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철학과 예술, 베르그송, 마네, 세잔, 들로네, 김홍도, 도파민
시간은 흐르는 강물처럼 붙잡을 수 없지만, 미술은 이 불가능한 도전을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해 왔다. 서구 회화는 시간을 포착하여 화폭에 고정시키려 애썼고, 동북아 회화는 역설적으로 시간을 놓아버림으로써 더 깊은 시간을 표현했다.
과거 서구에서는 부정적인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서양의 회화는 주로 ‘공간’을 다루는 매체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서구의 철학은 플라톤부터 칸트까지 현대 이전에 주로 ‘공간’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그런데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송에 의해서 ‘시간’이 중요한 개념으로 떠오르고, 서양철학은 자신의 영역을 예술로 확장해 나간다.
‘지성’을 사용하는 ‘철학’보다, ‘직관’을 사용하는 ‘예술’은 ‘시간’ 개념이 담긴 진정한 ‘리얼리티’를 포착하기 비교적 용이한데, 베르그송의 시간 철학에 따라 현대로 넘어오는 서양미술이 어떻게 시간을 포획했는지 알아보고, 원래부터 ‘시간’을 중요시한 우리 미술을 살펴보자.
베르그송의 시간 개념에 대해서는 아래 글 참조.
* 모든 학문의 변화를 ‘밥그릇 싸움’으로 보면 이런 변화를 아래와 같이 볼 수도 있다.
고대 서양철학은 과학과 예술을 포함한 학문이었지만, 플라톤이 미학은 남겨두고 예술과 철학을 분리하면서 예술이 철학에서 떨어져 나갔다.
철학은 중세에는 신학의 종노릇 하다가, 르네상스를 거치며 가까스로 신학의 그늘에서 벗어났다. 이후 근대에 이르자 과학이 철학에서 떨어져 나갔고, 현대에는 과학 내부에서 '과학철학'이라는 갈래가 형성되었다.
계속 밥그릇을 빼앗긴 철학자들은 이를 참지 못하고 ‘직관’이 철학에서 중요하다는 명목 아래 예술로 영역을 확장해 가고 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술은 철학의 눈이다."
“철학은 미술의 뇌다.”
(미술은 절.대.로. 빼앗길 수 없다는 철학자들의 강한 밥그릇 잡는 힘이 느껴진다)
19세기 인상주의 화가들이 팔레트를 들고 밖으로 나간 것은 태양이 움직이는 궤적을 기록하기 위함이었다.
서양의 사실주의 회화는 19세기에 이르러 빛과 색채를 중심으로 순간적인 인상을 포착하는 인상주의(Impressionism)로 전환했다.
이들은 빛에 따라 변화하는 색감을 화폭에 담고, 세밀한 묘사보다 윤곽선 없이 색의 대비와 조합으로 형태를 표현하며, 역사·종교적 주제보다 일상의 모습을 그림으로써 ‘시간’을 붙잡으려 했다.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는 이런 전환의 중추적 인물이다. 그의 작품 폴리-베르제르의 술집(A Bar at the Folies-Bergère, 1882)은 이러한 현실주의와 인상주의의 교차점에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유리잔 반짝임과 실내등 불빛을 중첩시켜 한 순간의 다층적 시간을 구현했다.
마네와 같은 화가들은 경계선을 흐리게 하고 색으로 윤곽을 표현함으로써 짧은 시간의 연속성을 화폭에 담아냈다. 이는 마치 카메라 셔터를 일정 시간 열어놓는 ‘장노출 촬영(Long Exposure Photography)’과 유사한 효과를 만들어낸다. 색채를 통해 시간의 흐름을 붙잡으려는 시도였다.
위와 같은 초기 인상주의 화법은 짧은 시간의 연속을 표현할 수 있었지만, 긴 시간의 흐름을 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런 ‘지속으로서의 시간’을 표현하고 인상주의를 넘어선 미술가로 세잔이 손꼽힌다. 그는 죽기 전까지 날마다 집과 생트 빅투아르 산을 오가며 산을 그렸다. 그가 생트 빅투아르 산을 60여 차례 그린 것은 단순한 집착이 아니라 시간의 층위를 포개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래서 수십 편의 연작으로 생트 빅투아르 산의 아침, 낮, 저녁,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변화를 모두 캔버스에 담았다. 하나의 작품 속에서도 느슨한 색채로 조성된 텍스쳐에 공기의 흔들림과 바람의 움직임, 빛의 동요를 느낄 수 있다.
어떤 장면을 관찰할 때 아무리 움직이지 않으려 해도 우리의 의식은 계속 변화한다. 세잔은 이렇게 관찰자가 경험하는 의식의 변화를 그림을 통해 나타내고자 했다. 즉, 세잔은 시간의 흐름을 객관적으로 포착하기보다 자신의 ‘주관적 시간 경험’을 관객에게 살리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정지 상태의 공간화된 시간 속에 달아나는 순간을 포착하려는 인상주의를 넘어 ‘순간의 연속’이 아닌 ‘지속으로서의 시간’을 회화적으로 구현하려고 했다.
이런 접근으로 세잔 이전의 대부분의 모던 아티스트들은 회화에서 ‘지속으로서의 시간’을 표현하는 것에 도전했으나 실패한 것으로 평가받고, 세잔은 ‘시간의 이미지(an image of time)’를 창조한 최초의 모던 화가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세잔에서 현대 미술은 새롭게 출발한다.
세잔이 여러 방향으로 대상을 관찰하고 그것을 머릿속에서 다시 구성하여 그리는 실험은 피카소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세잔의 영향으로 입체주의(Cubism)는 여러 시점을 가지고 인지한 대상의 각 면들을 자르고 재단해서 단면을 화폭에 옮기는 ‘결정의 모자이크(a mosaic of decisions)’를 만드는 작업을 수행했다.
또한 주관적 시간 경험을 표현하던 세잔은 어떤 사물들 속에 삼각형, 사각형, 원뿔과 같이 변하지 않는 기본적인 형상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실제 사람들은 사물을 볼 때 이렇게 도형으로 뭉뚱그려 보는 경향을 발견하고, 생투 빅투아르산의 단순화된 산 모양으로 이를 표현한다.
이와 같이 세부적인 모양을 기하학적인 형태로 대상을 단순화해서 표현하는 방식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와 피트 몬드리안(Piet Mondrian) 같은 ‘추상예술(Abstract art)’ 화가들의 작품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대상의 본질적 형태만을 남기고 불필요한 요소들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시간과 공간을 추상화'했다.
즉, 현대미술의 입체주의(Cubism)는 ‘자연의 모방’이 아닌 ‘정신의 모방’을 창작의 요체로 삼게 되고, 그 극단은 추상예술로 이어졌다.
이와 같이 세잔은 현대 미술의 여러 사조의 뿌리가 되었고, 그래서 피카소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세잔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
로베르 들로네의 에펠탑 연작(이 글의 표지사진)은 도시의 심장박동을 기록한 타임캡슐이다. 특히 169cm에 달하는 1926년작 에펠탑은 철탑의 투명한 구조물 속에 새벽 5시의 청록과 석양의 주홍이 공존한다.
입체주의가 ‘형태’를 해체했다면, 로베르 들로네는 ‘색채’를 해체했다. 그의 해체된 색채는 마치 음악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오르피즘(Orphisme)’이라 불렸다. 음악은 ‘시간’을 필연적으로 전제하므로, 들로네는 색채의 리듬을 통해 또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표현했다.
오르피즘은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가 로베르 들로네의 작품을 보고 붙인 이름이다. 오르피즘(오르페우스주의)은 시와 음악의 반신(半神, demigod) 오르페우스(Orpheus)에서 유래했다. 오르페우스가 리라를 연주하면 숲의 맹수들과 나무, 바위까지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아폴리네르는 들로네의 작품의 색채가 마치 시적 운율과 음악적 화성, 조화로운 리듬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는 점에 착안하여 아폴리네르는 들로네의 작품을 오르피즘이라 불렀다.
더 나아가 들로네는 에펠탑 연작을 통해 집단적 경험까지 화면에 담아냈다. 그의 작품 속 에펠탑은 여러 각도에서 본모습이 겹쳐져 있는데, 이는 수천 명의 관광객이 각자 다른 위치에서 바라본 탑의 모습을 하나의 캔버스에 담아낸 것으로 ‘우리 모두가 함께 보는 에펠탑’을 상징하며 '합치주의(unanimism)'라 불린다. 이는 시간의 연속, 파편화된 공간을 넘어 ‘집단적 경험의 총체성’을 표현한 혁신적 시도였다.
'합치주의(Unanimism)'는 1900년대 초 프랑스에서 시작된 문학 운동으로 ‘여러 사람이 함께 같은 것을 보며 느끼는 감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상이다. 예를 들어 붉은 악마가 되어 월드컵 축구에서 모두가 함성을 지르는 순간, 또는 불꽃놀이를 함께 보며 감탄하는 경험이 '합치주의적 순간'이라 할 수 있다.
서양미술사는 시공간을 직선적으로 포착하려 했다. 르네상스의 원근법에서 시작된 시간의 시각화는 바로크의 극적 순간, 인상주의의 순간 포착으로 이어지며 계속 발전했다. 인상주의는 경계를 색으로 채워 흐르는 시간을 표현했고, 연작을 통해 긴 시간의 흐름을 담았다. 입체주의는 다양한 공간을 표현하기 위해 공간을 분해하고 재조합했으며, 오르피즘은 색채의 리듬을 통해 음악적 시간성을 표현했다.
그러나 이 모든 시도는 시공간을 ‘붙잡으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화면을 꽉 채우고, 시간을 고정하고, 공간을 분해하는 이러한 접근은 때로는 답답함을 주기도 한다. 마치 부드러운 파운드케이크를 계속 먹다 보면 질리고 목이 막히는 것처럼, 시원한 사이다(혹은 쏘맥)가 필요한 순간이 온다
이처럼 막힌 목과 숨찬 가슴을 사이다처럼 뚫어주는 하나의 작품, 그것은 바로 조선 후기 화가 단원 김홍도(1745~1806)의 <주상관매도(舟上觀梅圖)>다.
164cm의 그림을 보는 순간 텅 빈 공간이 꽉 막힌 목을 ‘뻥’하고 뚫는다.
잡을 수 없는 시간을 붙잡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여백’으로 놓아버림으로써 관객은 그림의 ‘여백’ 속으로 '훅' 빠져들어 그림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바로 여백이다.
이 그림은 여백이 너무 넓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 핸드폰 화면과 컴퓨터의 모니터를 가득채우고 넘어선다. “물아래가 하늘이고 하늘 위가 물인가”라는 김홍도의 시구처럼, 공간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배는 수평선을 15도 기울어뜨린 채 그림의 70%를 차지한 여백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마치 블랙홀처럼 시공간을 휘게 만드는 중력장을 형성하는 것 같은 느낌은 나만의 착각인가?
이런 느낌은 우연이 아니었다. 동양 산수화가 의도한 것이었다.
동양 산수화는 단순히 산과 물이라는 소재를 그린 그림이라기보다는 ‘산수공간’을 그린 그림이다. 산과 물을 묘사하기보다 산과 물을 감싸고 있는 ‘대기 공간의 깊이’를 드러냄으로써 대상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북송대 곽희(郭熙, 1023~1085)가 정립한 삼원법은 산수화의 기본 법칙으로, 고원(高遠), 심원(深遠), 평원(平遠)이라는 세 가지 원근법을 활용한다. 산 아래에서 꼭대기를 올려다보고(고원), 위에서 아래를 굽어본 것처럼 산 뒤를 보고(심원), 가까운 곳에서 먼산을 수평적으로 조망한다(평원)(곽희, 임천고치(林泉高致) 산수훈(山水訓), "自山下而仰山顚, 謂之高遠, 自山前而窺山後, 謂之深遠, 自近山而望遠山, 謂之平遠").
그런데 제한된 화면에 고원의 무한한 높이감, 심원의 무한한 깊이감, 평원의 아득히 무한한 수평감을, 즉, 산수의 ‘무한함’을 담으려면 구도적으로 장치가 필요하다.
바로 여백이 그 무한한 거리감을 재생시킬 수 있는 도구다. 여백이 없으면 닫힌 공간이 된다. 여백은 공간을 열며, 보이지 않는 '기(氣)의 맥박'을 통해 화면은 살아서 움직이게 된다.
여백은 공간에 ‘숨’을 불어넣는다.
서구에서는 전통적으로 물질이 없는 공간은 비어있다고 여겼지만, 동북아에서는 빈 공간이 “흐르는 기(氣)”로 가득 차 있다고 보았다. 여백은 흩어져 흐르는 '기(氣)'를, 즉, 보이지 않지만 끊임없이 움직이는 세계인 ‘무(無)’를 표현한다.
산수화에서 화가들은 ‘산수’보다 ‘여백’을 음미하기 위해 형상을 그렸다. 산수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여백’, 즉 '보이지 않는 세계'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동양의 산수화는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고 흐르는 세계가 융합하여 하나의 ‘초월적 시공간’을 창조한다. 그리고 산수시공간의 개념은 우주시공간의 개념으로 무한하게 확장된다.
“‘인간의 능력으로 그려낼 수 없는 무(無)’를 가장 잘 표현한 여백”이 담긴 산수화가 가장 아름다운 산수화다. 그런 의미에서 주상관매도는 어떤 동아시아 산수화보다 뛰어나게 ‘무(無)’를 포착했다.
우리가 잡을 수 없는 ‘시공간’을 ‘놓아버림’으로 ‘잡을 수 없는 시공간의 존재’ 그 자체가 스스로 본인의 모습을 드러내게 하는 듯하다.
비어 있는 여백은 상상의 나래를 자극하여 관람자의 뇌로 하여금 빈 공간을 환시(幻視, visual hallucination)로 가득 채우게 만든다.
서구의 입체파가 공간을 인위적으로 조각내 붙이는 방식으로 시간을 표현했다면, 동양의 산수화는 공간들의 자연스러운 어울림을 통해 시간을 표현했다. 들로네의 에펠탑은 지적인 이해와 노력을 요구하지만, 김홍도의 주상관매도는 블랙홀처럼 강한 중력으로 관객을 작품 속으로 빨아들인다. 블랙홀처럼 시공간을 붕괴시킨다.
우리 뇌는 경험한 것을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뇌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각한다. 즉, 우리 뇌는 ‘무의식적 추론(unconscious inference)’을 통해 시뮬레이션한 현실을 지각한다. 이는 19세기 헬름홀츠가 제시한 이론으로, 현대 신경과학에서 일부 수정을 가해 증명된 이론이다.
여백을 볼 때 우리 뇌는 무의식적으로 그 공간을 채우려 한다. 주상관매도를 보며 어디가 물인지, 어디가 하늘인지, 여백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지 뇌가 적극적으로 추론하면서 여백을 채운다. 이런 시뮬레이션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기억과 맥락을 활용해서 우리의 의식이 출렁거리는 상태를 만들어낸다(M. Bar 등, 2006).
여백은 우리 안에서 ‘시간을 창조한다’
장하님의 아래 글에 위 무의식적 추론의 현대 신경과학판 해설인 예측 부호화, 베이지안 추론, 자유 에너지 원리가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흥미로운 점은 신경전달물질 도파민으로 작동하는 우리 뇌의 보상체계는 불확실성과 새로운 것을 탐색하는 과정에서도 활성화된다는 것이다(Gershman, 2019).
도파민은 우리가 불확실한 것과 새로운 것을 탐구하도록 촉진한다. 예를 들어 새로운 레스토랑에 가면 맛있을 수도, 별로일 수도 있지만, 이 불확실성 자체가 추가적인 가치로 인식된다.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학습할 때 도파민 체계는 활성화된다.
이러한 도파민 회로에 대한 최신 신경과학 연구들은 우리 뇌는 ‘달콤한 보상이나 강력한 처벌’보다 ‘새롭거나 불확실한 자극’을 제공하는 것에 더 큰 학습 효과와 근본적인 행동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음을 암시한다(Fiorillo, 2003). 불확실성을 자극하는 도박을 끊기 어려운 것도 비슷한 이유다.
산수화의 여백은 바로 이런 불확실성을 제공한다. 여백 너머를 상상할 때 우리의 도파민 체계가 활성화되면서 미적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마치 우리 뇌가 빈 공간을 창의적으로 채우는 과정 자체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것과 같다. 이는 단순히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뇌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창조적 경험이 된다.
물론 불확실성에 대한 탐색 욕구를 도파민의 영향 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에 따라 새로운 것을 경험하더라도 도파민 체계가 덜 활성화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위험회피성향이 높은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탐색할 때 도파민 체계가 상대적으로 덜 활성화된다.
도파민 수준이 낮거나 도파민 수용체 민감도가 높은 사람들, 세로토닌 수준이 높은 사람들은 더 위험회피적인 경향을 보인다(Molins, 2022). 그리고 이런 사람의 성향은 타고났기도 하지만 살아가며 변한다.
음악이 침묵이라는 하얀 백지장 위에 소리라는 붓으로 그려낸 그림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림은 여백이라는 넓은 오선지 위에
색이라는 음표로 울리는 음악일까?
들로네의 에펠탑에서 아우성치는 인간들의 함성이 느껴지고, 김홍도의 주상관매도에서는 시공간이 진동하며 만들어 내는 파동이 우리 뇌와 공명한다.
시간을 붙잡으려는 욕망과
시간을 흘려보내는 지혜
이 양극의 시도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진정한 예술적 시간성이 탄생한다. 이 두 접근법은 서로를 보완하며 시간이라는 영원한 수수께끼에 대한 인간의 이해를 풍요롭게 한다.
참고문헌
내면소통, 김주환, (주)인플루엔셜, 2023
눈의 폄하: 20세기 프랑스 철학의 시각과 반시각, 마틴제이, 전영백, 이승현, 안선미, 최정은 옮김, 서광사, 2019
미술은 철학의 눈이다, 서동욱 엮음, 문학과 지성사, 2014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 오주석, 신구문화사, 2018
지능의 기원-우리의 뇌 그리고 AI를 만든 다섯 번의 혁신, 맥스 베넷, 김성훈 옮김, 더퀘스트, 2023
- 이하 논문 -
로베르 들로네 회화에 나타난 '색채의 동시대비성’, 윤귀원, 현대미술논집 제1집, 1991
베르그송의 ‘지속’과 세잔의 ‘시간 이미지’: 큐비즘에의 영향을 중심으로, 전영백, 서양미술사학회 논문집 제54집, 2021
삼원법에 나타난 산수공간의 미학적 의미, 김재숙, 철학연구 제125집, 대한철학학회 2013
Fiorillo, C. D. et al. (2003). Discrete coding of reward probability and uncertainty by dopamine neurons. Science, 299(5614), 1898-1902.
Gershman, S.J., Uchida, N. Believing in dopamine. Nat Rev Neurosci 20, 703–714 (2019).
Molins, F.; Sahin, F.; Serrano, M. Á. The Genetics of Risk Aversion: A Systematic Review. Int. J. Environ. Res. Public Health 2022, 19, 14307.
[표지: 로베르 들로네(Robert Delaunay)의 에펠탑 연작, 출처: Wiki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