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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과 인간...오이디푸스왕

2023년 2월 13일

by 행크

한 20 년 전에 봤던 영화 <애널라이즈 디스 (Analyse This)>가 생각났다.

로버트 드 니로가 마피아 보스로 나오는 영화인데 이 말만 들으면 묵직한 누아르 필름일 것 같지만 의외로 소소한 웃음이 이어지는 코미디로, 신경쇠약에 걸린 마피아 보스가 거의 납치되다시피 끌려온 정신과 의사(빌리 크리스탈)와 상담을 하는 것이 주 내용인 영화이다. 재치와 유머가 담긴 대사가 가득한 재미있는 영화였는데, 그중에 아직도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보스와 의사가 상담을 하고 있는데, 의사가 보스에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가방끈이 짧은 보스는 그게 뭐냐고 묻고, 의사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을 하고 어쩌고 저쩌고…’ 설명을 하자 보스는 아주 역겨운 표정을 지으며 “이런 변태 같으니! 어떻게 어머니를… 배운 사람들은 다 그래요?” 하는 장면인데, 드니로의 표정 연기는 지금도 기억날 정도로 압권이었다. 그렇게 오이디푸스는 졸지에 웬만한 일은 눈도 끔뻑하지 않는 마피아 보스마저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변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많이 배운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널리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그리스 신화를 온전히 읽지는 않더라도, 여러 매체를 통해서 그리고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알만큼은 알고 있는 옛이야기인 것이다. 마치 우리가 심청전이나 춘향전을 책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는 않아도 대략적인 이야기를 다 알고 있듯이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도 그런 편인데, 거기에 ‘콤플렉스’가 덧붙여져 -프로이트가 처음 붙여줬다- 지금은 복잡한 인간 심리의 상징처럼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마피아 보스처럼 그런 심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변태”라는 오명도 함께 덧씌워져 있다.


하지만 오이디푸스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비극적인 예언의 희생양이 되어 친부모에게서 버려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을 피하기 위하여 발버둥 치지만, 그 노력 때문에 오히려 예언의 실현에 가까이 다가서게 되는 아이러니의 주인공이자 인간 비극의 총아인 것이다. 그런데 “변태”라니... 만약 지금 21 세기 어느 거리에서 오이디푸스가 프로이트를 만난다면 명예 훼손으로 소송을 거는 것은 물론이고, 말보다는 주먹으로 프로이트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을지도 모른다.


프로이트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을 것이다. 누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차지하고 싶겠는가? 그럼에도 오이디푸스라는 인물을 만들어 온갖 불행을 끼얹은 후, 그의 운명을 지켜보며 몇 천년동안 즐겨온 인간들의 마음이 궁금하지 않은가? 신화 속에서는 올림푸스에 사는 짓궂은 신들 때문에 오이디푸스가 불행을 겪지만 그 신들을 만들어낸 것은 결국 인간들이고, 그 신들의 행위와 마음은 바로 인간 심리의 집단적인 원형에 닿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항상 진심이 전달될 수 있다면 세상에 오해가 왜 생기고 싸움이 왜 날까. 프로이트의 의도와는 달리, ’ 오이디푸스’와 ‘콤플렉스’라는 단어의 만남은 다양한 이야깃거리와 함께 어떤 오해들을 만들어 냈으니, 후대의 사람들이 오이디푸스 이야기가 갖는 풍부한 의미들 중 어떤 것들은 보지 못하고 지나쳐 버리게 만든 것이다. 오이디푸스 이야기에는 프로이트의 이론처럼 복잡다단한 인간 심리도 담겨 있지만,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을 수 있는 많은 드라마가 담겨 있는데, 누구나 한 번쯤은 겪을 수 있는 그런 일들을 신화와 문학 작품을 통해 미리 경험하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상당히 차단해 버렸다는 것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오이디푸스’라는 단어를 들으면 원전을 읽어볼 생각은 하지 못한 채, 어쩔 수 없이 ‘콤플렉스’와 ‘프로이트’와 ‘리비도’ 같은 단어를 -가방끈이 긴 사람들은 더더욱- 먼저 떠올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프로이트의 의도치 않은 잘못인 것이다.


나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통해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알게 되었고 그게 다라고 생각하고 살다가 최근에야 인간 오이디푸스와 그가 겪은 비현실적인 비극에 관심이 생겼다.


그러면서 읽게 된 책이 바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다.


고대 그리스 희곡의 전통에 따라 단 하루에 일어나는 일을 담아낸 작품인데, 그 하루가 바로 오이디푸스왕이 자신의 모든 것에 대하여 알게 되는, 그리고 가장 고귀한 자에서 가장 추악한 자로 추락하는 날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 내용은 잘 알려져 있으니 여기서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고, 이 작품의 매력적인 점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정말 흥미진진하게 재구성했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왕이 선왕을 죽이고 나라의 재앙을 몰고 온 범인을 잡고 말겠다고 맹세하며 극은 시작된다. 그리고 진실을 알고 있는 인물들이 하나씩 등장하며 대화가 이어지는 가운데 서서히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고 자신의 출생의 비밀과 결국에 이 모든 비극의 원흉이 자신임을 알게 되는데, 극 처음에 했던 맹세를 이행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극적인 순간에 그는 주저 없이 자신의 눈을 찔러 확실하게 맹세를 지키며 막은 내린다. 한 나라의 존경받는 왕에서 가장 큰 죄를 저지른 죄인이 되는 과정은 읽는 내내 긴장감이 흐르고 박진감이 넘쳐서 현대에 쓰인 작품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작품을 읽는 내내 오이디푸스가 자신에게 밀려드는 비극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감당할까 궁금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는데, 신화 속 여느 영웅들과는 다르게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에 정말 깊이 공감하며 연민을 느꼈다. 극의 중반을 넘어가면서 마음속으로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자신이 찾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임을 느끼면서도 제발 그 예감이 틀리기를 바라는 그의 마음은 나약한 한낱 인간의 모습이 아닌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오이디푸스만큼은 아니지만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그러나 결국은 일어날 거란 걸 알고 있는 그런 경험들이 몇 번씩은 있지 않은가. 그때의 서글프고 힘겨웠던 감정들이 지금 오이디푸스가 무너져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다시금 새록새록 떠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인생의 가장 바닥에 닿는 그 순간에 가장 고귀했던 자로서 마지막 빛을 뿜어낸다. 왕으로서 범인에게 내리기로 한 형벌을, 이제 범인이 된 자신에게 다른 이의 손에 맡기지 않고, 한 순간도 주저하지 않고 내림으로써, 자신의 존엄성을 지켜낸 것이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하나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삶의 비극들을 연이어 마주하면서 자신의 운명을 탄식하지만 그것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올림푸스에 사는 그 신들의 잔인한 장난에 굴복하여 무릎 꿇고 자비를 구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그대로 받아내고 말았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진정한 고귀함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고, 이제 더 이상 아무도 그를 비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게 그는 사람들 마음에 또 다른 형태의 ‘신화 속 영웅’으로 남게 되었다.


이렇게 우리는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통해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비극에 대해, 그리고 그 비극을 대면하는 인간의 모습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콤플렉스 덩어리인 ‘변태’ 오이디푸스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낸 ‘고귀’한 오이디푸스에 대해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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