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건국 영웅들(6)

2장: 경술국치와 국권 상실

by 이문웅

1) 1910년 한일 병합의 과정과 반응

한일 병합은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대한제국의 주권을 강탈한 사건으로, 이는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군사권을 빼앗은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정미 7 조약에 이어 일제의 식민지화 계획이 최종적으로 완성된 결과였다.

일제는 1904년 러일전쟁을 통해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한 후,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보호국화 했다. 이후, 1907년 정미 7 조약을 통해 군대를 해산시키고, 통감부의 권한을 확대하여 대한제국의 내정을 직접 통제하기 시작했다. 사실상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 여기서 이미 나라의 형태를 잃고 헤매던 대한제국의 고종과 관료들은 그리 많은 일을 할 수 있던 입장이 아니었다.

1910년 8월 22일, 일제는 이완용을 비롯한 일부 친일파 고관들을 매수하여 한일 병합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대한제국 황제의 승인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강제로 체결된 것이며, 조선의 자주적 권리를 무시한 불법적인 조약이었다. 같은 해 8월 29일, 조약의 공포와 함께 대한제국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한일 병합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 사회는 깊은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다. 민중들은 나라를 잃었다는 상실감 속에서, 곳곳에서 자발적인 저항 운동을 전개했다. 의병 항쟁, 학생과 지식인들의 항거가 일어났지만 이러한 반발은 그리 오래가지 못해 일본의 군사적 진압에 전부 사라져 갔다. 경술국치 직전의 시기에 있었던 가장 큰 저항 사건은 인중근의 이토오히로부미 저격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1909년 하얼빈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건국운동이 시발되기 직전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대단히 큰 생각을 가지고 단행한 평화운동적 측면이 많이 담겨 있다. 그 이유는 안중근 장군이 체포된 후 일본 검사와의 일문 일답을 하는 과정에서 안중근이 밝힌 정당성에 잘 나와 있다.

다음은 일본 검사와 나눈 일문 일답의 내용이다.

검사: 왜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는가?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을 침략하고 많은 죄를 저질렀다. 그는 을사늑약을 강요하여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고, 한국인의 자주권을 침해했다. 나는 한국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 그를 처단한 것이다.

검사: 이토 히로부미의 구체적인 죄목은 무엇인가?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는 다음과 같은 죄를 저질렀다.

첫째, 한국의 국권을 강탈하고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둘째, 고종 황제를 퇴위시키고 한국의 자주권을 침해한 죄.

셋째, 동양 평화를 파괴하고 러일전쟁을 유발한 죄.

넷째, 한국 민중의 생명과 재산을 빼앗고 많은 사람을 학살한 죄.

검사: 당신이 한 행동이 살인이며 죄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안중근: 나는 살인자가 아니다. 나는 조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 행동한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동양의 평화를 깨뜨리고 한국을 침략한 장본인이다. 나의 행동은 정의를 위한 것이며, 세계 평화를 위한 것이다.

검사: 당신이 의거를 결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안중근: 나는 한국인이며, 나라를 잃은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침략자에 맞서 싸워야 했다. 나의 행동은 단지 한국의 독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동양의 평화와 정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검사: 당신은 일본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하는가? 안중근: 내가 일본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나는 국제법상 대한국인으로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것이다. 나는 국제 재판을 받아야 한다.

검사: 왜 손가락을 잘라 '大韓獨立'이라고 썼는가? 안중근: 이는 나의 굳은 결의와 의지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나와 나의 동지들은 대한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

안중근 장군은 한국의 독립뿐만이 아니라 동양의 평화와 정의를 위한 것이었다고 정확하게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내에서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다이조(大政) 민주주의 세력의 주요 인물이었다. 그는 일본에 근대적 헌법을 도입하는데 기여했으며, 일본 내에서 입헌 제도를 정착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 개혁주의자였다. 이토는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근대적 국가로 인정받기를 원했기 때문에, 직접적인 식민지 지배보다는 간접적인 영향력 행사를 선호했다. 그런 이토 히로부미는 초기에는 한반도를 일본의 직접적인 식민지로 만드는 것보다는 보호국 형태로 두고, 점진적으로 일본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전략을 지지했다. 그는 한국의 전통적인 왕실 체제를 유지한 채, 일본의 지배하에 있는 자치국으로 두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이 한국을 완전한 식민지로 병합할 경우, 국제적인 비난과 일본 국내외의 불안정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런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에 대한 군사적 강경 정책을 지지했던 일본 군부와 의견을 달리했었다. 일본 군부는 한국을 직접 병합하여 식민지로 삼아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나, 이토는 외교와 정치적 수단을 통해 한국을 일본의 영향권 아래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그는 한반도를 직접 지배하는 대신, 간접 지배를 통해 일본의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비록 이토 히로부미가 초기에는 한반도의 직접적인 식민지화를 반대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입장이 변화하게 된다. 특히 1909년 한일 병합이 점점 현실화되자, 이토는 일본의 병합 계획을 수용하게 되었고, 일본 내에서 병합론이 힘을 얻어가는 상황에서 그 역시 병합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토는 1909년 통감직에서 사임한 후에도 한반도의 미래에 대해 고민했지만, 일본 정부의 병합 정책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한국 병합을 위한 준비 작업이 이루어지던 시점에서, 조선을 직접 식민지로 삼는 것이 불가피한 상황으로 받아들였다고 해석될 수 있다.

2) 국권 상실 이후 국내외 민족운동의 양상

경술국치 이후, 국내외에서 조선 민중과 지식인들은 다양한 형태의 독립운동을 전개하며 민족의 자주성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지속했다. 국내에서는 의병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특히, 홍범도김좌진 등의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일제의 군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조직력과 무기에서의 열세로 인해 대부분의 의병 운동은 191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점차 약화되었다. 이와 함께, 교육과 문화 계몽 운동도 전개되었다. 일제의 탄압 아래에서도 오산학교대성학교 등 민족학교가 설립되었으며, 박은식, 신채호 등 지식인들은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활동을 이어갔다. 이들은 독립의 필요성을 알리고, 민중의 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글과 연설을 통해 끊임없이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해외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은 만주, 연해주, 미국, 중국 등지에서 다양한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했다. 안창호는 미국에서 흥사단을 결성해 조선의 독립을 위한 국제적 지지와 자금 지원을 이끌어내는 활동을 했다. 김구와 이회영은 만주와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지속하며, 의열단신흥무관학교를 통해 무장 투쟁을 준비했다. 이와 같은 국내외의 독립운동은 점점 조직화되고 체계화되었으며, 1919년 3·1 운동과 같은 대규모 독립운동을 촉발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3) 대한제국의 마지막 저항과 그 실패

경술국치 직후, 대한제국의 국권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저항은 고종과 황실의 노력에서 엿볼 수 있다. 고종은 을사늑약 이후에도 독립을 되찾기 위해 여러 차례 외교적 노력을 시도했다. 1907년, 고종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밀사로 파견하여 국제 사회에 일본의 불법성을 알리고, 대한제국의 독립을 호소하려 했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와 열강들의 외면으로 인해 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고종은 결국 일본의 압력에 의해 퇴위당했다.

1910년대 초, 의병들은 전국적으로 저항을 지속했다. 특히 홍범도유인석 등의 의병장은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일제와의 유격전을 전개하며 저항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들은 일제의 강력한 무력 진압과 체계적인 토벌 작전에 의해 차례로 패퇴하거나 체포되었다. 의병 운동은 한일 병합 이후에도 산발적으로 계속되었으나, 대규모 조직적 저항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이회영, 이상설 등 독립운동가들은 만주와 연해주 등지에 독립운동 기지를 구축하려 했지만, 일제의 철저한 감시와 탄압, 그리고 국제 정세의 변화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만주의 독립운동 기지는 일제의 경제적 압박과 외교적 탄압으로 인해 충분한 자금과 인력을 확보하기 어려웠으며, 주변 열강의 이해관계로 인해 외부 지원을 받기도 쉽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독립운동의 초기 단계에서 많은 좌절을 겪게 했다.

경술국치는 대한제국의 국권 상실과 함께 민족적 비극을 초래한 사건이었지만, 동시에 독립운동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다. 국내외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된 민족운동은 조선의 자주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반영했다. 비록 초기의 많은 시도가 실패로 끝났지만, 이들의 끊임없는 저항과 노력이 결국 대한민국 건국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경술국치는 단지 패배의 역사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민족적 각성의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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