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4일
얼마 전 아침, 회사 사무실에 도착해서 신고 있던 구두를 벗고 실내에서 신는 슬리퍼로 갈아 신으려 하는데, 양말의 오른쪽 엄지발가락 부분이 구멍이 나있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왼쪽과 바꿔 신으니 왼 발의 새끼발가락 쪽으로 옮겨간 구멍은 아주 작아져서 다행히도 일부러 보지 않는 한 티가 나지 않았다. ‘집에 가면 양말 버려야겠구나.’ 생각하다 이 양말을 얼마나 오래 신었나 가늠해 보니 1 년쯤 되었을까? 다른 주인을 만났다면 조금 더 오래갔을 수도 있고 아니면 좀 더 빨리 닳았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이제 이 양말은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다 하게 된 것이다. 평소라면 별 감흥 없이 지나갔을 사소한 일이지만, 그날은 조금 더 양말에 대한 생각이 이어졌다. 뭐, 그렇다고 그날의 양말이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그런 양말은 아니었다. 아내가 인터넷 쇼핑몰에서 적당한 가격을 주고 산 10개 세트에 들어있던 양말일 뿐이다.
최근 들어 가끔, 아니 가끔보다는 좀 더 많이 시간에 대하여 생각하곤 한다. 너무 빨리 지나가는 것 같다는 생각부터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나 남았을까, 좀 더 진지하게는 내가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남았을까? 그 남은 시간 안에 우리 회사가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있을까? 그러다 집에 오면 아이는 어느새 이렇게 커버린 걸까? 때로는 집중하며, 때로는 게으름 피우며 지나온 시간들이 이제는 점점 더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다. 그나마 같은 시간을 보내며 마음고생도 많았을 텐데, 아직 흰머리도 없고 얼굴에 주름도 없는 아내를 보면 시간이 이 사람을 조금 비껴간 것 같아 조금 안도감이 들기도 한다.
이런 생각과 감상에 빠져들게 된 연유를 굳이 찾아보니 몇 가지가 떠오르기는 한다.
웹 서핑을 하다 우연히 보게 된 기사가 하나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별 거 아닌 기사이겠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좀 슬프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며 심하면 상실감이 들 수도 있는 기사였다. 충무로에 있는 “대한극장이 올해 가을에 문을 닫는다”는 기사. 불운인지 행운인지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 쪽이 아니라 ‘어떤’ 사람 쪽에 속하는 쪽의 사람이라 그 기사를 스쳐 읽지 못하고 서너 번 읽고 또 읽었다. 재수생 시절이던 1990 년에 처음 찾아가 보았던 대한 극장-이때는 대형 단관 극장이었다-이 이런저런 세월을 견디고 지금까지 버티어 왔지만, 이제 더 이상은 힘든가 보다. 얼마 전 종로의 시네코아 건물이 헐리는 걸 보며 마음이 좋지 않았는데, 이번엔 대한극장이라니… 세상 모든 일이 다 끝이 있기 마련이지만, 하나의 역사라 할 만한 것들의 끝을 지켜보는 마음은 그리 간단치가 않다.
그러던 차에 “왓챠”에서 애니메이션 한편을 보게 되었다.
일본에서 만들어진 내용이 조금 특이한 판타지 애니메이션이다. 원작 만화가 아직 연재 중이고, 그중 앞 쪽 이야기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다. 주인공의 파티가 대륙을 어지럽히는 마왕을 쓰러뜨렸는데, 그 사건이 주가 아니라 쓰러뜨린 이후의 이야기가 이 작품의 내용이다.
주인공 프리렌은 인간보다 수명이 훨씬 긴 엘프였고, 세월이 흘러 파티의 전우들이 모두 늙어 죽고 난 후에 혼자 남는다. 그 혼자의 삶을 애니메이션은 따라간다. 이야기는 요즘 애니메이션 같지 않게 느릿느릿 진행되는데 다분히 의도적이다. 프리렌의 입장에서는 천천히 흐르는 시간의 유장함을 이야기의 느린 진행으로 표현하는데 상당히 잘 어우러져, 보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프리렌의 마음에 들어가 있게 된다.
프리렌은 마왕을 물리친 일이 자신의 기나긴 인생에서 그저 지나가는 일들 중 하나라 여겼는데, 전우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비로소 그들과 함께 한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결국, 죽은 영혼들이 머문다고 하는 대륙의 북쪽 끝을 향해 길을 떠난다. 그때의 전우들을 다시 만나기 위하여, 그리고 미처 몰랐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서.
길을 떠나며 새로운 파티를 만들게 되는데, 새로운 파티원들은 다름 아닌 옛 파티원들이 키워온 제자들이다. 이들과의 여행을 통해 프리렌은,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받아들이고 세상을 새로이 이해하며 비로소 성장해 나아간다.
당연히 나는 프리렌처럼 수천 년을 살 수 없다. 지금까지 오십몇 년을 살아왔고 아무리 후하게 계산해도 앞으로 오십 년을 더 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겨우 오십몇 년을 살아왔음에도 많은 것을 떠나보냈다. 죽음의 모습으로, 헤어짐으로, 거절하고 거절당해서, 아니면 그저 무심하여. 그럴 때면 슬픔이, 아쉬움이, 상실감이, 후회도, 때로는 분노도, 아주 드물게는 후련함도 따라왔었다.
다시 구멍 난 양말을 바라본다. 프리렌의 인생에서 보면 그저 잠시 스쳐간 한 인간 같은 존재와 다름없는 구멍 난 양말. 그 양말은 구멍이 나고 만 오늘까지 수많은 시간 동안 내 발을 감싸고 보호해 왔을 텐데,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 뒤늦게 깨닫고 뉘우치는 프리렌인 것만 같다.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가치가 있고 아름답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이 맞기도 하지만 정말 맞는 말일까 생각해 볼 때도 있다. 유한, 무한을 떠나서 어떤 인간들은 인간으로서 어떻게 저런 말과 행동을 할까 의문을 가지게 하는 경우들을 심심찮게 보아왔기 때문이다. 사람의 가치는, 어쩌면 사람을 포함한 세상 모든 것의 가치는 그저 그 존재가 가치 있는 모습을 보여줄 때, 그때 바로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닐까. 뒤늦게나마 그 가치를 보여주고, 비로소 그 가치를 내가 알아낸 구멍 난 양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