는 윤숙이와 현희가 몇 년째 다니고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우리 집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 내가 얌체 크리스천인걸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과 그 교회가 크리스마스에 마을사람들을 모두 초대해 파티를 크게 한다는 점과 공연연습을 하면서 내내 간식을 풍족하게 준다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윤숙이와 현희는 새로운 교인을 데리고 왔다는 기쁨과 그 교인이 게다가 노래까지 잘한다는 사실을 크게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나를 교회선생님들과 아이들에게 소개했다.

따뜻한 환대 속에서 소문으로만 듣던 간식이 한 꾸러미 나오자 나는 정말 잘한 결정임을 확인하고 아주 흡족해했다.


5학년 여학생반을 담당하는 선생님은 크리스마스에 맞춰서 5학년 여학생반은 무용공연과 3 중창을 하기로 결정했다는 말과 함께, 각각을 지도해 줄 선생님을 소개했다. 아이들의 자원과 선생님의 눈썰미로 무용과 중창에 적합한 아이들로 분류가 되었고,  나는 윤숙이 현희의 적극적인 영입과 홍보로 중창으로 배정됐다.


노래를 해야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독창이 아닌 합창이었고 아무리 기량이 떨어졌어도 지역대회 우승자인 내가 이런 시골교회 중창단 정도는 너끈히 감당해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도 선생님은 소예배실에 있는 칠판에다가 ‘북 치는 소년’이라는 글씨를 큼지막하게 적었다.


“얘들아, 우리는 북 치는 소년을 이번 크리스마스에 부를 거야. 다들 한 번씩은 들어봤지?”


물론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크리스마스 캐럴은 종교를 떠나 겨울의 정취를 살리며 낭만적인 멜로디로 어린이들에게 무척 사랑을 받았고, 특히나 당시에는 해마다 연예인의 캐럴앨범이 나올 정도로 인기였으니 나 역시 비록 시즌제 크리스천이었으나 당시의 웬만한 캐럴은 다 꿰고 있을 정도로 좋아했다.


“그런데, 우리가 이번에 부를 북 치는 소년은 조금 달라. 소프라노, 메조소프라노, 알토 이렇게 성부를 나눠서 한 편의  연극처럼 불러볼 거야. 다들 잘해 줄 수 있지?”


‘한 편의 연극처럼’ 부른다는 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들은 눈앞에 놓인 간식에 정신이 팔려 쉴 새 없이 오물거리며 건성으로 우렁차게 대답한다. 노래는 어떻게든 될 것이다.


“새롭게 부르는 거라 연습시간이 많이 부족할 거야. 그래서 오늘은 일단 각자 파트를 정하고 각 파트별로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가볍게 연습하는 걸로 하자. 무용하고 나눠지는 바람에 선생님이 생각했던 것보다 인원이 적어져서 좀 걱정이긴 하지만, 잘할 수 있을 거야. 그렇지? “


우리가 공연할 ‘북 치는 소년’은 선생님들이 편곡을 해서 소프라노, 메조소프라노, 알토의 3가지 성부로 부르게 되어 있었다. 당연히 피아노 반주가 있지만 목소리로 노래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악기처럼 일정한 음이나 박자를 계속 내야 하는 일종의 아카펠라 형식이었다. 지금이야 아카펠라가 익숙한 장르지만, 당시로는 사람의 목소리로 악기소리를 낸다는 것은 몹시 생소한 시도였다.


‘카펠라(cappella)’가 이탈리아어로 교회란 뜻이고, 중세시대 교회에서 반주 없이 사람의 목소리로만 합창한 데서 기인해 무반주 노래를 아카펠라라고 부른 것이니, 크리스마스에 아카펠라로 캐럴 부른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 보면 무척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의미 따위를 알 턱이 없는 나와 아이들은 성탄의 의미보다 반짝거리는 트리와 아름다운 무대, 그리고 우리를 빛내 줄 화려한 무대의상을 상상하며 필요이상으로 들떠 있었다.

당시 노래의 주인공, 노래를 한다는 사람은 무조건 소프라노였다.

조금 사그라들긴 했지만 그래도 여름햇살 같은 목소리가 남아있던 나는 당연히 소프라노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성부를 나누기 위해 선생님은 아이들 하나씩 음계를 따라 음을 내도록 하셨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메조소프라노에 들어갔다. 나는 어차피 소프라노가 될 것이므로 느긋한 마음으로 목을 있는 힘껏 빼어가며 소리를 내는 수탉 같은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드디어 나의 차례였다. 선생님의 건반은 굉장히 낮은음부터 시작했다. 나는 순조롭게 선생님의 건반음에 맞춰서 고요하고 큰 소리로 음을 냈다.

선생님의 눈동자가 빛나는 것 같더니 나를 힐끗 본다.


“너 이번에 새로 온 친구지? 목소리가 좋은데. 어디 음을 좀 더 내보자”


나는 이런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 예의 바르게 미소를 짓고 윤숙이와 현희를 향해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인다.

선생님의 건반은 조금씩 조금씩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처음에는 무척 순조로웠던 그 음들이 어느 순간부터 목에 부담을 주기 시작했고, 마침내 두 옥타브 미에 이르렀을 때 나는 갈라져서 미운소리를 내고야 말았다.


이렇게 지난 몇 달 동안 내가 꽁꽁 싸매고 있던 나의 치부가 세상에 드러났다.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선생님은 다시 한번 건반을 치며 음을 내보라 했고, 나는 역시 그 음을 내지 못했다.


“좋아, 여기까지. 잘했어. 넌 알토로 하자.”


선생님은 기분 좋게 웃으며 내 이름 옆에 알토라고 끄적였다. 당황한 나는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선생님께 되물었다.


“네? 알토요?”


선생님은 자상하게 웃으며 다시 대답한다.


 “응. 알토. 알토가 딱이네. 좋은 목소리야.”


‘알토가 딱이네’ 이 말을 듣는 순간 그 뒤에 선생님이 한 말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세상에.. 내가, 이 지역을 대표하는 노래천재인 내가 소프라노가 아니라 알토라니!

너무 치욕스러웠다. 알토는 그저 노래 못하는 애들을 위한 구색 맞추기식 성부라는 생각이 강했기에 나는 이 결과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그 순간 이 교회에 온 것과 공연을 그것도 노래를 하게 된 것을 크게 후회했다.

화가 가라앉지 않은 나는 벌게진 얼굴로 자리에 돌아오는데, 아이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온다.


“쟤가 독창대회 1등 한 애라고? 높은음이 안 올라가는 것 같은데? ”


비수를 꽂는 듯 날카로운 말들이 너무나 정직하게 내 고막에 꽂혔고, 나는 뜻밖의 모욕을 겪으며 앞으로 제공될 간식이, 크리스마스의 축제가 아쉽지만, 이 교회와의 인연은 오늘로 끝이다라고 생각한다.


다음 차례는 윤숙이었다.

윤숙이는 국민학교 내내 육상부에서 활동할 정도로 운동신경이 좋았고, 까무잡잡하고 다부진 체격의 아이였다.  

‘너도 나처럼 알토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며 나는 분한 마음을 삭히며 윤숙이의 발성테스트를 지켜보고 있었다.


선생님의 건반을 누르며 음을 내자 윤숙이의 곱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연습실을 채운다. 금세 선생님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오른다.

나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선생님과 윤숙이를 바라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킨다. 내가 걸려 넘어진 두 옥타브 미를 넘어 그다음 옥타브 도까지 윤숙이는 흔들림 없이 힘 있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안정적으로 냈다. 선생님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진다.


“윤숙이는 이제 아가씨가 다 됐구나. 목소리가 너무 예쁘다. 윤숙이는 소프라노!”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매일 뜀박질만 해대는 윤숙이가 소프라노라고? 저 선생님 귀가 어떻게 된 거 아냐. 쳇! 저런 가성은 누구나 낼 수 있단 말이에요!’

나는 질투심으로 이글이글 타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기존 신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려는 교회 측의 꼼수가 아닌가라는 의심이 들며 나는 더욱더 억울해진다. 환하게 웃으며 윤숙이가 자리에 앉자 현희가 쑥스러운 듯 일어서 피아노 옆에 선다.


현희는 한복집 딸로 엄마를 닮아 바느질을 잘하고 손재주가 좋은 아이였다. 그러나 다소 작고 가느다란 목소리를 가진 아이라 노래와는 큰 인연이 없어 보였다. 아마 현희는 메조소프라노가 되거나 아님 나와 같이 알토가 될 것었다.


현희가 긴장을 풀고 선생님과 눈을 맞추자, 선생님은 그에 맞춰 건반을 친다.


“아~”


한 번도 주의 깊게 들어본 적 없던 현희가 목소리가 소예배실에 울려 퍼진다. 마치 바이올린처럼 가냘프지만 애잔하고 날렵하지만 날카롭지 않은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현희가 저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아이였구나. 나는 내심 놀랐다. 선생님의 건반이 한옥타브 한옥타브 올라갈 때마다 현희는 오히려 안정을 찾아가며 자기의 성대에 활을 켜듯 자유롭게 건반 위를 노닐고 있었다.


“현희야 너 왜 노래 잘한다는 말을 안 했어? 무용으로 갈 뻔했는데 너무 다행이다. 현희도 소프라노!”


선생님은 보석을 발견한 듯 크게 기뻐하며 악보대에 있는 명단에서 현희의 이름 옆에 연필로 소프라노라고 적고 있었다.


이건 악몽이다. 이건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거다. 나는 이 지역을 대표하는 유명가수다. 내가 저런 무명가수들에게 질 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수치심과 모욕감 그리고 질투심으로 엉망이 된 내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바득바득 이를 갈며 화를 삭이고 있었다. 어차피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파트를 다 나눈 선생님은 이제 공연에서 파트별 자리를 잡기 위해 우리를 모두 무대 앞으로 불러 세웠다.


소프라노 4명, 메조소프라노 4명, 알토 2명.

대열은 완만한 V자 모양으로 꼭짓점은 전체 대열의 한가운데였으며, 무대의 가장 중앙이었고, 객석과 가장 가까운 자리였다.


자리배치를 보니 알토는 진심 버리는 파트가 맞았다. 대열의 가장 양끝에서 무대의 가장 구석진 곳에 나의 자리가 있었다.


별빛같이 환한 조명을 받으며, 예쁜 옷을 입고 노래하는 모습을 상상하던 나는 이제는 화 낼 기운도 없었고, 그저 서러움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기예수의 탄생이고 뭐고 그냥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그런 나의 마음과 상관없이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악보를 나누어주고, 각 파트별로 피아노 연주를 하며 노래시범을 보였다.


속이 상한 나는 심술이 잔뜩 난 눈으로 악보를 노려본다. 소프라노와 메조소프라노는 일단 완전한 가사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고, 음의 높낮이도 다양하여 음표가 오선지 위에서 즐겁게 춤을 추고 있었다.


음표의 배열만 보아도 이 노래의 주인공은 소프라노와 메조소프라노였다. 하하 호호 오선지 위에서 발랄하게 춤추고 있는 그 음표 대가리들을 손톱으로 꾹꾹 눌러 다 터트려버리고 싶어 진다.


마지막으로 알토 시범이 있다.

밤.. 밤.. 라파파밤.. 밤.. 밤.. 라파파밤.. 밤..밤..밤..밤밤..밤..밤..밤..밤밤 라파파밤..라파파밤.

 

알토의 가사는 의성어가 대부분이었다. 계속 북소리를 내며 노래의 배경과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라 했다. 기쁜 소식이지만 늦은 밤이니 가볍고 시끄럽지 않되 경쾌하고 웅장하게 불러야 한다는 선생님의 주문이 이어진다.


12살의 어린아이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주문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나는 오늘 이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깟 교회를 떠날 작정이었으니까.


그렇게 선생님은 각 파트별로 두 번씩 반복해서 들려주고 세 번씩 같이 불렀다. 어느 정도 각자의 파트에 익숙해 지자, 이제 오늘 연습의 마지막으로 다 같이 부르기로 한다.

알토가 멍청한 북소리로 노래의 시작을 열면, 메조소프라노가 요정처럼 사뿐사뿐 부드럽게 노래를 시작하고 곧이어 마중하듯 소프라노가 여신처럼 등장해서 화려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함께 춤을 추듯 노래했다. 그런 화려한 화음 사이에서 우리 알토 둘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구석에 서서 기계처럼 뻐끔거리며 ‘밤..밤.. 라파파밤’이라는 멍청한 주문 같은 가사를 무한히 반복한다.


이런 바보 같은 노래는 생전 처음이며, 이건 분명 예수님이 매년 여름과 겨울에만 교회에 삐죽 얼굴을 내밀고 얌체같이 간식만 먹다가 사라지는 나를 벌주는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원망과 의심의 눈으로 정면에 보이는 십자가를 노려보고 또 노려본다. 그렇게 두 시간이 훌쩍 넘어서야 내 인생 최대의 모욕적인 시간이 끝났다.


윤숙이와 현희와 함께 돌아가는 길에 어색한 정적이 감돈다.

왠지 모르게 이 아이들에게 뭔가 속은 느낌이 들고 배신감과 질투로 나는 입을 굳게 다물고 바닥만 보며 열심히 걷는다. 두 아이는 아무 말도 없이 내 걸음에 보조를 맞춰 걷다가 각자의 집으로 향한다.


집에 도착한 나는 지칠 대로 지쳐 벌렁 드러누워 죄 없는 천장을 노려본다.

‘정말 어이가 없네. 그 교회도.. 소프라노가 된 애들도..’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이제 노래 따위는 다시는 부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다음 연습에 나는 가지 않았다.

윤숙이랑 현희의 눈을 피해 나는 살금살금 내빼서 집에 오자마자 가방을 냅다 던져놓고 친구네 집에서 놀다 온다는 말을 남긴 채 황급히 사라졌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나는 매일매일 윤숙이랑 현희와 숨바꼭질을 했다. 그 아이들이 잘 못한 게 하나도 없었지만 이미 나의 질투심은 이성을 마비시켰고 나는 그 아이들이 교회와 한통속이라는 생각을 굳혀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나의 못난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윤숙이와 현희는 매일매일 학교가 끝나면 나를 찾아왔고 덕분에 나는 집에 없는 척, 아픈 척 온갖 상황을 설정하고 연기를 해야 했다.

그렇게 연습을 제치고 심술 부리기를 5일째.. 이제는 오지 않겠지라고 방심하고 있던 나는 저녁을 먹고 누워서 한가롭게 TV만화를 보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두 아이들을 피할 수 없었던 나는 머쓱한 표정으로 일어나 앉았다. 막상 윤숙이와 현희의 얼굴을 보니, 그렇게 줄기차게 도망치는 나를 원망하기는커녕 매일매일 찾아왔던 그 아이들의 눈동자를 마주하니 나는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애초부터 말도 안 됐던 그들에 대한 질투와 분노가 눈 녹듯 사라진다.


현희가 들고 왔던 종이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것 같더니 색색의 천 뭉치가 언뜻 보였다.


“이건 이번 크리스마스 공연 때 달려고 엄마한테 부탁한 거야. 빨간리본, 하얀리본, 초록리본 이렇게 세 개를 만들어봤는데, 어떤 게 제일 예뻐?”


현희는 내 앞에 커다란 공단리본 세 개를 펼쳐 놓았다. 하나같이 곱고 우아한 광이 났다. 나는 난감했다. 공연을 하지 않을 작정인데, 리본을 고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내가 주저하자 현숙이가 쾌활한 목소리로 거든다.


“현희엄마가 우리 셋이 공연한다고 하니까 너무 잘됐다고 만들어 주신다고 했대. 난 빨간리본이 제일 맘에 들던데, 너는?”


“빨간리본이 이쁘긴 한데, 난 초록색이 좋아.”


나는 할 수 없이 못 이기는 척 대답하고 만다. 현희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번진다.


“그래? 그럼 알토는 초록리본으로 하고, 소프라노는 빨간리본, 메조소프라노는 흰색리본으로 하면 되겠다. 엄마한테 만들어 달라하고 교회선생님께도 말씀드려야지!”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리본만 만지작거렸다. 이 아이들이 이렇게 마음을 써주는데 계속 심술을 부리는 건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노래를 즐거운 마음으로 할 자신이 없었다.


“너는 하나도 안 떨리지? 사실 난 앞에 나가서 노래하는 게 너무 떨려. 그런데 노래 잘하는 너랑 또 윤숙이랑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같이 노래를 해보겠나 싶더라.”


현희는 내 표정을 살피며 달래듯이 따뜻하게 말을 건넨다.


“네가 우리 학교 독창대표라고 우리가 엄청 자랑했단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랑 같이 열심히 준비해서 크리스마스 축제에 나가자. 응?”


윤숙이의 채근에도 나는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한다.


“현희엄마가 리본도 만들어 주시고 망토도 만들어 주신다는데, 네가 이제 와서 안 나간다고 하면 우리는 어떻게 하냐? 난 그날 입으려고 엄마 졸라서 원피스도 샀단 말이야.”


망토. 이건 반칙이지 않은가! 리본에 망토라니 매우 완벽한 무대의상이 갖춰진 것이다.

내 머릿속에는 이미 리본에 망토를 두르고 무대에 서 있는 내 모습을 떠오른다.


“망토?”


내가 반응을 보이자, 두 아이들은 이때다 싶었는지 그날의 무대의상이며 무대연출, 잘생긴 남학생들의 참석여부 등등을 늘어놓는다. 나는 그들의 전략에 점점 무장해제가 된다.


우리 집을 나서는 그 순간까지 내일부터 연습에 꼭 참석하라는 다짐을 받는 아이들을 배웅하며 나는 작은 한숨을 쉰다. 알토는 내키지 않지만 친구들을 위해서 이깟 모욕쯤은 눈 감을 수 있다고 스스로를 달랜다.


이튿날, 저 멀리 교회가 보이자 나는 다시 심경이 복잡해지며, 돌아갈까 하는 마음이 든다. 그러나 양쪽에서 내 팔을 단단히 끼고 걷고 있는 윤숙이와 현희는 교회가 가까워질수록 팔에 더욱 힘을 주고 빨리 걷는다.


연습실에 들어서자 왁자지껄한 소란 속에서 피아노 연주를 연습 중이던 선생님이 가장 먼저 반갑게 맞이한다. 이어서 아이들이 하나둘씩 내 곁으로 와 아프다고 들었는데 괜찮은지, 몸은 다 나은 것이지 살뜰히 챙기며 맞이해 준다. 이런 환대가 고맙지만, 꾀병환자는 아무 말 없이 웃을 뿐이다.


그동안 달랑 2명인 알토를 혼자서 하느라 고생한 내 파트너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우리는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재빨리 도열을 맞추고 성부별로 점검에 들어간다.


첫 연습 이후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던 내 덕에 알토파트의 점검이 가장 길어졌다. 윤숙이와 현희의 성화에 못 이겨 나오긴 했지만, 다시 그 멍청한 주문 같은 노래가사를 반복하자니 후회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연습을 거듭해도 나는 계속 뒤끝작렬의 태세로 건성건성 대충대충 노래를 불렀고, 기대했던 노래의 분위기가 만들어지지 않자 선생님은 연습 내내 힘들어하며 작은 한숨을 여러 번 내쉬었다.


“자, 오늘도 모두 수고했어. 다음 주에 방학이지? 방학하면 크리스마스 전까지 매일 나와서 연습을 좀 해야 할 것 같아.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고 다른 분들과 그 기쁨을 나누기 위한 공연이니까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하자.”


선생님은 피아노 의자에 걸터앉아 연습 후에 나오는 간식을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켕기는 게 있어서 간식을 먹으면서도 중간중간 선생님을 몰래 살펴본다.


“음.. 알토 파트는 간식 먹고 바로 가지 말고, 선생님이랑 잠깐 얘기 좀 하고 가자.”


무슨 할 얘기가 있다는 걸까, 혹시 내 꾀병이 들통이 난 것일까. 소프라노가 되지 못해 심술을 부리고 있는 내 마음을 이미 다 꿰뚫어 보고 계신 것일까.


아이들이 각자 인사를 고하고 연습실을 나간다. 윤숙이와 현희는 나에게 눈인사를 하며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킨다. 기다리겠다는 뜻이리라.


이윽고 알토만 남자 선생님은 어깨를 으쓱하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다른 파트는 4명씩인데, 알토만 2명이라 많이 힘들지? 근데 너희들 목소리가 우렁차고 좋아서 선생님은 걱정도 안 되고 너무 고마워.”


우리들은 별말 없이 이야기를 계속 듣는다.


“먼저 이것부터 좀 들어볼래? 많이 들어봤을 ‘북 치는 소년’이야.”


선생님은 피아노 위에 있던 소형 카세트플레이어를 피아노 의자에 내려놓고 재생버튼을 눌렀다.


아직도 아기티가 배어있는 소년의 귀염성 있는 목소리가 연습실에 울려 퍼진다.


노래가 끝나자 선생님은 우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자, 어때? 우리가 부르는 북 치는 소년과 비교했을 때 어떤 점이 달라?”


첫 소절이 끝나기 전에 나는 이 원곡과 우리의 노래가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귀여운 아이가 고요한 밤에 촛불을 하나를 들고 아기예수의 탄생을 차분한 기쁨으로 노래하는 듯한 원곡과 달리, 우리의 노래는 아직 아기 예수가 태어났는지 모르고 불을 끄고 깊은 잠에 빠진 마을 입구에 서서 두둥두둥 북소리와 함께 뭔가 기쁜 소식이 있음을 예고한다. 곧이어 아기예수가 탄생했다는 천사와 요정들의 노래로 온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불을 켜고 거리로 나와 이 행복하고 은혜로운 밤을 노래하는 것이었다.

같은 곡이었지만, 분명히 다른 노래이기도 했다. 한 편의 연극처럼 부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희미하게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곡을 다르게 해석하거나 다른 분위기를 내고 싶어서 살짝 변화를 주는 걸 편곡이라고 하는데, 전도사님이랑 다른 선생님들과 이 곡을 짜느라 무척 고생했어. 그러고 나서 편곡을 마치니까 너무 좋은 거야. 그래서 가장 실력이 좋은 5학년 여학생들이랑 해보고 싶다고 내가 고집을 부렸어. 단, 문제는 무용하는 팀 하고 나눠져서 인원이 별로 없다는 거였지. 그래서 어떻게 파트를 나눠야 하나 무척 고민했는데 마침 이렇게 새로운 친구가 들어오고 웅장하고 좋은 목소리를 갖고 있어서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선생님은 찬찬히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따뜻한 눈빛 속에는 다독거림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고마운 점이 또 하나 있어. 대부분 사람들은 소프라노가 노래 주인공이라고 생각해. 그런데 합창은 부르는 사람 모두가 주인공이야. 누구 하나가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면 그 노래 전체는 엉망이 되거든. 인원이 적은데도 두 사람이 이 편곡노래에서 정말 중요한 알토를 너무도 잘해주고 있어서 선생님이 소프라노랑 메조소프라노를 좀 더 여유 있게 꾸려갈 수 있었어. 이건 비밀인데 사실은 알토파트 덕분에 이 곡이 특별해지는 거야.”


우리 둘 다 아무 말 없이 그저 선생님을 바라보고 있었고, 선생님도 우리 둘을 번갈아 보면서 미소 짓고 있었다.


“우리 알토들이 내는 북소리는 사실 ‘기쁜 소식입니다! 아기예수가 태어났습니다! 구세주가 태어났습니다!’라고 온 세상을 향해 말하는 거야. 그래서 알토의 역할이 중요한 거고. 다음 연습 때부터는 이런 생각을 머릿속에 넣고 제대로 연습해 보자. 알았지?”


고작 ‘라파파밤’에 그런 깊은 뜻이 있는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연습실을 나오니 교회문 앞에 윤숙이와 현희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랑 노래하는 게 좋다는 저 아이들, 내 역할이 중요하다는 선생님.. 어쩌겠는가, 내가 또 열심히 해줘야지.


2주 전만 해도 난 이 아이들이 세상에서 제일 미웠고, 이 아이들 때문에 내가 망신을 당하게 됐으며, 고로 다시는 교회 따위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이 아이들이 내미는 따뜻한 손길에, 교회 선생님이 다정한 위로에 다시 노래가 부르고 싶어졌다.

그 편곡인지 뭔지를 한 ‘북 치는 소년’을 기왕이면 최고로 멋진 노래가 되도록 만들고 싶어졌다.


다음 연습부터 나는 여태껏 보여준 적 없는 열의로 풍부한 감정과 연기까지 더해가며 열심히 부른다. 이제 나의 목적은 간식도 아니요, 자존심의 회복도 아니다. 이제 나는 북 자체다. 나의 목소리로 최고의 북소리를 내어 이 기쁜 밤을 축하하는 것이다.


우리의 노래는 매일매일이 달라지게 듣기 좋아졌고.. 화음은 톱니바퀴처럼 짝짝 맞춰졌다.

나는 점점 이 노래가 좋아졌고, 내가 알토라는 게 뭔가 특별한 미션 같아서 좋아졌다.


크리스마스이브, 교회가 있는 마을 전체가 축제가 되는 그날 밤은 밤하늘에 뜬 별이 시려 보일 정도로 맑고 차가운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대예배실 무대에는 온갖 색의 구슬과 반짝거리는 작은 전구들과 선물, 별, 루돌프, 솜뭉치들의 장식이 화려하게 수놓은 커다란 크리스마스가 양쪽에 서 있었다. 그리고 추운 겨울밤 길을 걸어 얼굴이 홍시처럼 발개진 사람들의 기대에 찬 눈동자가 반짝거리며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1부 행사 제일 마지막이 우리 순서였다.

현희어머니가 멋진 솜씨로 만들어 주신 커다란 리본을 머리에 꽂고, 리본색과 맞춘 공단 망토를 걸친 우리는 그날 밤 모두 어린 천사 같았다.


현희는 무대에 오르기 직전까지 윤숙이와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 손이 덜덜 떨리는 것으로 봐서는 녀석 진짜로 몹시 긴장하고 있는 듯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현희의 손을 잡고 싱긋 웃어 보였다.


조명이 꺼진 무대 위에서도 객석에 가득한 까만 눈동자들이 보였다.

현희의 긴장이 전염돼서 일까.. 그 눈동자들을 보자 나도 살짝 떨리는 마음이 든다.

이윽고 선생님의 전주가 시작이 된다.


“밤.. 밤.. 라파파밤.. 밤.. 밤.. 라파파밤..”


알토가 웅장한 북소리로 노래의 시작을 연다. 피아노 연주와 어우러져 인공안개가 바닥에 깔리자 무대는 베들레헴의 밤을 옮겨 놓은 듯하다.

그 아름다운 공간을 소프라노와 메조소프라노의 부드럽고 고운 목소리가 서서히 채워간다.


그날, 그 겨울밤 고요히 잠든 마을의 밤공기를 향해 기쁜 소식이 울려 퍼진다. 사람들은 저마다 잠이 덜 깬 듯 눈을 비비며 일어나고, 아기예수의 탄생을 듣자 누구랄 것도 없이 거리로 뛰쳐나와 갑작스러운 한밤의 축제가 열린다.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우리들의 귀에 그 모습이 역력히 펼쳐진다.


그렇게 그해 크리스마스에 단순히 간식을 얻어먹을 요량으로 교회에 갔던 나는 뜻하지 않는 인생의 고배를 맛봤지만, 평생 잊지 못할 환호와 박수로 벅차오른 마음을 선물 받고 무대를 내려온다.


우리들의 ‘북 치는 소년’은 대성공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늦은 밤 우리 셋은 ‘북 치는 소년’을 부르고 또 부르며, 웃고 또 웃으며 추운 줄도 모르고 걸었다.


피식하고 웃음이 난다.

마시던 커피는 어느새 식었고, 뜨거웠던 찻잔도 작은 온기만 남아있다.


그렇게 주인공이 되고 싶어 했던 나의 어린 야망과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어울려 사는 법과 세상살이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한 자세를 가르쳐 준 그 시골교회의 작은 선생님을 생각하니 얼굴에 찻잔의 온기 같은 미소가 떠오른다.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에서 중저음의 낮고 다소 굵은 목소리로 변한 나의 얄궂은 운명.


인어공주는 자신의 목소리를 잃고 사랑도 이루지 못한 채 물거품이 되어 버렸지만, 나는 그저 내 목소리만 잃었을 뿐(변했을 뿐이 정확하지만) 사는 데 지장이 없으니 어쩌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시 스노우볼 안을 들여다보듯 서울역을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을 쳐다본다.

각자 자기만의 ‘상실’ 하나쯤은 안고 있겠지만, 나처럼 아무 일 없다는 듯, 그래도 끄떡없다는 듯 씩씩하게 팔을 휘휘 저으며 걸어가고 있다.


아마 우리가 물거품이 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고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상실이 상실로만 끝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중저음으로 변한 내 목소리로 더 힘 있는 웅변이나 차분한 행사진행을 할 수 있었듯, 비뚤어진 내 마음을 달래주는 우정 어린 친구들 덕분에 무대에 오를 수 있었듯.. 그렇게 아이러니하게도 상실은 또 다른 채움으로 나를 성장시켜 왔다.


상실의 순간 내가 가진 것에 새로운 눈을 뜨고 쉬이 낙담하지 않는 것.

그것이 아마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이고, 그것이 아마 우리를 강하게 하는 힘일 것이다.


그러니 물거품이 되지 않고 오늘을 살아가는 나와 당신은 얼마나 대견한가!

거친 파도를 누비며 파닥파닥 꼬리지느러미를 쳐대는 인어들이여, 그대들을 위한 나의 주문이다.


“라파파밤”


작가의 이전글 나의 입시해방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