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하나의 국가로 출범했지만, 그 내부에는 이미 서로 다른 항로를 상정한 집단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해방 이후의 혼란’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해방 이전부터 각기 다른 역사 경험과 정치적 상상력을 축적해온 세력들이 동일한 시점에 귀환하면서 발생한 구조적 충돌이었다. 이 충돌은 단순한 이념 대립이 아니라, 국가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 인식 차이, 즉 초기 항로 설정의 편차였다.
먼저 국내에 잔존해 있던 세력과 해방 직후 급부상한 행정·관료 집단은 질서 회복과 안정을 국가의 최우선 과제로 인식했다. 이들은 일제 통치 체계 속에서 행정 경험을 축적했거나, 최소한 제도 운영의 연속성을 중시했다. 이들에게 국가는 이상을 실현하는 공간이기보다는, 혼란을 통제하고 생존을 보장하는 장치였다. 이러한 인식은 미군정과 자연스럽게 결합했고, 결과적으로 강력한 중앙 권력과 행정 중심 국가 모델로 이어졌다.
반면,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세력들은 전혀 다른 항로를 그리고 있었다. 중국 망명파, 특히 이회영을 중심으로 한 신흥무관학교 계열은 국가란 민족 공동체의 자발적 결단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이라는 인식을 공유했다. 이들에게 독립은 단순한 주권 회복이 아니라, 낡은 왕정과 식민 통치를 동시에 넘어서는 혁명적 전환이었다. 공화정은 수입된 제도가 아니라, 투쟁 속에서 형성된 필연적 귀결이었다.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한 서재필·이승만 계열 역시 공화제를 지향했지만, 그 접근 방식은 중국 망명파와 또 달랐다. 이들은 제도화된 민주주의, 국제 질서 속의 합법 국가를 중시했다. 미국식 공화제 경험은 이들에게 ‘시민’보다는 ‘헌법과 제도’를 우선시하게 만들었고, 이는 강력한 국가 수립 이후 점진적 민주화를 상정하는 항로로 이어졌다.
문제는 이 서로 다른 항로들이 충분한 조정과 합의 없이 하나의 국가 틀 안에 동시에 투입되었다는 점이다. 공통의 적이었던 일본 제국이 사라지자, 각 세력은 더 이상 하나의 방향을 공유하지 않았다. 독립운동의 경험은 통합의 자산이 아니라, 분열의 근거가 되었다. 누군가에게 해방은 혁명의 시작이었고, 누군가에게는 행정 복원의 출발점이었으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국제 승인 국가 건설의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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