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사람의 본능적 관대함
아침에 전철을 탔는데 눈에 보인 빈자리에 잽싸게 젊은 대학생이 앉는다. 그리 혼잡하지 않은 시간대라 옆으로 걸어가니 마주 보고 두 자리가 비어 있다.
나의 촉이 이끄는 대로 오른쪽 남자옆 빈자리에 가서 앉는 순간, 날 뒤따라 오던 왼쪽 빈자리에 앉으려던 젊은 여자분과 다리를 꼬고 앉아 계시던 살짝 더 나이 든 여자분과 실랑이가 벌어졌다. 앉으려던 분이 운동화 귀퉁이를 밟은 모양이다. 사과를 할 새도 없이 밟힌 분이 화를 내니 앉으려던 분이 머라고 한마디 하고는 옆 칸으로 줄행랑을 치신다.
잠깐 자리에 앉자고 불편하게 앉아 가기 싫으셨을 테고 지속적인 관계를 해야 하는 사이도 아니니 당연한 선택이다.
무어라 하신 지는 안 들렸지만 밟힌 분의 대응이 또 한 번 격하게 나온다. 아침 출근길에 운동화를 밟혀서 유쾌하진 않으시겠다 생각이 들면서도 다리를 꼬고 앉아 핸드폰을 치켜든 각도가 왠지 저분도 무결점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분의 상호작용을 보다가 누군가 잘못을 하고 시인을 하고 사과를 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어느 팀들은 소송 전까지도 갈 수 있고, 케미가 좋은 분들은 오히려 아름다운 향기를 맡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향기라는 과한 단어가 쓰인 건 나의 한 경험이 떠올라서다.
8년 전 구축 아파트로 이사를 가서 지하주차장이 없이 실외 마당에 주차를 한 나에게 다음날 아침 7시에 전화가 왔다.
놀라서 내려가 보니 고급스러운 강아지 이탈리안 그레이 하운드를 데리고 30대 후반의 강아지 종과는 대조적으로 체격이 좋으신 여자분이 흥분해서는,
“제 차 지금 막 뽑은 건데 비탈진 곳인데 사이드를 안 걸어 놓으셔서 와서 키스를 했잖아요!” 하신다.
아파트 안에 새벽장이 열리는 날은 주차 공간 5대 정도를 차지하게 되어 전날 미리 확보해 놓는다. 공간 부족으로 안 하던 일련주차를 처음 하면서 그 부분이 경사가 있는지 미처 몰랐던 내가 실수를 한 거였다.
세상에 차종도 그 비싸다는 무적탱크 같은 ‘랜드로버’다
딸과 함께 새벽장에 생선이라도 사려고 같이 나오신 듯 보이는 연극배우 손숙을 꼭 닮은 어머니가 옆에 서 계시다가
"어머, 여기가 경사가 져 있구나. 지구가 자전을 하긴 하는 모양이네... "하시며 접촉면을 들여다보신다.
순간 머쓱해진 딸이 흐지부지해진 틈을 타 나는 순발력을 발휘하여,
”새 차신대 너무 속상하시겠어요. 흠집이라도 났으면... “ 하는데 ,
흠집은 안 난 거 같다며 됐다고 하신다.
올라오며 차가 기울어진 곳서 미끄러지는 게 자전과 관계가 있는 게 맞나 따져 보면서, 저 딸은 아빠를 닮은 거 같네... 덩치며 품성이 엄마 쪽은 아닌 거 같아 하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다.
그날 이후에 그 따님과 그레이하운드가 산책 나가는 모습을 종종 마주했고, 우리 집 강아지 산책길에 만나기도 하며 인사하는 이웃사촌을 만들 수 있었다.
시장 봐오던 길에 커피 한 곽으로 차 흠집값에는 못 미치는 줄 알면서 건네면 반갑게 받아 드신다.
알고 보니 이 따님도 참 유쾌한 학원 강사시다.
우연찮게 출근길에 전철에서 명문을 만나게 된 오늘 아침이었다.
“허름한 옷차림의 그를 여러 차례 보았다. 그는 늘 한결같이 쾌활하고 태평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모든 사람이 이런 상호 신뢰의 비결을 배운다면,
경찰도 법원도 교도소도 돈도 필요 없을 거라고. 필요한 만큼만 대가를 받고 능력이 닿는 한 힘껏 돕는 이 청년처럼 모두가 산다면, 부조리가 반복되어 ‘사회문제’가 되는 우리의 복잡한 경제 시스템도 어쩌면 해결될지 모른다.
위대한 사람들은 거의 항상 매우 친절하다, 그리고 과하게 나서지 않는 사람에게 본능적으로 관대하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인 슈테판 츠바이크. 그가 생의 마지막 순간에 남긴 미공개 에세이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를 통해 ‘걱정 없이 사는 기술’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전철에서 만나고 있던 나는 그 주차사건 후 8년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
오늘 아침 전철에서 일어난 일처럼 불쾌할 수 있었던 그날 아침이 위대한 손숙을 닮은 그분 덕에 관대하게 마무리된 것이었음을...
작가는 안톤이라는 마을의 특별한 인물로 인해 기분 좋아진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이 모든 걸 내어주다니, 참 좋은 사람이야.”
라고 아주 다정하게 말하고는 사라진 남자의 순박한 칭찬 한마디가 작가의 책에 감탄하는 그 어떤 열광적 서평보다 훨씬 기뻤단다.
고마운 마음으로 종종 사소하고 어리석은 돈 걱정이 들 때면 당장 단 하루에 필요한 것 이상을 원하지 않아 늘 여유롭고 태평하게 살 수 있는 그 남자를 떠올리며 산다고 한다.
살면서 누군가 지구가 자전을 하긴 하는구나 하는 말이 적합한 말인지는 따지지 않고, 그저 그 따스한 순간을 기억하며 빙그레 미소 짓는 하루를 선사하는 삶을 지향하던 나에게 결이 맞는 작가를 만난 오늘 아침이 너무 행복하다.
제목만큼이나 내용도 딱 좋은 책을 찾았다.
가만히 반응하며 걱정 없이 사는 삶을 보슬비같은 눈이 곧 흩뿌릴 것 같은 아침 공기 속에서 꿈꿔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