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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상 Feb 05. 2024

나의 입시해방기

(20세기말 어느 한심한 수험생의 성장기)


나는 삼수생이었다.


서울대를 가기 위한 선택이었냐고? 물론 아니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삼수까지 한거냐.. 지지리도 공부를 못한 거 아니냐고 되묻는다면 다소 억울하긴 하지만, 솔직히 할 말은 없다.


명문대 진학이 목표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나는 그 시절 때때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었고, 나의 욱하는 성정과 게으른 습관, 그리고 요행을 바라는 어리석은 마음이 총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며 시너지를 내는 바람에 나는 그 지난하고 지루한 인고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다시 돌아와서, 어쨌든 나는 삼수생이었다.


초겨울 아직 어둑어둑한 이른 아침 어김없이 찾아온 수능한파에 감기라도 걸릴까 봐 꽁꽁 싸매고 긴장감 가득한 시험장으로 향한다.

북과 징을 동원한 요란한 후배들의 응원과 묵주를 손에 두르고 노심초사하는 부모들, 경광등을 번쩍거리며 대기하고 있는 경찰차를 뒤로 하고 조용하고 깊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교문 안으로 들어선다.


나는 이 일을 세 번이나 겪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세 번의 수능을, 3년의 고행길을 국, 영, 수 중심의 교과서 위주로 공부하면서 착실하게 대비했다기보다, ‘나’라는 인간은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세상에 존재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근원적 질문에 답을 얻고자 방황했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절망의 순간에 문학에 심취하기도 하고, 풀리지 않는 수학문제와 씨름하며 삶의 자세에 대해 고찰하게 되었다. 눈부신 청춘의 유한성과 대비되는 학문과 예술의 영원성을 깨닫고, 그 가운데서 나 자신을 수양하는 생의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그렇다. 남들은 시간을 쪼개가며 수능 1점이라도 올리려고 밤낮없이 공부에 매진하던 때에 나는 엉뚱하게도 ‘도(道)’에 빠져 있었으니, 이미 당신은 예상하고 있겠지만 나의 입시는 처음부터 시행착오였고, 굽이굽이 험난한 역경이 예약돼 있었다.


그 불안한 서막은 나의 고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1막 1장 - <객기는 결국 부리는 사람이 손해 보는 게임이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나는 본격적으로 사춘기에 접어들었다.

연애나 로맨스에 심장이 쿵쾅거리는 시기는 애즈녁에 졸업했고, 이미 그즈음에 나는 내가 속한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굉장히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고 거칠게 반항했다.


그 시절 내게 학교는 고등교육이라는 그럴싸한 말로 포장됐지만, 결국 명문대학 진학이 지상목표였고 그 기준으로 학생들을 쪼로록 줄 세우기 하고, 그 위치에 따라 사람의 가치를 제단하고 차별하는 비인간적인 세상이었다.


‘대관절 당신들이 무엇이길래 우리의 무한한 가능성, 우리의 빛나는 잠재성을 함부로 판단하는가!’


이렇게 삐딱한 생각이 자리 잡히자, 선생님들이 곱게 보일리가 없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선생님들에게는 대놓고 반항하기 시작했으며, 친구들과 얘기할 때는 ‘선생님’이란 단어는 아예 쓰지 않고 그들을 ‘직업교사’로 통칭했다.


학교 야자도 집이 멀다는 이유로 거부하고(이 일로 당시 담임은 나를 교무실로 불러 공개적으로 큰소리로 나무랐으며, 내 생활기록부에 ‘준법성이 부족하다’는 기록을 남겼다.), 선생님의 수업방식이 맘에 들지 않으면 지목당해도 대답하지 않거나 알아도 ‘모르겠는데요’라고 싸늘하게 대꾸했다.


선생님으로 대표되는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이 거듭될수록 나는 내가 마치 부조리에 대항하는 용맹하고 정의로운 투사라도 된 냥 점점 더 불필요하게 과감해지기 시작했고, 여기서부터 나의 비극의 씨앗이 본격적으로 움트게 된다.


시작은 ‘가사(家事)’라는 과목이었다. 일단 과목명 자체가 어이가 없었다.

왜 여학생만 학교에서 집안일을 교과목으로 따로 배워야 한단 말인가!


턱 밑에 콩알만 한 까만 사마귀점이 있어 별명이 ‘콩자반’이었던 가사선생님은 지금 생각해 보면 별로 잘못한 것이 없었고, 다만 내가 따분하게 생각하는 내용을 성실히 가르쳤을 뿐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왜 블라우스나 버선 따위를 만들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그냥 딱 교과서에 나온 대로 똑같이 만들었는가를 가지고 평가하는 방식에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흰색 광목이 아닌 꽃무늬 원단에 제각각의 단추를 달아 나는 감점을 받았고, 이에 나의 인내는 한계에 달해 이후의 실기에서 일부러 버선코를 비뚤게 한다던지, 한국자수에 나비 날개무늬를 짝짝이로 한다던지 하여 의도적으로 실기를 망쳤다.


내가 살면서 손수 옷을 지어 입을 일이 있겠냐며 나는 이런 성차별적이고 시대에 뒤처진 교육을 받을 수 없다며 치를 떨었고, 이런 나를 친구들은 그래도 굳이 실기점수를 깎일 필요가 있냐며 다독였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예의 그 바느질 실기는 이론도 꽤 골 때렸는데, 옷을 짓거나 자수를 놓을 때마다 정해진 바느질법이 있었고 그 바느질의 모양과 바느질법의 이름을 암기해야 했다.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봉제공장에 다니는 것도 아니고 고등학교 학생이 왜 이걸 배우고 달달 외워야 하는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해서 나는 애초에 암기만 하면 거의 만점을 받는 그 과목을 공부조차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가부장적 교육제도에 대한 강한 항의의 의미로 문제도 읽지 않고, 전체 답을 ‘5번(제일 꼴찌 다는 의미로)’으로 내리 마킹하고 시험을 마쳤다.


30점.

내 학창 시절을 통틀어 가장 최악의 점수였다. 성적표에서 유일한 ‘가’를 기록하게 된 역사적 날이기도 했지만, 그 당시에 나는 기성세대와 질서에 순응하지 않은 이 ‘가’가 전리품이나 훈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 자신이 무척 기특하고 자랑스러웠다.

문학선생님은 성격파탄자 같아서, 교련선생님은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윤리선생님은 야한 얘기를 자주 해서 싫었고, 한결같이 엉망의 성적으로 그들에게 통쾌한 복수의 펀치를 날려주었다.


현실에 거세게 저항하면서, 현실파악은 제로에 가까웠던 나는 대한민국 입시제도를 미처 알지 못했고, 그래서 그 중요한 고교내신을 보기 좋게 박살 냈으며 이 객기가 결국 입시 내내 원하는 대학문턱을 넘는 데 크나 큰 장애가 되었다.



제1막 2장 - <열 번을 찍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다>


고2 겨울방학 때였다.

‘고3 되면 열심히 공부하지, 뭐’라는 생각으로 나는 매일매일 TV를 끼고 뒹굴거리고 있었다. 마침 우연히 그해 처음으로 선발한 공군사관학교 여자생도 이야기가 다룬 다큐멘터리가 방송되었다.


순간 ‘지잉~’하고 머릿속에서 종이 울리는 것 같았다.

그래 이거다!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고 절제와 명예를 최우선으로 하는 사관생도야 말로 나의 길이었다.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그 순간 나의 진로를 결정했다.


소문낸다고 되는 일은 아지만, 나는 그다음 날부터 사관학교에 지원할 것이라고 떠들어댔고, 당시에 여자생도를 선발하거나 선발할 예정인 공군사관학교와 육군사관학교에 수 없이 편지를 보내서 온갖 질문을 퍼부었다.


매월 공사와 육사에서 보내주는 학교신문과 각종 홍보책자를 가지고 다니며 신문 보듯 수시로 펼쳐보았고, 밥을 먹을 때는 사관생도 직각식사를 따라 하고, 친구들과의 인사는 경례로 대신했다. 이미 나는 반쯤 사관생도나 다름없었고, 공사냐.. 육사냐.. 둘 중 하나를 간택하면 되는 거였다.


단 한 번도 내가 그곳에 진학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나의 모든 일정은 사관학교 입시에 맞춰져 있었고, 입학을 위한 체력시험도 벌써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사관학교는 1차 내신, 2차 체력시험, 3차 수능점수 이렇게 총 3차의 단계를 거쳐 최종선발한다. 1차 관문인 내신이 좋지 않으면 애초 도전자체가 불가능한 구조였는데, 당시 남자생도의 경우 커트라인이 매우 높은 편이 아니라는 점만 믿고 나는 이성을 잃은 채 희망회로를 풀가동하며 안타깝게도 계속 나아가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이미 나의 객기로 고등학교 내신을 말아먹었으며, 당시 여자생도들의 경쟁률은 대략 공사와 육사가 25:1, 해사가 50:1이었다.


당연히 내신 1등급이 아니면 애초에 명함도 내밀 수 없었으며, 게다가 나는 ‘준법성이 부족하다’는 군인으로서는 크나큰 결격요소를 학생부에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보고 싶고 듣고 싶은 정보만 선별해서 취하며, 이 열정이라면 반드시 이룰 수 있다고, 나의 이 절절한 충성심을 국가가 알아주지 않으면 누가 알아주냐며 사관학교의 문을 참으로 세차게 집요하게 두드렸었다.


그 열렬한 구애가 끝끝내 받아들여지지 않고 쓰라린 실연만이 덩그러니 남아있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씁쓸한 마음을 정리하는 데에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20대 내내 나는 그 열병을 품은 채.. 종종 아파했고, 후회했고, 길을 가다 우연히 군복 입은 사람만 봐도 그들이 이유 없이 미웠다. 바보 같은 대한민국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이 시기를 통해 나는 언제 어떤 길이 펼쳐질지 모르기에 어깃장 놓는 일에 내 인생을 걸어서는 안 되며, 때때로 현실에 충실해야 하며, 마음만으로 이룰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아주 제대로 배우게 됐다.


나는 재수를 결심한다.



제2막 1장 - <IMF 시대에도 청춘은 빛나더라>


수능이 끝나고 얼마 뒤 갑작스럽게 세상이 어수선해졌다.

1997년 대한민국이 건국 이래 최대의 국가부도 위기를 겪으며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일명 ‘IMF 사태’가 터진 것이다.


연일 TV나 라디오에서는 대한민국이 실패했고, 기업들이 부도가 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갑작스러운 해고됐다는 팩팩한 뉴스가 쏟아졌다.


대기업에 다니던 옆집 아들이 하루아침에 백수가 되고, 사업을 하던 친구 아버지가 부도가 나고, 대학생이 된 친구들은 군대를 가거나 학비를 벌기 위해 휴학을 선택했다.

뉴스를 통해 보는 남의 얘기가 아니라 이미 IMF는 나와 이웃의 이야 가 돼 있었다.


우리는 잘못한 게 없는 것 같은데.. 갑자기 모두가 가난해지고, 모두가 불행해졌다.

그렇게 암울하고 슬픈 시대에 나는 스무 살을 맞았다.


그러나 청춘은 그 어느 순간에도 눈부셨으며, 그 어디에서도 반짝하고 빛이 났다.

우리는 이제 갓 스물의 성년이 되었고, 그 암울한 시대에도 각자의 에너지로 아름다운 빛들을 뿜어내며 더 넓은 세상을 향해 힘차게 헤엄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납득할 수 없는 사회의 부조리, 나의 꿈과 미래를 잠시 내려놓고 이 찬란한 한 때를 만끽하기로 한다.

당연하지 않은가. 나는 스무 살이었고, 때는 바야흐로 봄이었다.


중간고사를 마친 대학에 봄 축제가 시작됐다. 젊음과 웃음과 설렘과 낭만이 곳곳에서 꽃망울을 터트리며 흐드러지게 피어 향기만으로도 아찔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친구들이 다니는 대학교 축제나 광화문, 종로에서의 거리공연을 부지런히도 찾아다녔고, 그 한가운데서 끓어오르는 청춘의 흥을 맘껏 폭발했다.

노래방에 일수라도 찍는 듯 매일같이 가서 신들린 사람처럼 노래를 불러댔고, 주말이면 수 없는 고민 끝에 고르고 고른 옷을 차려입고 대학로를 서성였다.


카페는 우리의 낙원이었으며, 스티커 사진은 필수코스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시절 우리에게는 삐삐가 있었고, PC통신이 있었다.


32비트 초창기 윈도 컴퓨터의 통통한 모니터를 끌어안고 우리는 나우누리, 유니텔을 통해 얼굴 한번 본 적이 없는 전국의 청춘들과 단숨에 친구가 되어 버렸다.


신세계였다. 이것이 진정한 문명의 이기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이와 사는 지역을 말하며 자연스럽게 자기소개가 이어지고, 얘기를 나누다가 마음이 맞으면 각자의 삐삐번호를 공유한다.


이쯤 되면 암호 같은 숫자들로 이루어진 삐삐전용 메시지들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가고, 짬만 나면 공중전화에 매달려 음성사서함에 상대가 남겨놓은 메시지를 확인한다.


삐삐친구와 좀 더 친밀감이 생기면, 이제는 ‘번개’를 통해 현실세계에서 대면하는 일이 기다리고 있다. 누구는 폭탄을 만났다고 불평했고, 누구는 킹카를 만나 진도를 더 나갔다 했고, 누구는 이유 없이 바람을 맞았다고 허탈해했다.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그렇게 재밌을 수 없고, 별 얘기도 없는 삐삐 음성사서함에 혹여라도 새로운 메시지가 저장됐을까 봐 수시로 확인하는 수고조차 즐거웠다.


그렇게 나의 스무 살 봄은 풋풋하고, 다채롭고, 생기가 넘쳤다.

시간은 잘도 흘러갔으며, 여름이 끝에 다다를 무렵에서야 나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맞다. 나 재수생이었지.’



제2막 2장 - <감성의 허영은 필연적으로 시를 잉태하고 있었다>


가을을 앞두고 나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연초에 계획했던 것은 단 하나도 실행하지 못했고, 좀 더 높은 점수를 획득해 타이틀이라도 얻기 위해 명문대 진학도 플랜 B로 세워뒀지만 실현가능성이 매우 희박했다.


8월의 끝자락에서 나는 여름 내내 실컷 놀다 다가올 겨울을 갑자기 걱정하는 베짱이 신세가 되어, 어떤 결단도 내리지 못한 채 엄습해 오는 불안에 초조해했다.


그러나 가장 현실적이어야 할 때, 가장 비현실적으로 희망회로를 돌리는 나의 특성은 이때도 여지없이 발현된다.

아직 내 머릿속에는 고등학교 때 내용이 그대로 남아있다. 따라서 남은 90여 일 복습만 제대로 한다면 그럭저럭 괜찮은 점수가 나올 것이다. 걱정 없다!


나는 알찬 90일을 계획하기 위해 다이어리를 구입한다.

수능일을 디데이로 하고 남은 일수와 학습분량을 나눠서 월간계획표에 빽빽이 기록해 둔다. 이렇게 착실히 하면 어쩌면 나는 만점을 받게 될지 모른다는 허무맹랑한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그 다이어리를 구입한 것은 참으로 쓸데없는 일이기도 했지만 큰 실수였다.

당시 나는 집에서 공부하며 재수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낮에는 여러 방해요인이 많아 공부에 집중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낮과 밤을 바꿔서 생활하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휴식을 잠시 취한 후 공부를 시작해서 아침에 마무리한다. 아침식사를 하고 잠시 TV시청을 하며 소화를 시키고, 수면모드. 이 사이클의 반복이었다.


공부여건을 감안한 이상적인 사이클로 보였지만, 사실 아무도 깨어있지 않는 새벽의 아늑한 분위기에 젖어 나는 공부에 집중하기는커녕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라디오 음악에 빠져들었고, 그러다가 가끔씩 라디오 프로그램에 사연을 쓰는 지경에 이른다.


시시한 이야기 따위가 방송될 리가 없다. 사연 보내기에 싫증이 난 나는 다이어리를 펼쳐 들고 끄적이기 시작한다. 그날의 기분이나 특별한 일을 기록하는 걸로 시작한 끄적임은 스티커를 갖다 붙이고, 색색의 펜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하나의 작품을 내듯 정성을 쏟는 ‘쓸데없는 짓’으로 무섭게 옮겨간다.


그리고 곧 새벽의 특별한 분위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스무 살의 덜 익은 감성이 어우러지며 오글거리는 자작시를 써내려 가는 것에 몰두하게 된다.


시의 주제는 뜻밖에도 굉장히 천편일률적이고 진부했다.

용기를 잃지 않는 나, 절망 속에서 슬퍼하는 나, 희망적인 내일을 향해 도전하는 나..


대충 이 따위의 낯간지러운 내용으로 나는 그 새벽 난데없는 자신을 위한 희망곡들을 수없이 집필해 가고 있었다.



비상(飛上) - 난다는 것은 ; 절망하는 내 영혼을 위해(1999년)


난다는 것은 얼마나 나를 들뜨게 하는가

새로운 세계로의 상쾌한 날갯짓

서늘한 수증기의 느낌


난다는 것은 얼마나 나를 두렵게 하는가

껍질을 깨고 나아가야한다는 망설임

어둠 속에서 떨고 있는 나의 손


나는 얼마나 방황했던가, 얼마나 안이했던가

나는 내 인생에 있어서 지극히 게으른 구경꾼이었다.

절벽 끝에서 울고 있을 나약한 나의 영혼

슬픈 상실감


나는 도태되어 가고 있다.

나도 모르게 플라나리아처럼 깊숙하고 어두운 곳으로 빨려들어 가고 있다.

내 영혼은 언제부턴지 내 눈물에 의해 서서히 풍화되고 있었다.


나는 매일 바쁘게 움직이는 저들의 날갯짓으로부터

도태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난다는 것은 여전히 나를 날게끔 한다.


미래의, 광활한 창공. 그 안의 미소.

난다는 것은……. 여전히 내겐 희망이었다.



부끄러워서 감추고 싶은 당시의 자작시는 감성을 있는 대로 때려 넣어 느글거리는 형편없는 졸작이다. 그렇지만 아마 그때의 나는 이런 감성을 끄적거리며 아무도 응원하지 않는 것 같은, 혼자서 고독하게 걸어가고 있는 것 같은 나의 불안한 스무 살을 스스로 응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수능이라는 세상에 갇혀 인생에서 첫 좌절과 고독, 젊음과 무기력, 불안과 희망 사이를 분주히 오가고 있었고, 이 모든 감정과잉의 상태를 담아 펜을 들었다.


까만 밤하늘, 새벽까지 빛나는 별, 말이 없는 전봇대, 옆집 백구가 짖는 소리까지 모두가 나의 벗이었고, 나의 시가 되었다.

나의 예술혼은 시들 줄 몰랐고, 나는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수십 편의 자작시를 출산하듯 내 속에서 품어 세상으로 내어놓으며 그 해 가을을 보내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렇게 매일 밤 나의 작품활동이 계속되면서 안타깝게도 나는 현실세계의 희망과는 영영 멀어지게 된다.


그해 수능 시험날은 내 생일이었다.

생일에는 반드시 미역국을 먹어야 한다는 게 엄마의 인생철칙이었지만, 이날 아침에 엄마는 미역국을 끓이지 않았다. 누구보다 간절히 나의 입시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어서일 것이다.


그런 마음에 찬물을 끼얹듯, 나의 두 번째 수능은 폭망 했다.

그러나 나는 금세 툴툴 털고 시험장을 나오면서 나의 미래를 발 빠르게 다시 설계한다.


‘고졸출신의 고위급 공무원이 되리라.’


늘 명예욕을 좇았던 나는 그 와중에도 ‘고위급’ 공무원을 목표로 한다.

평범한 사람이지만 화려하고 과시하고 싶어 하는 삶을 꿈꾸던 그 시절의 나는 항상 그 간극을 근면과 성실보다는 요행과 행운으로 메꾸려는 철딱서니였다.


다음 날 나는 부모님께 대학에 진학하지 않겠노라고 선언했고, 그런 나를 엄마는 방바닥을 쳐가며 어르고 달래도 보았지만 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학을 가지 않아도 반드시 성공할 테니 지켜보라며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이제 나는 경찰이 돼야 했다.

인근 경찰서에 직접 방문해서 ‘경찰간부후보생 지원서’를 받아왔다.

예나 지금이나 지르고 보는 성격인 나는, 시험에 대해 조사하고 시험과목과 학습방법을 가늠해 보기도 전에 지원서부터 받아보고 경찰간부가 되어 있을 나를 상상하며 들떠 있었다.


그러나, 세상이 어디 호락호락하던가.

시골에 웅크리고 앉아서 시험정보 따위를 제대로 수집할 리 없었고, 게다가 끈기 있게 엉덩이를 딱 붙이고 공부할 리도 없던 나는 이내 고졸신화를 포기하고 삼수를 결정한다.



제3막 1장  -  <버스 안에서 울어보지 않은 자와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


거의 항상 엄마의 자랑거리였던 나는 삼수를 거치면서 엄마의 가장 큰 근심거리로 위상이 급변하였다.


나 역시 해를 바꿔 스물한 살이 되니, 이대로 가다가는 이도저도 아닌 채 내 인생이 끝나버릴 것 같은 현실적인 두려움이 커지고 있었다.

그즈음 나는 종종 어디 조그만 사무실 경리로 취직해 인생이 걸쭉하게 배어있는 남자직원들의 짓궂은 농담을 참아가며 커피를 타거나, ‘황양’을 찾는 사람들의 잔심부름을 하고 있는 나를 상상하곤 했는데.. 이런 상상은 나를 몹시 공포스럽게 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나는 식은땀이 나면서 이렇게 내 이생을 끝낼 순 없다고 머리를 세차게 도리질해 가며 부인했다. 그렇게 강하게 부인해야 나쁜 생각이 나에게 떨어져 나갈 것 같았고, 진짜로 내 인생에서 실현되는 일 따위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가위를 들고 욕실로 갔다. 그리고는 팔뚝 부분까지 자란 내 머리카락을 싹둑싹둑 자르기 시작했다. 망설임도 없는 결연한 마음으로 나는 내 머리카락을 귀밑까지 바싹 잘라버렸다.


‘다시는 실패하지 않으리라.’


누가 보면 나쁜 짓을 해서 아버지에게 머리를 잘린 여자처럼 나는 웃음을 참기 어려운 엉망이 된 머리꼴로 거울 속 나를 지그시 응시한다.

전혀 우스꽝스럽거나, 흉측하지 않다. 이제 나는 올림픽에 출전하는 국가대표 선수처럼 그렇게 목표를 향해 나 자신을 불사르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잘려나간 머리칼로 엉망이 된 욕실 바닥에 서서 또 한 편의 드라마를 찍고 있었다.


작년의 경험을 통해 집에서의 공부는 방해요인이 너무 많다는 결론을 내리고, 나는 제법 시설이 잘 갖춰져 있는 동네 독서실을 다니기로 한다.

아침을 먹고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 독서실에 도착하면 미리 짜놓은 시간표에 따라 언어, 수리, 사회탐구 그리고 외국어 순으로 공부를 했다.

사람이 거의 없는 그 조용한 독서실에 홀로 앉아 차분히 공부에 집중하고 있자니, 그동안 내가 알고 있거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들을 하나하나 되짚어가며 확실하게 머릿속에서 정리를 하고 바로잡아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렇게 나는 3월부터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해 5월이 될 때까지 큰 문제없이 고교과정 전체를 복습했다. 이제부터는 나의 취약점을 확실하게 보강해야 했다.

나는 수포자는 아니었지만, 수학점수가 다른 과목에 비해 형편없이 낮았고, 이점이 항상 수능에서 불리하게 작용했다. 반드시 수학을 해결해야 했다.


나는 고등학교 내내 베개로 사용하던 ‘수학의 정석’을 집어 들었다.

호기롭게 시작한 나의 수학공부는 제1단원 집합에서는 밑줄과 깨알 같은 메모로 자신감을 드러냈으나, 곧이어 방정식과 함수를 만나자 새책처럼 깨끗하다.


‘다시 처음부터 밟아가자’라는 생각으로 나는 끈기를 가지고 롤플레잉 게임을 하듯, 정석의 매 단원 미션을 완수하고 다음 퀘스트에 도전한다. 당연스럽게도 나의 지식과 응용력 수치가 올라간다. 순조로운 게임진행이었다.


그러나 수험생에게 가장 잔인한 5월이 이미 한창이었다.

인내심을 갖고 책상에 앉아있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책장을 설렁설렁 넘기며 앞으로 갔다가 뒤로 되돌아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세상이 궁금했다. 놀고 싶어 온몸이 근질거렸다.

나도 친구들처럼 한껏 꾸미고 공연을 보러 가고 싶었고, 낯선 곳으로 MT를 가서 뜻밖의 로맨스를 만들어 보고도 싶었다.

엉덩이가 들썩이고, 마음이 들썩이고.. 그 봄 나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대학 중간고사가 끝나고, 축제가 시들해질 즈음 한동안 연락이 뜸했던 친구들에게 연락이 왔다. 안 그래도 쏘다닐 핑계가 필요했던 내게 친구들의 연락은 매우 시의적절했고, 좀 과장하면 이 감옥 같은 생활에서 구원의 손길이었다.


쥐 파먹은 듯 마구 잘려나간 머리는 제법 길어져 대충 묶을 수 있었다. 질끈 묶은 머리에 볼캡을 눌러쓰고 셔츠와 청바지를 대충 걸치고 신이 나서 한달음에 달려 나갔다.


저 멀리 친구들이 보였을 때, 나는 그제야 뭔가 잘못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긴 머리를 찰랑거리며 유행하던 볼레로와 원피스를 입고 작은 백을 손에 하나씩 쥐고 있는 그녀들과 후줄근한 백팩을 메고 나간 나는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친구들도 나도 잠시 당황했지만 서로에게 티를 내진 않는다. 우린 변함없는 친구니까.

카페에 들어서자 친구들은 익숙하게 블루마운틴이나 닥터페퍼 따위를 시키고, 나도 눈치껏 그녀들의 주문을 따라 한다.


모처럼만에 또래들과의 대화는 즐겁게 이어진다. 새로운 친구 이야기, 연애 이야기, 학과 공부이야기, 최근 본 영화 이야기 등등.

그녀들이 말할 때마다 귓불의 귀걸이가 달랑거리며 반짝인다. 나는 그 모습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내 룸메가 과톱 이래’, ‘이번 페이퍼는 망했어.’, ‘알바페이가 진짜 별로어서 큇했어’ 따위의 단어들.. 대학생들만 쓸 것 같은 그 단어들을 그녀들은 쉼 없이 쏟아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며 멋있는 지성인이 되어가고, 틈틈이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사회경험도 쌓고, 다양한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즐거운 일이 넘치는 풍요로운 그녀들의 삶을 듣고 있자니.. 나는 자꾸 움츠러든다. 나만 한참 뒤처져버린 것 같다.


친구들과 헤어져 집으로 가는 버스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버스가 달릴 때마다 열린 버스창으로 봄기운 가득한 기분 좋은 바람이 들어와 내 뺨을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갔다.


부드러운 바람 때문이었을까. 나는 별안간 서글픈 마음이 들어 머리에 쓰고 있던 볼캡을 깊이 눌러 챙으로 얼굴을 가려본다. 햇빛도 바람도 닿지 않게.


부릉부릉 달리는 시끄러운 버스에서는 라디오 소리가 지지직하며 흘러나온다.


“다음 곡은 이범학의 ‘이별 아닌 이별’입니다.”라는 DJ멘트와 함께 익숙한 멜로디가 버스 안으로 퍼져나간다. 가사 한마디 한마디가 내 얘기 같다. 비수처럼 내 가슴에 박혀 아릿하게 아프다.


내 유년과의 이별, 순수한 우정과의 이별, 막연한 희망과도 이별..


이런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울컥하고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내가 손을 쓸 새도 없이 눈물은 뺨을 타고 흘러내려 턱끝에서 손등으로 툭툭 떨어진다.

눈물이 손등에 떨어지나 나는 꾹꾹 참아왔던 눈물을 더는 참지 못하고 볼캡의 챙으로 얼굴을 가리고 한참을 소리 죽여 울었다.


그렇게 나의 봄은 지나가고 있었다.



제3막 2장  -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


친구들과의 만남은 내게 자극제가 되었다.

나는 흐트러진 마음을 다시 붙잡고, 나의 최대 약점인 수학에 좀 더 집중했다.


수학의 기본개념서인 정석은 기초실력을 다지는 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드라마틱한 결과로 이어지진 않았다. 아무래도 실력향상을 위해서는 다른 보강책이 필요했다.


나는 당시로는 처음 도입된 방식의 다소 어려운 수준의 수학전문 학습지를 시작했다.

답안지 없는 수학문제가 오면 5일 이내로 문제를 풀고 전화 ARS를 통해 답을 입력한다. 그러면 그 답을 채점한 결과와 문항별 해설이 사나흘만에 우편으로 왔다.

듣고 보면 어려울 것 없다 생각하겠지만, 답안지가 없는 문제를 푼다는 것은 뭔가 비빌 언덕이 없는 얄짤없는 세상 같았고, 당시 내 수준보다 높은 단계의 문제는 어느 하나 쉽게 풀리 않으며 무척이나 애를 먹였다.


아무리 풀려고 해도 풀리지 않는 수학문제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가며 끙끙 싸매다가, 지독히 풀리지 않는 문제에 맞닥뜨리면 문제집을 통째로 바닥에 내동댕이 치고 주저앉아 펑펑 운 적도 있었다.


그렇게 답답하고 힘겨운 수학과의 씨름이 두어 달을 넘어서자 두둥하고 한순간 눈이 밝아지는 때가 마침내 찾아왔다.

문제를 보면 접근해야 하는 개념과 공식을 가늠할 수 있었고, 그러자 출제의도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단계를 지나자 어떤 응용문제가 와도 쩔쩔매지 않고 차분하게 풀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기적적으로 수학이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명쾌하게 답이 떨어지는 학문이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들며 한고비 한고비 어려운 수학문제를 풀어낼 때마다 내 뇌에서 도파민이 터져 나왔다.


서로 모르는 미지의 두 개체를 숫자들과의 관계성으로 풀어가 정체를 밝히는 방정식.

중력이 작용하는 세상에서 물체의 운동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는 함수.

세어보고 꼽아보기 어려운 개념의 숫자들을 약속된 룰로 실제화하는 공식들은 과연 어떻게 밝혀졌고, 어떻게 우리에게 약속될 수 있었을까


왜 이제야 나는 수학책을 제대로 보게 됐냐며 뒤늦은 후회를 했다.

배우고 익히니 이치가 깨달아지는 학문의 매력에 빠져 나는 더디지만 즐거운 걸음마로 쉴 새 없이 앞으로 딛고 나아갔다.


마침내 그해 나는 고등학교 3년 내내 수능점수를 갉아먹던 수학이랑 극적인 화해를 하게 되었고,  세 번째 치른 수능에서 꽤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20세기의 끝자락인 1999년 겨울을 끝으로 총 3막 6장의 나의 입시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고, 나는 엄마가 그토록 바라던 대학생이 되었다.


매년 11월. 해마다 반복되는 수능의 아침풍경을 보면 나는 자연스레 한파가 닥치던 초겨울 어슴푸레한 이른 아침 입김을 뿜어가며 시험장으로 향하던 19살의 나, 20살의 나, 21살의 나를 떠올린다.


그때 나는 내 인생에서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을까

그때 나는 왜 그리도 무모하고 겁이 없었을까

그러면서도 나는 왜 입시에 내 인생의 성패가 달려있다고 쉽게 믿었을까


나의 그때,

시도는 늘 시시했고, 결과는 볼품없었던 한심한 순간의 파노라마.

목표도 없이 달리기만 했던 12년의 대장정. 그래서 잠시 멈춰버린 듯한 그때를 나는 수렁에 빠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때는 나를 위한 작은 쉼표였다.

내 삶을 사랑하고, 그래서 내 삶을 책임지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던 소중한 쉼표.


이제 이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는다.

어쨌든 그 지긋지긋한 대한민국 입시지옥을 헤쳐 나온 오늘의 그대여, 장하다!


당신에게도 역시 존재했을 시시하고, 어리석고, 한심한.. 그러나 몹시 아름다운 순수의 시절.. 그 모든 순간을 오롯이 담고 있는 당신의 오늘에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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