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산다는 것은
대체로 성실함을 전제로 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고,
지하철이나 버스에 몸을 맡기고,
하루의 대부분을
어떤 역할 속에서 보낸다.
그리고 그 성실함이
미덕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오래도록 믿어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상한 피로가 쌓이기 시작한다.
열심히 살았는데도
왜 늘 불안한지,
왜 쉬고 있으면
괜히 죄책감이 드는지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남는다.
한국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여러 가지 조건 위에
올라서는 일처럼 느껴진다.
집은 사야 할 대상이 되었고,
그 집을 사기 전까지는
전세나 월세라는 이름으로
계속해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물과 전기, 가스는
당연히 필요한 것이지만
매달 고지서로 돌아온다.
아프면 병원에 가야 하고,
그마저도
보험이 없으면 망설이게 된다.
이 모든 것이
불합리하다고 소리치기엔
우리는 너무 익숙해져 있다.
“다들 이렇게 사니까.”
“한국은 원래 힘들잖아.”
이 말들은
현실 인식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질문을 회피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는
특히 ‘버텨내는 능력’을
높이 평가한다.
야근을 견디고,
경쟁을 통과하고,
비교를 이겨내는 사람을
어른으로 인정한다.
그래서 우리는
힘들다는 말을
쉽게 하지 않는다.
힘들다고 말하는 순간
어딘가에서
탈락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구조는
개인의 의지로만 설명하기 어렵다.
살아가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지 않으면
살아갈 자격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쉬는 날에도
다음 달 카드값을 계산하고,
잠들기 전에는
집값 뉴스나
물가 이야기를 훑어본다.
한국에서의 삶은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구독 서비스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멈추면
뒤처질 것 같고,
잠시 쉬면
다음 단계로 갈 수 없을 것 같은 불안.
그래서 우리는
쉬면서도 쉬지 못한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일하지 말자”가 아니다.
한국 사람만큼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도 드물다.
문제는
그 일이
우리 존재를 증명하는 조건이 되어버렸다는 데 있다.
성실하지 않으면
설명해야 하고,
뒤처지면
스스로를 탓하게 되는 구조.
그래서 많은 한국인들이
이상하게도
자기 자신에게 가장 가혹하다.
충분히 노력했음에도
“아직 부족하다”고 말하고,
잠깐 멈추면
“이래도 되나” 하고
스스로를 다그친다.
어쩌면
우리가 느끼는 이 피로는
개인의 나약함이 아니라
너무 오랫동안
우리 존재 자체를 증명하며 살아온 결과일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나는 쓸모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만
안심할 수 있었던 시간들.
이 생각은
당장 현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내일도 우리는
출근을 하고,
요금을 내고,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하지만 이 질문 하나만은
마음속에 남겨둘 수 있다.
나는 정말로
이만큼 애쓰지 않으면
존재해도 안 되는 사람일까.
이 질문을 품는 순간
우리는 조금 덜
자기 자신을 몰아붙이게 된다.
조금 덜
남과 비교하게 되고,
조금 더
숨을 고르게 된다.
성숙함이란
세상을 떠나는 용기가 아니라
세상 안에서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잃지 않는 태도다.
모든 구조를 부정하지 않되,
그 구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 것.
한국에서 살아간다는 건
여전히 쉽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이 피로가
전부 내 탓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우리를 조금 덜 외롭게 만든다.
그리고 그 여유가 생길 때
우리는 다시
사람답게 숨 쉬는 법을
조금씩 되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