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돌아다녀보아도 우리나라만큼 존댓말이 많은 나라는 없다. 존대를 통해 나를 돌아본다.
나는 권위적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하지만 실제 내 진심은 그렇지 않았는대도 말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나의 상태는 왜 그런 인상을 주었을까라는 것이다. 나의 내면에는 일등에 관한 깊은 불안이 존재하면서 불완전한 나에게 가면을 씌우며 살아온 것이다. 그래서 실수를 하면 그만큼 더 많은 상처와 비난에 힘든 시간을 보내온 것이다.
그러다 나이 먹고 생각해 보니 내가 나를 더 원하는 만큼 키우지 못하면서 나의 기대치에 관한 발광이었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나는 선배나 후배나 할 것 없이 예의 없는 것들을 판단할 때 첫인상과 그 말과 태도에 대해 선입견으로 판단해 버리는 경우들이 있었다.
내가 지금도 잘 지내고 있는 한 선배는 처음부터 요를 붙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굳이 그가 신경 쓰는 사람이라면 문장의 가장 끝에 슬쩍 요를 붙이는 정도였다. 그런데 그를 깊이 사귀다 보니 참 좋은 사람이고 정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많이 느끼며 살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을 나는 그 첫인상과 태도로 구분을 하며 지냈다.
어느 날 백기자와 저녁 술자리에서 그는 내게 한 손으로 술을 따르는데 내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제 편해졌냐? 한 손이네"라며 말을 건넸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건 내 진심이었던 것이다. 몇 날 며칠을 부끄러움에 허탈해했다.
그리고 나는 사유한다. 존댓말이 빼앗아 가버린 것들에 대해서.
우선 존댓말은 상대방의 말과 태도를 제어한다. 그저 존중하거나 배려하거나 하는 마음만 있으면 되는대도 허례허식을 갖추기도 한다. 더 불편한 것은 부모 자식 간의 거짓 존중이 생기고 진심을 빼앗아 간 경우가 참 많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모든 행위에서 웃으며 공손한 말과 존대를 하면 예의가 바르게 존중과 배려를 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 예로 우리는 콜센터의 음성을 들으면 그렇다.
그렇다면 우리가 존댓말을 버리고 서로 존중과 배려로만 대화를 한다면 사회가 어떻게 될까?
우선 국회의 회의가 참 재밌을 것 같다.
존경하는 아무개 의원님은 아무개 국회의원이 말했듯이로 바뀔 것이고 서로의 싸움은 더 잔혹사가 될 테니까 말이다.
영어는 그래서 많은 표현들이 비유를 하거나 에둘러서 하는 표현들이 많다. 그것이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 상관없이 그들은 그저 존중에는 "우쥬"나 "써" "맴"을 붙이면 된다.
오늘부터 나는 존댓말을 한 번 거부하는 삶을 살아볼까 하는 엉뚱한 생각으로 상쾌한 아침을 맞는다.
어떤 놈이 내 장난의 제물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