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베르그송의 시간철학

철학, 미술, 칸트, 베르그송,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범주, 시간

by 감각의 풍경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저자인 마르셀 프루스트는 소르본에서 베르그송의 강의를 들었으며, 베르그송의 시간 철학은 프루스트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알려진다.

프루스트가 베르그송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라이프니츠 이후 가장 위대한 형이상학자께... 사람들이 이유도 없이, 또 운율에도 맞지 않게 ‘베르그송적 소설’이라 불리는 작품을 쓴 한 경탄자가...” 베르그송은 프루스트의 사촌누이와 부부였다.

시간의 강을 건너며 “존재”에서 “생성”으로

베르그송의 통찰


서양 철학은 플라톤의 이데아로부터 출발하여 근대 칸트에 이르기까지 공간 중심이었고, 주역으로 대표되는 동북아의 철학시간 중심이었다. 공간 중심의 서양 철학은 19세기에 이르러야 본격적으로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예를 들어 현대물리학에서 '시공간' 개념을 영어로 'Timespace'가 아닌 ‘Spacetime’이라 하고, 우리는 ‘공시간’이 아닌 ‘시공간’이라고 한다. 단어 안에서 영어는 ‘공간인 Space’를 먼저, 동북아는 ‘시간’을 먼저 위치시켰다. 문화적으로 중요하게 인식하는 것의 차이가 언어를 통해 나타난 사례다).


서양에서 본격적으로 시간의 중요성을 자각하기 시작한 것은 현대 철학의 문을 연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에 의해서다 [주 1: Bergson이 ‘베르그송’인지 ‘베르그손’인지?].


베르그송은 경험과학이 추구하는 ‘사물을 나누어서 이름을 붙이는 것’ 즉, 개념화하는 ‘분석’이라는 사고 자체에 대해서 의문을 던진다. 그는 분석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볼 때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방법이지만, ‘시간’이라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진다고 본다. 즉, 모든 분석은 어떤 형태로든 ‘시간을 왜곡’시킨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변화, 운동, 시간근본적으로는 ‘분할 가능하지 않으므로시간을 분할하는 순간, 반드시 ‘그 존재를 어떤 식으로든 훼손’시킨다는 것이다.


베르그송이 생각하는 세계는 근본적으로 ‘연속성’ 그 자체다. 그런데 이걸 어디선가 자르면 분명히 흐름, 변화, 시간에 인간이 변형을 가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계를 합리적으로 이해하려면, 어쩔 수 없이 끊어야 하고, 베르그송도 이를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이 존재의 전부, 근본 리얼리티라고 생각하면 그건 오해라는 이야기다. 진짜 리얼리티는 아무리 분석해도 완전히 그 분석에 들어오지 않는 ‘이 세계의 흐름, 풍요로움, 탄생, 시간’이라는 것이 베르그송의 근본적인 주장이다.


베르그송에 의해 서구의 철학은 “존재에서 생성으로” 그 장을 넓혀간다.


이와 같은 베르그송의 사유는 예술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자세한 것은 아래 시간의 숨에 기술했다.


1. 틀을 넘어서: 분석적 사고의 한계와 가능성


베르그송은 인간의 이성생물학적 진화의 산물로 보았다. 호랑이에게 이빨이 무기인 것처럼, 인간의 무기는 이성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성으로 세상을 분석하려면 대상이 ‘고체’처럼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액체’처럼 흘러가며, 액체는 컵과 같은 고체의 도움 없이는 나눌 수 없다.


따라서 베르그송은 분석적 사고를 넘어서는 '직관(intuition)’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관점은 ‘비합리주의’로 불리지만, 사실은 이성을 넘어서는 ‘초합리주의’에 가깝다. 실재아무리 개념화하려 해도 온전히 잡히지 않는 ‘질(質)들’이 끊임없이 출렁거리는 상태이며, 이는 지성(intelligence) 보다 직관(intuition)을 통해 더 잘 파악된다.


2. 범주의 딜레마: 칸트 범주 폭력과 그 너머

앙리 베르그송(좌), 마르셀 프루스트(가운데), 임마누엘 칸트(우), 출처: wikimedia

세계를 개념으로 잡으려고 한 대표적인 인물이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다. 그는 『순수이성비판』(1781)에서 인간이 대상을 직접 인식하는 것이 아니고, 12가지 범주를 통해서 정리된 형태로 경험한다고 주장한다.


칸트는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대상이 순수한 감각이 아니라 우리의 사고구조(이성, 개념)에 의해 해석된다고 주장하며, 12개의 범주를 네 가지 형식(양, 질, 관계, 양태)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우리의 고정관념이 이 범주와 유사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현상들이 많이 존재한다. 특히 양자역학의 개념들은 전통적인 범주를 벗어나는 현상들을 보여준다. 칸트는 훌륭한 철학자이지만 그가 상상했던 범주로 세상을 표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MBTI도 인간의 성격을 8가지 좁은 틀에 끼워 넣으려 한다. 8가지 범주 밖에 많은 종류가 있고, 8가지 범주마저 시간에 따라 변한다(나의 경우 6개월 정도 간격으로 4차례 시도해 보았는데, ’N’을 제외하고 할 때마다 바뀌었다).


3. 범주의 확장: 세계의 새로운 얼굴


이러한 칸트의 한계를 넘어 우리는 새로운 어떤 것을 만나면 그것을 수용하면서 우리가 가진 범주를 확장해 나가야 한다.


따라서 칸트처럼 이미 만들어진 틀에 따라 차이를 그 속으로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베르그송이 이야기한 것처럼 기존에 우리가 가진 범주를 깨부수는 ‘질적 창조’가 필요하다. 질적 창조를 통해 우리는 세계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다.


내가 쓰고 있는 ‘철학의 눈으로 미술을 마주하다’ 매거진도 기존 학술지의 ‘논문’이라는 틀과 에세이 같은 ‘산문’이라는 틀을 깨부수고, 에세이인 것 같으면서도 논문 수준의 깊이가 있고, 논문인 듯하면서도 일반적인 논문처럼 세분화된 학술 분야에 구속받지 않고 다방면의 학술 분야를 넘나들면서 통합적인 사유를 하며 ‘질적 창조’를 하고 싶었던 내 욕망의 부산물이다.


4. 운동하는 세계: 베르그송의 창조적 시선


범주를 싫어하지만 범주 없이 인간은 생각하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베르그송이 가진 틀열역학과 진화론의 융합인 다음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우주에는 근본적으로 두 가지 운동이 있다.
하나는 ‘차이와 복수성을 끊임없이 생겨나게 하는 진화의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을 열적 평형으로 몰고 가는 엔트로피의 운동’이다.


쉽게 말해, 열역학에 따르면 세계는 점점 무질서해지고, 진화론에 따르면 세계는 점점 복잡하고 풍요로워지는 상반된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다.


결론적으로 베르그송이 정의하는 세계의 틀은 ‘물질-우주의 하강운동(엔트로피의 하강 운동)’‘생명-진화의 상승운동’, 두 개의 운동이 투쟁을 하는 세계다. 그리고 세계에 영원한 것은 오직 이 두 가지 운동 밖에 없다.

우리는 ‘물질과 생명이 타협한 결과’다.

인간의 죽음도 이러한 두 운동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 ‘개체’로서는 엔트로피에 굴복하여 사라지지만,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으로서는 후손을 통해 생명의 기억을 진화시켜 나간다.


베르그송이 『창조적 진화(L’Évolution créatrice, 1907)』 에서 보여준 이러한 시간에 대한 통찰은 현대 철학, 과학, 문학,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192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5. 흐르는 강물처럼: 헤르만 헤세와 시간의 지혜

헤르만 헤세(출처: wikimedia), 동강(직접 촬영) 이미지는 휘각(揮珏)이 촬영한 것으로 CC BY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이와 같은 베르그송의 시간을 보면서 직관적으로 예전에 읽었던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가 떠올랐다. 베르그송의 말대로 한번 ‘직관적으로’ 감상해 보며, 헤세가 전하는 강물의 비유를 통한 시간의 깨달음을 느껴보자.

"그러니까." 한 번은 싯다르타가 물었다. "당신 역시 그 비밀을 강물에게서 배웠나요?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말입니다."

바주데바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맞소, 싯다르타." 그가 말했다. "당신이 말하는 건 이것이지요. 강물은 어디서나 동시에 존재한다. 원천에서나, 어귀에서나, 폭포에서나, 나룻배가 있는 곳에서나, 여울에서나, 바다에서나, 산골짝에서나, 어디서나 동시에 존재한다. 그리고 강에는 오로지 현재뿐이 없다. 과거의 그림자도, 미래의 그림자도 없다."

"바로 그것입니다." 싯다르타가 말했다.

"그것을 깨닫고서 나는 내 인생을 다시 돌아보았죠. 내 인생 역시 강물이었어요. 소년 싯다르타는 어른 싯다르타로부터 그리고 늙은 싯다르타로부터 단지 그림자로 갈려져 있을 뿐 실체로 갈려져 있는 것은 아니었지요. 싯다르타의 전생들 역시 과거가 아니었고, 그의 죽음과 브라만으로의 회귀도 미래가 아니었지요. 과거의 것이라는 것도 없고, 미래의 것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존재할 뿐이지요. 모든 것은 존재와 현재를 갖고 있습니다."

싯다르타는 무아지경이 되어 말했다. 그 깨달음이 그를 더없이 행복하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오, 모든 번뇌는 시간 때문이 아니던가..(후략)

싯다르타는 이 깨달음을 통해 자신의 인생 역시 강물처럼 분절된 시간이 아닌 하나의 연속체임을 깨닫는다. “소년 싯다르타는 어른 싯다르타로부터, 그리고 늙은 싯다르타로부터 단지 그림자로 갈려져 있을 뿐 실체로 갈려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베르그송이 말하는 시간의 연속성과 정확히 일치한다.




[주 1: Bergson이 ‘베르그송’인지 ‘베르그손’인지?]


베르그송의 철학으로 프랑스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황수영은 베르그송이 프랑스어로 정확하게 발음하면 ‘벩-손’ 또는 ‘베륵손’이 되고, 여러 가지 이유로 최소한 ‘베르그손’으로는 발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아래 참고문헌 황수영 2006).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베르그손이라고 표시된 글도 상당한 것 같다. 결론적으로는 베르그송이 맞고, 그 실정법적인 이유는 아래와 같다.


외래어 인명 표기를 결정하는 법은 바로 문화체육관광부고시 외래어 표기법이다(제2017-14호). 외래어표기법에는 아래 5가지 기본 원칙을 두고 있다.

제1항 외래어는 국어의 현용 24 자모만으로 적는다.
제2항 외래어의 1 음운은 원칙적으로 1 기호로 적는다.
제3항 받침에는 ‘ㄱ, ㄴ, ㄹ, ㅁ, ㅂ, ㅅ, ㅇ’만을 쓴다.
제4항 파열음 표기에는 된소리를 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제5항 이미 굳어진 외래어는 관용을 존중하되, 그 범위와 용례는 따로 정한다.

문체부 산하기관인 국립국어원에서 해당 표기법에 따라 외래어들을 심의한다. ‘Bergson’에 대해서는 1999. 4. 22. 27차 회의에서 ‘베르그송’으로 표시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심의, 결정된 내용은 외래어 표기 용례집을 통해 공표한다. 2002년 국립국어원이 발간한 외래어 표기 용례집에서 Bergson은 베르그송으로 아래처럼 공표되었다.

따라서 Bergson의 표준 외래어는 베르그송이다.


다만, 인명에 대해서는 외래어표기법 제4장 제1절 제4항에서 “고유 명사의 번역명이 통용되는 경우 관용을 따른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관용(慣用)은 관행을 의미하므로(용서를 의미하는 관용(寬容)과 한자가 다름), ‘베르그손’이라고 표시하는 것이 관행으로 굳어지면 ‘베르그손’으로 바뀔 가능성도 물론 없지는 않다.


나는 국립국어원의 결정을 떠나 직관적으로 ‘베르그송’이 더 좋다고 본다. ‘손’이라고 하면 나도 모르게 지역 방언에서 어른들이 어른아이들을 타이를 때 ‘이놈의 손(이노무 손)’이라고 하는 것이 자꾸 연상된다(글자 수도 베르그손과 같이 4글자로 동일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입장에서 '베르그송'이라고 하면 '옹 옹'하는 것이 왠지 프랑스어 같은데 '베르그손'이라고 하면 어느 나라말인지 헷갈린다. 그래서 Bergson을 베르그손이라고 하는 것이 실정법에도 부합하고, 새로운 관행을 만들어 나가야 할 필요성도 못 느끼므로 나는 표준 외래어인 ‘베르그송’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 물질과 기억, 시간의 지층을 탐험하는 이미지와 기억의 미학, 황수영, 그린비, 2006

- 생명의 춤-시간의 또 다른 차원, 에드워드 홀, 한길사, 2013

- 세계철학사 4 탈근대 사유의 지평들, 이정우, 도서출판 길, 2024

-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박병덕 옮김, 민음사, 2002

- 창조적 진화, 앙리 베르그손, 황수영 옮김, 아카넷, 2015


[표지: 흐르는 시간을 포착한 세잔의 생트 빅투아르산 연작, 출처: wikimedia]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