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어머니는 나를 만나면 항상 선친의 말씀만 하셨다. 예전에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다.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10살 차이의 형제셨다. 할머니는 팔 남매를 낳으셨다는데 내가 보고 자란 건 할머니와 큰아버지 그리고 고모 한 분이셨다.
큰어머니께서 하시는 말씀 중에 황해도에서 넘어오실 때 얘기를 해주셨는데 내가 알고 있던 내용과 달랐다. 소 2마리와 정미소 기계를 가지고 나왔다는 말씀 중 나는 정미소 기계만 알고 있었다. 큰 아버지는 나의 기억 속에서도 별로 좋은 분은 아니셨고 큰어머니의 기억 속에도 그랬다. 큰 어머니가 아버지 말씀을 많이 하신 것은 아버지가 형수 편을 많이 들어줘서 그런 것 같았다.
점심을 먹으러 가던 도중 큰어머니의 얘기를 듣던 중 나는 뒷좌석에서 한 번 더 울었다. 사실 요즘은 울고 싶어도 억지로 참게 되는 나를 보며 누가 나를 한 대 때려주길 바랐었는데 오늘은 그냥 눈물이 흘러나왔다. 흑흑거리며 울다가 난 "시원하다"라고 말했다.
내가 살아온 인생은 아버지가 흐뭇해하시길 바란 인생이었다. 내가 만일 내 인생의 산에 우뚝 나의 깃발을 꽂는 날이면 난 그곳에서 아버지를 부르게 될 것이다.
참 기가 막힌 일은 고1 때 우리 집은 2층으로 지어진 정원도 꽤 넓고 큰 집이었는데 계단을 올라 들어가면 내 방의 창이 뒤의 공터로 나 있었다. 그곳은 가끔씩 쓰레기를 모아 태우기도 하는 곳이었는데 어느 날 플라스틱을 태우는 연기를 맡고 나는 방에서 쓰러져 실려가 약 2일 동안 고열에 시달린 경험이 있다.
그때 내 입에서는 엄마가 아닌 아빠를 찾았다고 했다.
밤새 간호하시던 엄마가 서운해하시던 일이었다.
그 모든 일들이 갑자기 한 번에 생각 속에서 쏟아져 내려와 내 가슴을 찢고 있었다. 몇 분을 한참 울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그리고 운전하는 형에게 말했다.
아니 45년 전 얘기가 이렇게 생생한 건 도대체 뭔지 참.
그러자 아흔두 살 소녀가 말했다.
"그런 말 말어! 난 안 적도 다섯 살 기억이 나!"
순간 우린 서로 웃었고 점심을 먹고 다시 돌아가는 길.
아버지의 잔상이 내게 보이셨는지
대련님! 울산 가시더라도 명절이면 꼭 오셔야 해요!
그리고 다시 아버지 얘기를 꺼내신다.
느이 아버지 졸업장이래도 쥐어줬어야 했는데...
또 울었다. 그냥 울면서 그리웠고 미안했다.
아버지의 삶이 참 불쌍해서 더 울었다.
헤어지고 형이 데려다주는 길은 서로 아무 말이 없었다.
난 그저 차에서 내리며 운전 조심해요.라고 던지듯 말하고는 집에 올라와 한참을 울었다.
속이 시원해질 때까지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