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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가는 한 시대...표현의 기술

2022년 11월 7일

by 행크

지난 3월 9일 있었던 대통령 선거 개표 방송을 유튜브로 보고 있었는데, 진행자가 옆에 앉아 있는 패널 한 명에게 농담 삼아했던 말이 떠오른다. “ㅇㅇㅇ 씨는 이번 선거에서 누구를 찍을지 언제 결정하셨나요? 저요? 저는 아마도 태어날 때 이미 정했던 것 같습니다, 하하.” 자신의 정치적 성향은 아주 어릴 때 정해져 있었다는 말일 것이다. 나는 누구를 찍을지 언제 정했을까? 아니, 지금 나의 정치적 성향은 언제 결정이 된 것일까?


형은 나와 세 살 터울이라 내가 고등학교를 입학할 때 대학에 들어갔고 서울로 떠났다. 그리고 여름 방학이 되자 집으로 내려왔는데, 오면서 서울에서 읽던 책들을 제법 많이 가지고 왔다. 그 책들은 형이 쓰던 방과 내 방에 있는 허름한 책꽂이 여기저기에 자리를 잡게 되었는데 방학이 끝나고 형이 서울로 돌아가면서 대부분은 그대로 놔두고 갔고 형 방까지 내가 쓰던 상황이어서 그 책들은 사실상 내 차지가 되었다. 심심할 때 한 번씩 그 책들을 들추어 보곤 했는데 대부분이 ‘좌경 불온서적’들이라 -형은 87 학번이다- 17 살 고등학생에게는 별 관심을 끌지 못하던 차에 눈길을 좀 끄는 책이 한 권 있었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


다른 좌경 불온서적과는 달리 제법 읽기 쉽게 쓰여있는 데다, 무엇보다 그 내용이 매우 흥미롭고 재미가 있어 2-3 일 만에 다 읽어 내었다. 이제는 널리 알려진 내용들이지만, 당시만 해도 잘 모르기도 하고 알려지더라도 정반대로 왜곡되어 알려져 있던 역사 속 사실들을 정의와 피해자의 입장에서 새로이 서술한 책이었다. 삼십몇 년이 지난 지금 그 책의 내용은 거의 잊었지만 아직도 내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세상을 바라볼 때 어떤 시각이 가지고 바라보아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때 이후로 세상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고 좀 더 분명한 모습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시각, 그 느낌은 그대로 이어져 지금의 나를 만드는데 중요한 부분이 되어 나는 죽을 때까지(아마도) 어떤 특정 정당에 투표할 일은 없는 그런 사람이 되어 있다. 그 책의 저자는 다름 아닌 ‘유시민’씨인데 그 뒤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 되었고 아직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런데 그때의 나처럼, 그 책을 읽고 세상을 보는 눈이 열렸다고 고백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저 사람은 천재 아닐까?’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던 몇 안 되는 인물인 만화가 ‘정훈이’씨이다. 그리고 그 ‘정훈이’가 또 바로 그 ‘유시민’과 같이 쓰고 그린 책이 있다.


유시민, 정훈이의 <표현의 기술>


사실 이 책은 나온 지 좀 된 책이고, 처음 나왔을 때 한번 들추어 본 후 ‘나중에 봐야지.’하고 책장에 꽂아 넣은 후 잊고 있던 책이다. 이 책을 비로소 꺼내 읽게 된 것은 얼마 전 ‘정훈이’ 만화가가 병으로 아직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나의 20 대, 좀 더 범위를 넓혀서 10 대와 30 대까지의 기억을 들추다 보면 깊이 남아 있는 기억들 가운데에는 책이나 영화도 제법 끼어있는데, 그중에서 정훈이 작가는 영화와 만화가 겹쳐 떠오르는 그런 사람이다. 영화 잡지 <시네21>에 연재되던 그의 만화는 항상 인기였고, 잡지를 사면 기사는 나중으로 미루더라도 그의 만화부터 읽곤 했다. 볼 때마다 한 두 컷의 그림이나 대사는 정말 인상적이어서, 매주마다 이런 만화를 그려내는 그 재능에 수없이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오죽했으면 그림 그리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내가 그의 그림체를 따라 그림을 그려보았을까?


다시 책으로 돌아와서, 이 책의 대부분은 유시민 씨의 글로 채워져 있고, 그 내용도 만화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냥 좋은 글을 쓰는 법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작가 특유의 편안하면서도 간결한, 그리고 명확한 표현은 마치 책의 제목을 그대로 대변하는 것 같다.

글을 쓴다고 하면 보통은 글 쓰는 일 자체가 직업인 작가가 떠오르긴 하지만, 전문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그 일의 대부분이 글을 쓰는 일인 경우가 많다. 나만 해도 학교를 나와서 직업을 가지고 일을 해왔던 기억을 떠올려보면 그 글들이 대부분 건조한 글이어서 그렇지, 어쨌든 아주 많은 글을 써왔다. 여러 논문부터 시작하여 특허 명세서, 사업 계획서, 결과 보고서 등등 남에게 읽히는 것을 전제로 하는 글들을 수없이 써왔던 것이다. 그 글들은 때로 새로운 과학적 발견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도 하고, 상상한 아이디어를 그럴듯하게 묘사하기도 하며, 큰돈을 벌 수 있다며 사람들을 설득하기도 해야 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잠시 생업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지내는 지금, 이 책을 읽다 보니 그렇게 머리를 쥐어짜 내어 글을 쓰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한편으로는 유시민 씨의 글과는 많이 다른, 하지만 훨씬 강력한 힘으로 읽는 이 혹은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바로 정훈이의 만화이다. 세련된 그림체도 아니고 치밀한 서사도 없다. 그저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들이 주고받는 더더욱 우스꽝스러운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는 감탄과 ‘나는 왜 이런 생각을 못하지?’ 하는 탄식을 동시에 자아낸다. 어쩌면 나와 한 살 차이 동년배라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랬는데, 그 사람이 병으로 그만 세상을 떴다는 소식에 여러 가지 감정이 머리인지 가슴인지를 휑하고 쓸고 지나간다. 한 시대를 수놓으며 사람들의 사랑과 부러움을 받고 동시에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었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청춘의 순간을 잠시 눈앞에 펼쳐 보였다가 휙 휘감고 떠나버리는 그런 꿈을 꾸는 기분이 든다.


이제 몸은 여기저기 고장이 나기 시작해 하루에만 10 알씩 알약을 삼켜야 하는 처지가 되었지만 마음만은 아직 그때 거기에 머물고 있는데, 거기에서 그때를 채워주었던 누군가의 떠남은 유난히 시리게 다가온다. 떠나간 그곳에서는 부디 즐거움만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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