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에서 한 걸음 더

- 아들을 향한 바뀐 기도문-

by breeze lee

오늘 도서관 가서 빌린 책 <작고 아름다운 나태주의 동시수업> 중 발췌-


최근 두 주 동안 중2 아들의 기말고사 기간이었고, 우리 가족에게는 전쟁 같은 시간이었다.

주말에 학원 보강이 잡히자, 아들은 왜 주말까지 학원에 가야 하냐고 반문하였고 빠질 수밖에 없는 까닭은 친구들과 놀아야 한다는 이유였다. 당시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돌아보니 그것도 내 기준의 상식이었다. 대부분 학생이 시험기간에 보강에 참여하니까, 그래야 한다고 여긴 것이다.


전문가들은 사춘기 자녀가 인생의 근원을 묻는 질문—예를 들면 “학교나 학원은 왜 가야 해요?”—을 단순한 반항으로 보지 말라고 말한다. 진짜 의문이 들어하는 말일 수 있다니 그 조언을 되새기며 최대한 차분하게 반응하려 했다. 하지만 "공부를 왜 해야 하느냐"는 원초적인 질문 앞에서 난감했고, 동시에 중요한 시간을 낭비하는 듯하여 화도 났다.


시험기간 중에도 아들은 인터넷 게임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고 동네 공원에 나가 축구를 하고 돌아오곤 했다.

시험 전날까지도 3일 연속. 정말 저 세상 배짱이었다.

아빠와의 갈등도 최고조에 달했다. 세세한 묘사는 생략해도, ‘전쟁’이라는 말 하나면 짐작이 되리라.

그러다 어느 순간, 나의 감정은 화를 지나 연민으로 옮겨갔다.


이 과정에서 전문가 상담을 받기도 했고, 종교 지도자와 직장 선배에게 조언도 구했다.

많은 말을 듣고 나니, 공통적으로 말하던 건 “문제 행동”이 아니라 아이라는 존재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라는 것이었다.


그래, 너는 남들보다 공부가 좀 더 어려울 수도 있겠다.

어릴 적부터 말도 늦었고, 걷는 것도 천천히 했지.

벌써 14년을 살아냈지만, 수행평가에 시험에 과목도 많고… 인생이 만만치 않다는 걸 요즘 느끼고 있구나.

그래, 네가 태어나서 참 고생이 많구나. 폭풍 같은 너의 시간들이 헛되지 않고 너에게 값진 깨달음을 주기를...


사람들은 자주 “공감해”라는 말을 쉽게 한다. 하지만 정말 필요한 건 말보다, 그 옆에 가만히 머무는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공감은 감정을 이해하는 마음이고, 연민(sympathy)은 그 안 좋은 상황에 처한 사람을 감정을 이해하고 안쓰럽게 여기는 마음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비슷한 의미인 compassion은 단순히 ‘불쌍히 여김’이 아닌, 함께 아파하며 행동하는 따뜻한 용기다


“네가 힘든 걸 알아. 그리고 덜 힘들도록 내가 함께할게.”

공감 너머 이런 마음이 연민인 거 같다.


공감은 잘한다고 생각했지만, 내 아들에겐 그조차 부족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아들을 위해 드리는 나의 기도도 다시 고쳐 보았다.

예전엔 절에서 기왓장에 '지혜총명', '학업성취' 같은 말을 썼지만, 지금은 이렇게 바꾸고 싶다.


“우리 아들이 가장 행복할 수 있고, 자신의 능력을 꽃피울 수 있는 길로 인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늘 자신을 성찰하며 바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공감하고, 필요한 곳에 손을 내밀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오늘 자매 소통방에 동생이 한 뉴스 영상을 올렸다. 내용을 보니 한 시민이 제보한 영상으로 한 중학생이 더운 날씨에 길거리에서 야채를 파시는 할머니 주변을 서성이다가 다가가서 말을 걸고 오만 원짜리 지폐를 바꿔와 3만 원을 드린 것이었다. 그 학생은 2만 원은 용돈으로 써야 해서 3만 원밖에 못 드려 죄송하다는 말도 남겼다고 한다. 할머니가 이거라도 가져가라며 비닐봉지에 몇 가지 야채를 담아주자 꾸벅 감사인사를 하며 돌아갔다.

"어떻게 키우면 이리될까? 최고다." 동생이 남긴 말뿐 아니라 아래 댓글에 대한민국의 미래는 밝다, 서울대 의대 가는 거보다 훌륭하다, 부모님이 잘 키우셨네 등 칭찬일색의 글이 가득했다. 학교에서는 모범상을 주기로 했고 여러 기관에서 장학금을 주겠다고 연락이 왔다고 한다. 우리 아들도 머리가 비상하기보다 이런 사람으로 자랐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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