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 정전으로 실감하다

-우리 모두 성숙한 태도가 필요할 때-

by breeze lee

얼마 전, 서울에 한 아파트가 정전이 되어 주민들이 불편을 겪는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래층에서 물을 받고 엘리베이터가 작동하지 않아 계단으로 힘겹게 나르고, 냉장고가 멈춰서 안에 정성껏 만들어 둔 음식들이 상해 못 먹게 사연들에 참 안타깝고 고생스럽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일요일, 14년 정도 지났지만 아직 외관도 깨끗하고 관리도 잘해 주어 별로 신경 쓸 게 없던 저희 아파트에도 정전이 찾아왔습니다. 10시경 욕실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온 세상이 암흑으로 변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누가 불을 껐나?' 하며 문을 열었는데 거실도 캄캄했고 방에 들어가 있던 아이들도 나와서 "엄마 왜 이래요?" 하는 것이었어요.


창밖을 내다보니 앞 동은 드문 드문 불이 켜져 있어 혹시 우리 집만 정전인가 싶어 현관문을 열고 나가보니 옆집 아저씨도 나오셨더군요. 그래서 "거기도 정전되셨어요?" 하니 그렇다고 하셔서 저는 바깥 사정도 살필 겸 에코백을 메고 둘째 아들과 함께 마트도 갈 겸 1층으로 내려왔습니다. 짐작대로 우리 동 사람들이 각 라인에서 몇 분씩 나오셔서 아파트 위를 쳐다보고 계셨습니다. 마치 백희나 작가님의 그림책 '달 샤베트'의 한 장면 같았습니다.

[출처: 예스 24 '달 샤베트' 중 한 장면]


남편과 큰 아들은 우선 남아서 상황을 살피기로 했고 저는 마트에서 장을 본 후 아이스크림 몇 개를 사서 가까운 다른 동에 사시는 친정 부모님 댁으로 향했습니다. 저 멀리 관리사무실로 향하는 사람들이 보이는데 관리소 직원들도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싶어 저까지 보태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정전이 길어지면 둘째는 친정에 재울 생각이었고 저는 다시 집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친정집에 가서 아이스크림으로 일단 더위를 식히고 우리 동을 거실에서 바라보며 불이 들어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남편에게 전화하니 지금 수리 중이니 힘드시겠지만 기다려 달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고 하더군요. 남편과 첫째도 더울 텐데 이쪽으로 오라고 했지만 남편은 저녁이라 기온이 좀 떨어졌다며 견딜만하다며 남겠다고 했고 첫째는 견디다 힘들었는지 잠시 후 짐을 싸서 친정으로 왔습니다.

남편이 전장에 남은 군인처럼 조금 듬직해 보이기도 했지만 장모님 댁이 불편해서 그런가 싶기도 했습니다. ^^ 첫날 정전은 저에게 달 샤베트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며 약간은 낭만적인 소동이었습니다.


저는 기다리다 결국 아이들과 함께 친정부모님이 깔아준 시원한 거실 인견 이부자리에서 잠이 들었고(여보 미안), 눈을 떠보니 아침이더군요. 부모님 찬스로 가깟으로 폭염의 밤을 무사히 지났습니다. 남편에게 전화하니 새벽 2시쯤 다시 전원이 들어왔다고 하더군요. 둘째 아이가 아직 방학을 안 해 아침 7시 반경 모자를 눌러쓰고 둘이 집으로 향했습니다. 아침을 챙겨주고 아이를 보내고 나니 또 방송이 나왔습니다.


"어제 정전으로 인해 오늘 000 부품을 교체하려고 합니다. 오전 10시~ 오후 2시까지 전원이 내려갈 예정입니다. 엘리베이터는 상시전원으로 정상 운행됩니다. 입주민들의 많은 양해 바랍니다." 오 마이 갓!


저는 방금 샤워를 마친 후였고 시계를 보니 9시 30분이었습니다. 부리나케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고 남편도 어서 씻으라고 했습니다. 집에 무선으로 되는 충전용 선풍기가 있어 일단 그것으로 견뎌볼까 싶었습니다. 오늘은 남편과 같이 전우애를 다지기로 해 보았습니다. 영어 공부도 하고 책도 보고 핸드폰도 하다 보니 어느덧 2시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잠깐 나가려던 남편이 "엘리베이터도 정전 됐는데?"라고 하는 거였어요.


우리 둘째가 12시 50분에 학교에서 돌아와 선풍기 바람으로 더위 식히고 학원을 갔는데.... 곧이어 둘째에게도 전화가 왔습니다. "엄마 여기 엘리베이터가 멈춰서 못 올라가요" 아이 학원이 같은 아파트에 위치해 있었는데 거기도 멈춘 거였지요. 약속한 오후 2시가 되었는데도 전원은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곧 학원에서 긴급휴강공지 문자가 왔습니다. 저는 둘째에게 가까운 상가 커피숍으로 오라고 전하고 남편과 함께 계단으로 내려갔습니다. 12층이라 한참을 내려갔습니다. 중2 첫째는 일찌감치 친구 만나러 나가 이런 고생은 면했습니다. 오늘 같은 날 커피숍도 만원이겠지 예상했는데, 역시나 문을 열자 마자 어린아이들을 동반한 어른들로 만석이었고 바로 맞은편 파리**트 매장에 테이블이 몇 개 있어 그쪽으로 향했습니다. 매장에 앉아 마자 곧 거기도 만석이 되었습니다.


음료나 빵을 주문해 놓고 서로 같은 처지라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기도 했습니다. 저는 한 입주민 어르신과 눈이 마주치자 "저 아직 전원 안 들어왔지요?" 하고 여쭈니 "네, 관리사무실 전화해도 안 받는데요" 하셨고 이렇게 서로 기다리며 상황을 공유했습니다.

아마 관리사무실 전화통이 불이 났을 거라 궁금한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일단 기다려 보기로 했습니다. 마음속으로 '땀 흘리며 수리하고 계실 분들이 시간이 지나도 잘 되지 않으니, 그분들도 얼마나 부담이 크시고 힘드실까? 부디 힘내셔서 잘 고쳐 주세요!' 하며 응원할 뿐이었습니다.


빙수를 먹고 아이와 저는 친정으로 가서 기다리기로 했고 남편은 집으로 향해서 전원이 켜지면 연락을 주기로 했습니다. 제일 걱정은 냉장고였습니다. 며칠 전 사둔 생닭과 냉동 샤브샤브용 쇠고기가 제일 걱정이었습니다. 남편은 냉기가 아직 있으니 열어보지만 않으면 된다고 했는데 아까 손을 넣어보니 아직 충분히 시원하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니 초조할 뿐이었습니다.

오후 4시경 드디어 남편으로부터 전원이 켜졌다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고 저희는 집으로 향했습니다.


녹다가 얼기를 반복했을 쇠고기를 먼저 해치우기로 했고 샤브샤브로 백탕과 마라탕을 끓여 아이들과 맛있게 저녁을 먹었습니다. 설거지를 끝내고 샤워를 한 후 에어컨이 시원한 거실에 앉으니, 우리 집이 바로 천국이로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삼스럽게 전기가 이렇게 소중하구나 싶었고, 오늘 밤에는 괜찮겠지? 하는 살짝의 노파심도 들었지만 다행히 그날 밤은 에어컨이 꺼지지 않아 단잠을 잤습니다.

연일 폭염인데 이제 한국도 40도를 육박하는 기온이 이제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고 동남아 놀러 가셨던 분이 한국이 더 덥다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앞으로 이런 기후이상으로 여름에 전기 에너지는 더욱 필요할 예정이고 이런 정전을 겪을 일이 잦아질까 우려도 됩니다.

그래서 그 이후 아무리 덥더라도 에어컨 온도를 아주 낮은 온도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한 23~25도로 시작하여 서서히 낮추거나 높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전부터 실천하고 있었지만 아침에 기상하면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환기하고 에어컨이 좀 쉴 시간도 주고요. 선풍기 바람으로도 오전에는 좀 견딜만하더라고요.

혹시 한쪽에서 갑자기 끌어 쓴 전원이 전체 아파트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예전에 학교에서 아이들 컵라면 파티를 해주려고 커피 포트 2개를 올려놓고 물을 끓였는데 전체 전원이 나간 적이 있습니다. 물론 곧 전원은 들어왔지만요)


앞으로 여러분이 사는 아파트에도 정전이 발생할 수 있고(물론 그런 일이 없길 바랍니다.) 그런 경우 관리 사무실을 탓하기보다 서로 이해하며 힘을 모아 위기를 극복한다면 더 빨리 복구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이번 정전 사태가 끝나고 4시경이 전원이 켜졌을 때 다행히 원망하는 마음보다는 마음 졸였을 관리소 직원들과 수리한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과 함께 박수를 보냈습니다. 다행히 제가 지나 간 어디에서도 불평을 하거나 고성이 오가는 모습을 보지 않아서 불쾌지수는 더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주신 아파트 주민에게도 존경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물론 관리사무소 직원분들은 전화로 많이 시달리셨을 듯합니다. 전화하신 분들도 얼마나 힘드시니 전화를 하셨을까 이해가 됩니다)


*내향인의 소심한 조언 몇 줄 : 기후 위기가 책이나 뉴스에서만이 아닌 피부로 와닿는 요즘입니다. 혹시 우리 집 에어컨이 과도하게 낮은 온도는 아닐까요? 조금 온도를 올려도 쾌적하다면 지구와 에너지 절약을 위해 조금 더 관심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내가 관심 가진 만큼 우리 아이들이 살 세상이 조금 더 편안해지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혹시 정전이 발생했을 때, 관리 사무소를 탓하거나 폭언을 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이 사태를 잘 헤쳐갈까 함께 지혜를 모으면 좋겠습니다. 관리사무소에서도 최선을 다할 테니까요. 그들도 누군가의 아버지고 남편이고 아들이겠지요. 박노해 시인의 시 산빛 중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위대함은 힘이 아니라 품이다" 모두 폭염에 건강관리 잘 하시며 단잠 주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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