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처럼 쓰기] 내가 전해 들은 건데...
영화를 보기 시작할 때 종종 이런 안내문 같은 자막이 나오곤 합니다.
이 이야기는 실화입니다.
정말 실용적인 용도의 자막일 때도 있지만, 앞으로 보게 될 이야기가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는 정보가 관객들에게 기대감을 심어주는 효과를 갖기도 하지요.
아래는 영화 <파고>의 오프닝 자막입니다.
이렇게 확실한 고지를 해주기 위해서는 큰 책임감이 필요하다는 인상이 있습니다. 이야기에 신뢰가 가게 되고, 앞으로 보게 될 기상천외한 내용을 무척 기대하는 마음이 생기지요.
그런 관객들의 심리를 정확히 알고 있던 <파고>의 감독 코엔 형제들은 영화의 내용이 완전히 허구인데도 불구하고 위의 자막을 삽입하였답니다... 대담하고 창의적인 선택이지요!
<파고>의 주 내용이 되는 살인사건이 더욱 섬뜩하고 충격적으로 느껴지게 됩니다.
이렇게 영화에서 실화 기반 내용임을 고지하는 자막을 연출의 일부로 활용하면서 작품의 미스터리함이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장치로 쓰곤 합니다. 지어낸 이야기인 것을 알고 시청하려다가도 '이건 진짜입니다.' 라는 말을 듣는 순간 시청자의 태도가 변하게 될 테니까요.
자막을 통해서 시청자들에게 직접 고지하는 방식이 아니더라도, 허구의 이야기를 실제 이야기처럼 보여주는 기법도 종종 사용되고는 합니다. 바로 이야기를 전하는 서술자나 화자의 존재를 활용하는 것인데요.
영화의 시작부에 "이건 나의 이야기이다." 라거나 "내게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와 같은 나레이션을 넣어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이야기를 전하는 인물의 관점에서 서술을 하도록 하는 것이지요.
(스포 주의)
영화 <스탠 바이 미>의 주인공 고디는 작가입니다. 고디가 어린 시절 친구들과 떠났던 모험이 영화의 주 내용이 되는데요. 네 명의 소년들이 어딘가에 시체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나서는 이야기입니다. 나이 먹은 고디가 그 모험을 회상하면서 쓴 글에 마침표를 찍으며 영화가 끝이 납니다.
가장 친했던 친구와의 죽음, 나머지 친구들과는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레 멀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그리워하는 마음, 12살 이후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그들만 한 친구를 사귀어본 적은 없다는 씁쓸하면서도 따듯한 이야기.
고디가 쓴 글의 일부가 나레이션으로 나오면서, 관객들은 영화의 장면으로는 나오지 않은 옛 친구들의 현재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현실적인 후일담 때문에 <스탠 바이 미>는 단순 모험 이야기에서 더욱 있을 법한 이야기로, 누구나 자기 경험을 빗댈 수 있는 현실적인 경험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죠.
현재에 과거의 일을 들려주는 구성은 어린시절을 되돌아보는 어른의 감상을 표현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영화의 내용 전체를 주인공이 들려주는 이야기로 만들어주는 장치였습니다.
작은 디테일이지만, 관객이 서술자나 화자를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방법입니다. 현실에서는 허구이지만, 주인공이 사는 세상에서는 분명 실제로 일어났던 이야기처럼 느껴지게 되는 것이지요.
소설에서는 이러한 '화자가 들려주는 이야기' 기법을 훨씬 적극적으로, 실제와 같아 보이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소설에서는 이러한 '화자가 들려주는 이야기' 기법을 훨씬 적극적으로, 실제와 같아 보이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독자들에게 이건 소설이 아니다...! 라고 대놓고 말해주는 방법입니다.
작가가 마치 화자에게 빙의를 한 듯 완전히 그의 입장에서 글을 쓰고, 이야기의 시작이든 중간이든 마지막이든 해당 글이 허구인 소설이 아니라 주인공인 화자가 어떤 필요에 의해서든 직접 쓴 글이라고 명시해 주는 기법입니다.
1인칭 주인공 시점 소설이라면 이미 주인공이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구성이 되어 있을 텐데, 거기에 작은 디테일만 더 넣어주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챕터가 바뀔 때마다 날짜를 삽입하여 매일 쓴 일기처럼 보이게 한다거나. '이 글은 해당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다'라는 말을 덧붙여 글의 목적을 드러내 주는 것이지요.
은근히 소설에서 자주 사용되는 기법이기에 쉽게 예시를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스탠 바이 미>는 스티븐 킹 소설 원작인데요. 저는 원작 소설을 읽어보지 못했지만, 아마도 소설의 내용은 고디가 실제로 쓴 글처럼 구성되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스티븐 킹의 또 다른 유명한 작품 <캐리> 역시 독특한 구성으로 유명한데요. 소설을 제3자의 기록물로 위장시킨 예시로 참고하기 좋을 것 같습니다.
<캐리>는 종교에 심취한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소녀 캐리가 초능력자로 각성하고, 자신을 괴롭히던 아이들과 어머니 모두에게 복수를 행하는 이야기입니다.
<캐리>는 화자를 바꿔 가며 이야기를 끌어갑니다. 주요 인물들 각각의 입장을 교차해서 시간 순서와 관계없이 모든 인물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는데, 그중에는 캐리가 일으키는 사건사고들을 다룬 저술이나 기사, 모르는 사람들 간의 이메일 내용 등이 섞여 있지요.
메인 주 웨스트오버의 주간지 <엔터프라이즈> 1966년 8월 19일자에 실린 기사:
<캐리>의 첫 문장
[~~저서 ~~페이지에서 인용:] 등의 문구를 문단의 앞마다 붙여 주면서 화자를 직관적으로 바꿔 주고, 글의 톤과 내용 역시 객관적 기록물처럼 구성하였죠.
이 외에도 줄글의 형식이 아닌 병원 진단서나 누군가의 증언 기록을 대본 형식으로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때 기록물에 적혀 있는 날짜를 <캐리>의 출판년도인 1974년보다 몇 년 뒤로 설정하기도 했습니다.
이야기에 극도의 현실성을 불어넣는 아주 창의적인 방법이네요. 읽다 보면 미래에 실제로 일어날 지 모를 일처럼 불운한 기분이 절로 느껴진답니다.
유사하게 화자가 직접 쓴 글로 위장한 소설들이지만, 화자가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바로...
화자가 어디선가 접한 이야기를 널리 알리거나 전달하듯 서술하는 방식입니다.
<인간 실격>과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 모두 아주 독특한 사람의 기상천외한 이야기를 접하게 된 화자가 이야기의 포문을 엽니다. '내가 이런 얘기를 들었는데... 아주 범상치 않으니 기록으로 남기겠다.' 하는 식이지요.
<인간 실격>의 경우에는 소설의 오프닝과 에필로그에서 화자가 등장하여 주인공의 삶을 독자에게 소개하고 마무리짓습니다. 본격적인 이야기의 시작과 중반부는 모두 주인공이 직접 쓴 자서전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지요.
글을 남기기로 하는 화자에 대한 내용은 주인공의 이야기에 비해 중요하지 않은 내용입니다. 하지만 확실히 독자의 기대감을 고조시키고 이야기에 신뢰감을 더해주고는 합니다.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의 경우에는 웨스 앤더슨 감독의 단편영화로 (넷플릭스에서 감상 가능!) 감상했었는데요. 소설의 나레이션을 그대로 배우가 말하는 독특한 연출방식이 사용되었지요.
위의 두 작품 모두 독특한 캐릭터와 그들의 특성이 이야기를 끌고 가는데요. 뚜렷한 기승전결이나 극적 구성이 눈에 띄지는 않습니다. 전개는 현실적이고, 결말도 애매모호하지요.
그러나 '누군가가 실제로 들은 이야기' 이기 때문에 꼭 전개 자체가 극적이지 않아도 충분히 강렬하게 느껴집니다. 오히려 이야기가 너무나 완벽히 끝맺어졌을 때 '실제로 들은 이야기다!' 라는 말이 가짜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네요.
이야기에 오묘한 현실성을 더해주고 싶을 때 사용하기 좋은 기법 같습니다.
화자의 존재를 활용해 이야기를 실화처럼 구성하는 방법을 간단히 알아보았습니다.
이런 기법들은 이야기를 현실의 세상과 연결해 주는 부가적인 장치입니다. 이야기에서 아주 중요하게 작용하는 요소는 아니죠. 하지만 이런 디테일로 이야기 구성에 깊이를 더하고, 관객이나 독자에게 더 큰 의미를 줄 수 있다면 적극적으로 활용해 볼 만 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다음 글에서 화자와 나레이션을 활용한 또다른 기법을 가져와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