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라는 질문이 더 이상 아프지 않을 때

지나간 나만의 행복했던 청춘 이야기

by 고펭

​초봄의 어느 날, 무료함이 밀려오던 평온한 주말 오후였다.

화면 팝업창에 영화 한 편이 스치듯 지나갔다.

중국 영화를 원작으로 했다는 '만약에 우리'.


평소라면 별 관심 없이 넘겼을 텐데, 그날따라 자연스럽게 시청 버튼을 누르고 순식간에 엔딩 크레딧이 흐르고 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그 영화 한 편은 주말 오후 내내 가슴 한편을 묵직하고 먹먹하게 만들었다.

그 짙은 여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드라마 '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 정주행으로까지 이어졌다.


화면 속 인물들의 엇갈림을 핑계 삼아,

나는 주말 내내 10년 전의 나에게로 긴 여행을 떠났다.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순수한 행복이자 꽉 찬 그리움이었다.


​영화를 보며 가장 시선이 멈췄던 곳은 두 주인공이 주고받는 대화 장면이었다.

오래된 연인들이 흔히 나눠볼 수 있는, 부질없지만 한 번쯤은 꼭 묻게 되는 그 질문.

"만약에 우리가 그때 헤어지지 않았다면..?"


​영화 속 남자는 미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묻는다.

"만약에 끝까지 기다려줬으면 어땠을까?"

여자는 담담하게 답한다.

"그럼 넌 끝까지 못했을 거야."


남자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묻는다.

"이것저것 안 따지고 그냥 결혼했으면?"

여자는 단호하다.

"결국 이혼했을 거야. 그만하자."


하지만 남자는 끈질기게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딱 하나만. 만약에 헤어지던 그날, 내가 널 붙잡았으면..."

단호했던 여자의 눈빛이 일순간 무너져 내리며 흐느낀다.

"그랬으면... 너랑 계속 함께했을 거야. 영원히."

​주저앉아 "내가 널 놓쳤구나" 자책하는 남자 곁에서, 여자는 이내 울음 섞인 웃음을 터뜨리며 말한다.

"아니야, 우리는 결국 헤어졌을 거야. 왜냐하면 넌 선풍기 바람 너만 쐤잖아, 치사하게. 내가 너를 놓은 게 아니라, 우린 서로를 놓은 거야. 난 후회 안 해."

함께 울고 웃으며 서로의 상처를 털어내는 영화 속 두 주인공을 바라보며,

기억 속에도 오랜 시간 안부를 모른 채 지내온 과거의 한 사람이 잔잔하게 겹쳐 올랐다.

당시에는 결혼을 생각할 만큼 치열하게 사랑했던 사람.


헤어지고 2~3년쯤 지났을 무렵,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불쑥 내 꿈에 찾아온 적이 있었다.

잠에서 깨어난 나는 그저 '곧 결혼하나 보네, 이렇게라도 알려줘서 고마워'라고 덤덤히 짐작하고 넘어갔고,

다시 나의 치열하고 바쁜 사회생활 속으로 숨 가쁘게 걸어 들어갔었다.

​영화 속 남녀의 핑퐁 같은 대화를 지켜보며,

나 역시 그 시절의 우리를 주인공 삼아 마음속으로 조용히 가상의 대화를 그려보았다.

"헤어지던 날, 네가 '마지막이니 집에 데려다줘'라고 했을 때 내가 데려다줬으면...

우린 헤어지지 않았을까?"

그녀는 담담히 고개를 저을 것 같다.

"아니, 그래도 헤어졌을 거야."


​"원래 네가 결혼을 생각했던 시기인 20대 후반에 결혼했으면 어땠을까?"

그녀의 대답은 분명 단호할 것이다.

"그럼 내가 네 앞길을 막는 사람이 되었을 테고, 결국 우리는 서로를 탓하며 이혼했을 거야."


​내가 가장 묻고 싶었던, 가슴 밑바닥에 숨겨둔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만약에... 내가 나의 실패를 이유로 도망치듯 헤어지자는 말을 하지 않고,

될 때까지 해보겠다고 내 옆에 있어 달라고 했었으면?"

그 순간만큼은 그녀도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이내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하지 않을까.

"그랬다면... 난 널 끝까지 응원했을 거야. 절대로 네 손을 놓지 않았을 거야."


​상상 속 대화를 글로 적어 내려가는 이 짧은 순간,

아주 잠시나마 그때의 감정이 끝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 먹먹함의 정체가 미련이나 후회는 아님을 나는 명확히 안다.


지금의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은 방향대로 스스로의 건강과 행복을 온전히 채워가고 있다.

굳이 그녀의 안부를 캐묻거나 찾아보고 싶지도 않다.

너무 이기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녀 역시 본인의 방식대로 잘 살고 있을거라 믿고 있고

앞으로도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응원할 뿐이다.

과거를 뼈아프게 그리워하지 않고, 한 편의 영화처럼 부드럽게 추억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만약에"라는 가슴 시린 질문 하나쯤을 온전한 내 것으로 품고 있다는 것.


어쩌면 이런 감정들을 잔잔하게 마주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나의 20대라는 맹렬했던 청춘을 건강하게 잘 보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실패의 무게에 짓눌려 손을 놓아야 했던 서툰 과거의 나에게 조용히 안부를 전한다.

덕분에 지금의 단단한 나 자신을 붙잡을 수 있었다고.


ps. 영화에 몰입하다 남자배우가 영상통화를 하는 장면은 순간 '뭐지;;' 했었네요 :) (스포주의)

ps. 과거 회상 장면, 대화 속 저는 매우 이기적이었습니다. 실패를 핑계로 도망쳤어요. 그런데 글의 마지막에 남긴 내용처럼 저는 이런 경험이 있다는 부분, 감정을 알고 회상할 수 있다는 부분이 스스로 20대를 잘 보낸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ps. 꿈 속에서 본 모습일 뿐, 결혼했는진 사실 모릅니다, 그냥 혼자 상상해봤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