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1월 27일부터 2월 22일까지 펼쳐지는 뮤지컬 <몽유도원>은 최인호의 소설 <몽유도원도>와 삼국사기 속 <도미전> 설화를 한데 녹여 탄생한 작품으로, 한국적 서사와 미학을 바탕으로 세계 무대와 소통하는 글로벌 콘텐츠다. 이는 뮤지컬 <몽유도원>에서 다루는 주제인 '도미 부부의 사랑 이야기'가 국적과 시대를 초월하여 사람들로부터 보편적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지만, 동시에 또 하나의 핵심적 키워드인 권력을 중심으로 작품의 서사를 동시대적 비극의 현장과 동일선상에 위치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도 이어진다.
<몽유도원>은 수묵화를 활용한 유려한 미디어 아트와 더불어 배우들의 빈틈없는 연기와 노래를 배경으로, '사랑'과 '권력'이라는 두 가지 메지를 전달하기 위해 여경, 도미, 아랑 총 세 명의 인물을 그려낸다. 이때 무대 위에서 권력은 사랑에 비해 비교적 경시되기 쉽다. 작품 속에서 권력은 사랑을 방해하거나 강제로 앗아가는 일종의 시련이고 사랑은 그것을 극복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으나 사실상 당대 권력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이들의 사랑이 보여주는 전개 방식은 잘 와닿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독일의 법철학자 칼 슈미트는 정치권력의 구조를 자신의 독특한 시각으로 분석하며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이다"라는 유명한 통찰을 제시했다. 이때 예외상태란 우리가 정상적이라고 인지하고 있는 기존의 법이 온전하게 작동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드러나는 것으로, 그는 정상적인 것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지만 예외는 모든 것을 증명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의 사회, 정치, 경제적 문제를 망라하는 체제 자체를 향한 인식을 뒤바꾸고 수권법과 지도자원리라는 나치의 전체주의 원리의 토대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작품을 바라보게 되면, 여경(개로왕)은 백제의 왕으로서 단순한 통치자 역할에 국한되지 않고 스스로 법의 경계를 정하고 허물며, 곧 예외상태를 만들어 내는 자이다. 극 중 여경이 꿈속의 여인 아랑을 차지하기 위해 도미와 목지국 사람들을 박해하고 법적, 도덕적 규범과 절차를 무시하는 행위는 단순한 광기로 치부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루는 범속한 치정극으로서의 요소를 강조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당대의 정치적 현실 속에서 여경이 아랑이라는 존재를 정치적 예외상태로 규정하는 주권적 결단으로 해석할 수 있는 영역이다.
즉, 백제라는 수직적이고 중앙집권적인 질서의 가치를 상징하는 여경과 목지국이라는 수평적이고 평등한 공동체적 질서의 가치를 상징하는 도미 사이에서 아랑이라는 존재는, 개인적 층위에서는 사랑과 욕망의 대상이지만 사회적, 국가적 층위에서는 하나의 예외상태로 변모함으로써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고 해체하는 새로운 이상향으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상향은 여경과 도미 두 인물에게 있어 각각 어떠한 형태로 변주되고 있을까.
우선 여경의 경우, 극 중 선왕이 신하들에 의해 살해당한 것처럼 묘사되는 것으로 보아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대한 불안을 극복해야 하는 입장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백제의 질서에 반하는 목지국을 복속시켜야 하는 입장이다. 실제로 개로왕의 선왕인 비유왕은 본인을 왕으로 옹립했으나 계속해서 왕권을 약화시키는 귀족 세력에 의해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여경은 이러한 두 가지 정치적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던 것이고, 아무리 귀족층이 국정 운영에 실질적으로 참여하는 형태라 하더라도 엄연히 왕권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귀족이 왕보다 목소리가 큰 상황을 변화시켜야 했다.
그처럼 정상적이라고 보기 힘든 사회는 주권자로 하여금 예외상태를 결정하게 만든다. 여경이 꿈속에서 만난 여인에게 그토록 광기 어린 집착을 보이고, 남편이 있는 유부녀를 강제로 취하고자 하는 것은 법(왕권)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예외상태 속에서 기존의 왕권과 질서를 초월하여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결단을 내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때 아랑은 여경에게 있어서 예외상태에 대한 예외상태, 즉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형성된 기존의 예외상태를 부정하기 위해 본인의 의지로 직접 결정한 새로운 예외상태로서, 정치적 현실에 대한 이상향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도미의 경우, 그러한 백제의 왕으로부터 자신을 따르는 목지국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정치 사회를 떠나 고립되어 살아가기를 선택한 인물이다. 그러나 도미 스스로도 그러한 생각이 불가능하며 심지어 양측 모두에게 불온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칼 슈미트는 친구와 적을 구분하는 것을 정치의 본질적 개념으로 보았다. 도미가 여경을 적으로 맞서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그와 친구가 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도미는 결국 자신의 이상향으로 도피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따라서 여경이 아랑을 취하기 위해 도미의 눈을 찌르고 목지국 사람들을 탄압하는 일의 비정상성을 논하기 전에, 도미가 목지국의 지도자로서 내린 정치적 결정의 비정상성을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이다.
<몽유도원>은 이러한 여경과 도미의 관계를 해와 달의 대비를 통해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여경은 해를 통해 달을 집어삼키려 하지만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고, 도미는 달을 통해 해의 질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지만 두 눈이 뽑히는 육체적 파멸을 맞으며 모든 빛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작품이 그러한 비극적 결말을 넘어 새로운 의미를 성취하게 되는 지점은 끝내 도미와 아랑의 재회가 이루어지는 장면이다.
왜냐하면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해와 달의 충돌은 동시대적 권력이 어떻게 보편적 가치를 예외상태로 치환시키는가를 넘어 관객으로 하여금 오늘날의 정치적 현실을 자성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도원이라는 것은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등장한 이래 오늘날까지 그 이름만을 달리 했을 뿐 언제 어디서나 존재해왔다. 칼 슈미트의 사상이 결과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가의 문제와는 무관하게 그가 제기한 질문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틀림없이 유효하다.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만의 이상향을 품고 살아가며 또한 주권자 역시 여전히 예외상태를 결정한다. 이때 궁극적으로 아랑이라는 이름의, 사랑이라는 이름의 도원이 도미에게 손을 내밀었다는 것은 이상을 개척하고 걸어나갈 힘이 인민에게 있음을 암시한다.
전제 정치 속 왕의 독단적인 결정도, 민주 공화정에서 대의라는 이름으로 내려지는 대통령의 결정도 인민을 위한 참된 의미의 정치적 결단이 될 수는 없으며, 주권이라는 개념조차 모호해지거나 허울만 남은 듯한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가 도미가 걸었던 길을 그대로 답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저마다의 예외상태가 어지럽게 중첩되고 있는 지금, 작품은 우리에게 가장 중차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아트인사이트 #문화는소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