랄라의 반성문
고등학교 시절 왜 그랬었는지 연습장 제일 뒷면에 인종·종교·성별에 대한 차별적 내용들을 항목별로 조목조목 적어서는 친구에게 새로운 걸 찾아냈다는 듯이 보여 주던 장면이 떠오른다.
오늘 아침 신문을 보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외교관이며 대통령 후보였던 홍숙자 전외교관을 처음 알게 되었다.
유학 전 한국에서도 집안일하는 어르신들 소란 속에서도 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된다는 아버지의 지원을 등에 업고는 문을 닫아걸고 공부를 하셨단다.
그녀는 1950년대에 중매가 아닌 자유연애로 엘리트와 결혼을 하고는 여자에게만 강요되는 관습에 거부감을 느껴, 불평등을 확인하는 고통일 뿐인 결혼을 4년 만에 일치감치 끝내는 개척자의 삶을 살았단다. 개척자는 왠지 세 보인다.
왜 항상 비슷한 삶을 사는 남자와 달리 여자들은 세다는 말로 표현되어야 하는지 의문이었는데 해답을 찾은 듯이 내 눈을 반짝이게 하는 페이지였다.
늦둥이인 내게 그다지 추억이 많지 않은 내 아버지와 나눈 몇 안 되는 대화가 생각난다.
“넌 에디슨이냐? 머가 그리 궁금한 게 많아서 왜? 왜? 거리는 게냐.”
나는 아직도 맥락 파악이 부족해서 사람들 사이의 공기의 어색한 흐름이나 내가 알아내지 못한 뉘앙스를 주위사람에게 확인받고는 한다.
그래서 이런 활자화된 선례를 보면 정답이라도 찾은 듯이 기쁜 마음이 든다.
“한평생 부부가 참고 끝까지 사는 것은 힘든 일이야, 아이는 나라가 키우고 자유롭게 사랑했으면 좋겠어. 물론 우리나라는 아직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생각이지만.”
마치 나를 지지해 주는 지원군을 만난 느낌이다.
우리 부부는 그냥 90년대를 한국에서 보내며 서로에게 꽂혀 연애를 한 평범한 커플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최근 친구와 다녀온 1박 여행에서, 예쁘장한 그 친구를 포함한 동아리 친구 3명과 당시 남자 친구인 남편의 과 동기들을 내가 미팅을 주선해 주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현역인 내 친구들과는 달리 그 상대방들은 3명 중에 2명이 재수를 하여 나이가 한두 살씩 많은 걸 알고는 그이들이 존댓말을 쓰라고 했었단다. 그 말에 내 친구가 정색을 하며 그럼 나머지 한 명은 빠른 년생이시라 나이가 어리신데 존댓말을 쓰실 거냐고 따지다가 판토가 났었다는 기억도 안 나는 내용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렴풋이 서랍속에서 끄집어 내지듯이 생각났다. 그 당시 나는 결과보고같은 전화를 받으며, 그냥 농담이었겠지 하고 일회성 만남이니 중요하지 않다 생각하며 지나갔었다.
그렇게 회피 성향인 나는 남편이 된 남자 친구의 말을 저런 식으로 따지듯이 새겨듣지 않고는 농담이 될 수 없는 실재 현실이 된 결혼생활 초기에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 보며 치열하게 다투었다.
그렇게 우리는 간신히 마의 결혼 4년 차도 이겨 내고, 살아내며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서로의 기억이 달라 정확히 확인할 방법도 없는데, 무언가 사소한 계기로 서로에게 가라앉았던 앙금이 떠오르는 시기인 결혼 30년 차를 맞이하고는 무너졌다.
카톡에 오고 가는 단어를 듣고는 유튜버들이 마구 달려와서는 강의해 주시는데, 이혼이 제일 많은 시기가 결혼 4년 차고 그다음 두 번째가 30년 차란다.
4년차 의식을 치른 이들이 30년차 결실을 맺는 것일까?
어쩜 이리도 평범한 삶을 지향하려고 발버둥 치다가는 수능에서 아는 연예인 생일을 적었다가 주관식 최고난제를 맞히는 거짓말 같은 우연처럼, 평균에 수렴하는 나의 삶의 궤적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서로의 가치관도 다 확인해서 이해 비슷하게 하고 연애초반 설렘물질인 페닐에틸아민이 뿜어져 나오는 시기 같이는 아닐지라도 가끔 같이 늙어 버린 얼굴이 측은하다는 마음이 들기도 하는 일상을 잘 일구어 나가다가, 억울함마저 삭아서 보이지도 않는데 불쑥 내뱉는 한마디에 그 용암화석이 되어 버린 분노가 휴화산이었다는 듯이 다시 꿈틀거린다.
내놓고 표현했다가는 이 사회에선 집단 따돌림을 당할 것 같아서 그냥 부은 편도선을 통해 침을 삼키듯이 내 세월을 살살 흘려보냈다.
그게 모두가 잘 사는 길인 줄 알고 살아 냈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들의 양육을 마치자마자 휴화산이 터졌다.
“자유와 독립심으로 후회 없이 살았지만, 영혼의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라고 말하는 홍선배님을 위로하고 싶다.
그렇게 살지 않은 난 이제부터 숨겨온 본심을 드러내며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자유와 독립심 없이 적응하지 못하며 살아 낸 줄 알았던 나의 결혼 생활은 양육밖에는 남은 것이 없었더라고...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살거나 죽거나를 동시에 해 보지 못하니 저의 삶을 통해 잘하셨다고 토닥여 드리고 싶다. 나처럼 저분은 그런 위로가 필요하신 분은 아닌 듯해 보이더라도... 그래도 모른다, 사람은 다 알고 보면 센 척 해도 연약하기도 하다.
“개척자가 된다는 것은 저주다. 그러나 그것은 운명이다.” 니체의 말을 되내며 살았다는 말에서 그분이 하는 말의 중량감이 느껴지면서 또한 회한이 살짝 만져지기도 해서다.
나는 운명이 아니라는 듯이 저주받고 싶지 않아서 그 길을 가지 않았다.
여자는 왜 이쁨을 강요당하냐며,
“여자로서 노화? 전혀 안 두려워, 언제 화장할지 모르는 죽음 앞에서 주름 따윈 별거 아냐. 나답게 뜨겁게 살았다면 충분해.”
라고 말을 할 줄 아는 인생 선배가 나타났다. 그분만큼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50이 넘어서며 죽음을 많이 생각하며 사는 나다.
선배님을 따라 이제야 깨닫고 말할 수 있겠다.
내 부모가 아닌 남편 부모를 모시고 살 생각은 꿈에도 없었는데, 오로지 나의 상상력이 빈곤해서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30년 후에도 잘못인 양 말할 사람인 줄 모르고는 그 앞에서 “No!”라고 말하지 않았다.
세상을 꿰뚫는 통찰력을 지니지 못하고는 남편과 같이 살면서 직장을 고집했다.
내가 사는 21세기가 오는 시대는 그래도 되는 줄 착각했다.
미팅 분위기를 해치느니 “어머, 농담도 잘하세요!”하고 어물쩍 넘어가지 그랬냐며 친구의 본질을 저격함을 탓하는 내 성향은 심각하게 내 남편의 인생을 망쳤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내가 그리 큰 잘못도 없는 남편에게 사기결혼을 쳤다.
“평범을 거부하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
사랑은 자유롭게, 원 없이 하라,
행복조차도 좇지 말라, 지금을 살아라,
기도하라,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걸음걸이 자세도 당당하게, 그게 품격이다.”
93세 인생 대선배의 한마디 한마디가 아직 늦지 않았다며 지금 현재 나에게 주옥같이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