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눈으로 읽는 세계
우리에게는 익숙지 않은 동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르완다에서 일어났던 르완다 대학살에 대해 얘기해보려 한다.
이 사건은 1994년 4월 7일부터 7월 15일까지 100일간 일어났는데, 이 기간 동안 80~100만 명이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참극 중 하나였다.
그리고 정부주도로 계획된 집단 학살로 군인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까지 동참해 가해자의 수 또한 엄청났던 제노사이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르완다에는 후투와 투치라는 계급적 구분이 존재했다고 한다.
투치는 주로 가축을 키우며 경제적 여유가 있었고, 후투는 대부분 농업에 종사했으나 인구 비중은 훨씬 많았다.
투치가 엘리트 계층이었고 왕족들도 대부분 투치였지만, 후투가 부를 축적하거나 소를 많이 소유하게 되면 투치가 되기도 하고 반대로 투치가 가난해지면 후투가 되기도 하는 경제적 조건에 따라 이동이 가능한 구분이었다.
하지만 벨기에의 식민 통치 이후 그 구분이 변질됐다.
벨기에는 원활한 식민 지배를 위해 투치에게만 권력을 몰아주고, 학교에 갈 수 있게 해주는 등의 특혜를 부여했고, 심지어 신분증에 후투, 투치를 기입해 계층 간 이동이 불가하게 했다.
신분증을 발급하기 위해 이들을 구분한 기준이 외모, 소유한 가축 수, 키, 코 길이 같은 것이었는데, 고작 이런 이유들로 구분 지어졌다는 게 황당할 따름이다.
이는 투치에 대한 후투의 증오를 키우는 데 기여했고 대학살의 씨앗이 되었다.
1950년대에 들어선 뒤 아프리카 전역에서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투치 또한 벨기에에 독립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벨기에는 갑자기 투치가 아닌 후투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게 된다.
결국 독립 이후 후투정권이 들어서게 되고, 이 과정에서 투치 엘리트들은 우간다, 브룬디로 도망쳐 훗날 RPF(르완다애국전선)를 결성해 르완다에 내전을 일으킨다.
1990년대에 투치로 구성된 RPF가 르완다 북부로 침입하며 내전이 시작됐고 내전을 종식시키고자 투치와 후투 간에 평화 협정 아루샤 조약이 체결됐는데, 이 평화 협정에 불만을 가진 후투 극단주의자들은 대학살을 체계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한다.
그 근거는 아래와 같다.
1) 살인 명단이 방송국, 경찰, 군대 등 각 지역에 배포됨
2) 학살 1년 전부터 라디오 방송을 통해 투치를 죽여야 한다는 선동 시작
3) 마체테(칼)와 몽둥이 등이 대량으로 수입됐고 마을 단위로 나눠줌
4) 후투 정권의 대통령이 탄 비행기 피격을 계기로 곧바로 학살이 시작됐는데, 이 반응 속도는 준비된 거였다는 걸 방증
5) 유엔 사령관이 학살이 계획되고 있다는 보고를 올림
대학살의 원인에는 르완다 내부의 정치, 경제적인 이유들도 포함돼 있다.
평화협정에는 르완다의 정치 체계를 권력 공유형으로 개편하여, 정부와 반군(RPF) 모두가 참여하는 임시 정부를 구성하기로 합의한 내용이 담겨 있었고 이는 후투 강경파의 반발을 사게 된다.
르완다는 국제적으로 원조를 받고 있었는데 이 원조를 후투 엘리트들이 독점하고 있었고, 평화협정으로 투치가 정치에 참여하게 되면 투치와 원조를 나눠야 할 수도 있다는 점 또한 하나의 원인이다.
또한 주요 수출품이던 커피 산업이 커피 가격 폭락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실업자가 늘어나자, 후투 정권은 비교적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던 투치를 경제적 희생양으로 삼아 투치가 없으면 우리의 자원이 늘어난다는 식으로 선동했고 실제로 투치족의 집, 농지, 재산이 학살 기간 동안 약탈당했다.
르완다 대학살은 단순히 식민지 시절부터 쌓여온 갈등과 일련의 사건들이 중첩되며 르완다 내부에서 폭발해 일어난 일이라기보다는, 이것들을 재료 삼아 선동하고 철저하게 계획한 후투의 엘리트들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사건이다.
사실 이런 큰 사건은 아무리 물밑에서 작업한다 한들 아무도 모르게 진행될 수는 없다.
분명 사건이 일어날 징후는 여기저기서 발견되어 유엔에서도 알고 있었고 심지어 유엔 평화유지군이 르완다에 주둔 중이었지만 제대로 개입하지는 않았다.
유럽 내에서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발생하면서 상대적으로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르완다 대학살은 묻히기도 했고, 강대국들이 개입을 원하지 않았는데 대표적인 나라가 미국과 프랑스다.
미국은 1993년 소말리아 내전에 개입했었는데 작전에 실패한 경험이 있다.
거기다 추락한 헬기의 조종사 사체가 끌려다니는 장면이 CNN을 통해 보도되면서 아프리카 개입에 대해 미국 내 여론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르완다 문제에 소극적 태도를 보인다.
프랑스는 아프리카 내에서 프랑스어권 국가를 보호하고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외교 전략을 펼쳤는데, 르완다 또한 프랑스어권 국가였기 때문에 프랑스는 후투정권을 지지하고 있었다.
투치로 이루어진 RPF는 영어권 우간다에서 조직됐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프랑스는 유엔의 승인을 받아 학살 도중 개입 작전을 실시했지만, RPF에게 쫓기는 후투 가해자들이 도피하는 것을 도와 비판을 받기도 했다.
실제로 마크롱 대통령이 르완다가 주장하는 공모는 아니라고 선을 그었지만, 정치적으로 판단 오류를 범했다고 인정하며 공식적으로 사과한 일이 있다.
이러한 연유들로 미국과 프랑스는 그 당시 공식 문서에서 제노사이드란 단어가 사용되지 않도록 로비했다.
제노사이드로 규정되면 국제법상 개입 의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르완다 대학살 당시, '제노사이드'라는 단어 하나가 국제사회 책임의 무게를 가르는 기준이었고, 강대국들은 그 무게를 피하기 위해 침묵을 선택했다.
결국 후투 정권의 대통령이 비행기 격추로 사망하게 되면서 대학살은 시작됐다.
이 사건의 배후로 투치족이 지목되면서 투치족 학살이 진행됐는데, 나중에 밝혀진 바론 후투족 극단주의자의 소행이었다.
이 사건이 정말 끔찍한 점은 평범한 사람들이 함께 지내던 이웃과 가족을 죽였다는 점이고, 후투라 해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으면 죽였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라도 후투족 사람들은 학살을 자행해야 했다.
그리고 라디오를 통해 투치의 위치를 알려주며 죽이라는 지령이 나오는 등 학살 중에도 선동은 계속됐다.
후투 선생은 투치 제자를 죽이고, 후투 의사는 투치 환자를 죽이는 등 민간인들끼리 죽고 죽이는 살육전이 벌어졌다.
그 때문에 피해자만 어마어마한 게 아니라 가해자 수 또한 어마어마해서 르완다 국민의 대다수가 피해자, 가해자 또는 목격자로 국가 자체가 엄청난 트라우마를 안게 된다.
실제로 가해자였던 후투 민간인들은 학살이 끝난 후 PTSD를 겪었고, 자살하거나 술에 의지해 살거나 마을을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대학살이 아프리카 변방의 작은 나라에서 일어났다고 해서 우리와 머나먼 이야기 같지만, 우리는 선진국인 독일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반유대정서는 독일에만 있던 게 아니었지만 선동이 더해지면서 독일에서는 홀로코스트가 일어났다.
그렇다는 건 증오와 경제적 불안을 재료 삼아 선동이 이뤄졌을 때 일어나는 폭력사태에서 우리 또한 자유롭지 않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한국도 이런 재료들을 가지고 있는 나라다.
식민지배 시절 일본에 의해 친일파가 생겨 국민분열이 일어났으며, 독립 이후 이념 문제로 내전이 일어난 경험도 있다.
하지만 한국과 르완다는 뭐가 달랐을까?
제일 큰 이유는 역시나 경제적인 문제이다.
사람들은 현실이 너무 힘들면 그 원인을 과거의 억압과 상처에서 찾으려 하기 때문에 과거에 머물게 된다.
한국은 유례없는 경제 성장으로 인해 과거의 상처들이 완전히 치유된 건 아니지만 덜 날카로운 문제로 바뀌었다.
삶이 나아지면 과거의 상처를 덜 들춰보게 되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다른 이유는 한국은 내전 이후 다른 나라들과 다르게 분단이 고착화되면서 상대를 마주할 기회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한국이 위험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은 건 아니다.
친일파, 이념의 문제는 과거가 됐지만 우리에게는 새로운 갈등이 비집고 들어와 자리 잡고 있다.
여러 분야에서 일어나는 갈라 치기는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고 이는 선동의 재료로 쓰일 수 있다.
우리는 르완다 대학살의 사례를 통해 선동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잊지 말아야 한다.
무엇이 옳은지 스스로 판단할 힘을 길러 선동을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결국 이 모든 문제의 근본에는 먹고사는 문제가 원인이 되어 깔려있다는 점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내전 종료 후 르완다는 정치적 보복을 하기보단 후투와 투치를 나누는 것을 법적으로 금지해 통합을 강조하고, 경제 성장에 힘을 써왔다.
신분증에 적혀있던 투치, 후투의 구분이 사라졌고 실제로 현재 르완다의 젊은 세대들은 과거의 구분에 대한 인식이 희미해지고 있다고 한다.
폴 카가메 대통령은 철권통치로 논란이 있긴 하지만 농업, 산업, 서비스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적극적인 개혁 정책을 펼쳤고, 르완다는 꾸준히 높은 경제성장률을 유지 중이다.
그 덕에 현재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 중 하나로 르완다의 수도인 키갈리가 뽑힌다.
특히 아프리카의 싱가포르를 꿈꾸는 르완다에서는 비닐봉지 사용이 금지되어 있어 길거리가 매우 깨끗하다고 한다.
또한 과거의 비극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 중인 나라로 매년 4월에는 세계 곳곳에서 추모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추모 행사를 개최하기 때문에 4월이 되면 우리도 그들을 추모할 수 있다.
끔찍한 일을 겪었지만 과거를 잊지 않되 앞으로 나아가는 르완다.
그들이 걸어가는 길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