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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전하지 못한...헤어질 결심

2022년 7월 11일

by 행크

일을 제외하고 인생에서 많은 시간을 할애해 온 것들을 헤아려 보면, 그중 영화 보기는 세 손가락 안에 꼽힐 만하다. 정말 ‘아주’ 어릴 때부터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아주’ 많은 영화를 봐 왔다. 극장에 가서 처음 본 영화가 무엇일까 기억을 더듬더듬해보니 <로보트 태권 V>와 <엄마 없는 하늘 아래>를 극장에서 보았다는 기억은 있는데, 그 순서가 불분명해서 조금 전에 구글링 해보았다. 그랬더니 <로보트 태권 V>가 1 년 먼저 개봉한 것으로 보아 나의 첫 극장 영화는 <로보트 태권 V>로 확정. 그렇게 나의 첫 극장 방문은 1976 년의 일이었다.


그 이후로 40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극장에서 또 TV에서 수백 편의 영화를 보았는데, 중고등학생 때는 변변치 않던 용돈의 대부분을 극장에 털어 넣었던 것 같고 대학원생 시절 만난 아내도 나보다 더한 영화광이라 연애 시기나 결혼 후에도 영화 보는 횟수가 이전에 비해 늘면 늘었지 줄지는 않았다. 아이가 태어나고 잠시 극장 방문이 소강상태인 적이 있었지만, 아이가 6 살이 되어 글 읽기가 익숙해진 이후부터는 부산 국제 영화제 방문이 우리 가족의 연례행사가 되었다. 코로나 19로 사실상 개최하지 못한 2020 년 한 해 빼고는 계속 방문하고 있고, 올해도 이미 숙소 예약을 해 두고 무사히 개최하기 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영화를 많이 보다 보면 당연히 보고 나서 잊어버리는 영화도 있기 마련인데, 제목은 기억나지만 내용은 잊은 영화는 부지기 수이고 아예 보았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영화도 여럿 생긴다. 보지 않은 영화라 생각해 찾아서 한참을 보다가 ‘아, 이 영화 봤었네…’ 하는 경우도 나에겐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반면에 긴 시간과 나의 건망증이라는 장벽을 넘어서 마음속 깊이 남아있다가 불쑥불쑥 현재로 소환되는 영화도 제법 있다.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다가, 혹은 사람들과 대화하던 중에, 심지어는 어떤 영화를 보던 중에도 떠오르는 영화들이 있다. 그런 영화는 보고 난 후에 생각과 감정이 그 영화에만 머무르지 않고 마음속으로 깊고 넓게 번지고 스며드는 경험을 하게 해 주는데, 오랜만에 그런 경험을 주는 영화를 보았다.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


지금까지 나온 박찬욱 감독의 영화들 가운데 가장 촌스러운 제목과는 달리 영화는 그의 영화들 중 가장 세련된, 최고의 장인이 최선을 다해 세공한 보석 같은 영화이다. 여러 이야기와 의미가 중첩된 시나리오는 칸느에서 감독상을 안 받았다면 각본상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이 들 정도로 좋았고 -칸느는 한 영화에 상을 여러 개 주는 경우가 드물다- 영화 속 캐릭터의 매력은 배우 자체의 매력과 만나 아주 훌륭한 상승효과를 일으킨다. 그 배역에 다른 배우를 상상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두 주인공 배우를 미리 정하고 썼다더니 그 완성도가 과연 대단했다.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사건을 맡은 해준이 희생자의 부인인 서래를 만나면서 영화는 시작되는데 영화는 해준의 시점에서 서래의 행적을 쫓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이렇게 하나씩 밝혀지는 서래의 행적이 사실상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기둥’들’이다. 표면적으로는 살인 사건의 용의자이기 때문에 살인과 관련되어 서래와 해준이 주고받는 진실과 거짓의 공방이 영화의 긴장을 유지하는 1차적인 기둥이라면, 그 살인 사건 이전 그리고 이후의 서래의 행적은 영화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진짜 기둥이다.


중국에 살던 서래가 한국에 오게 된 것은 엄마의 유언을 따라서인데, 항일 독립투사였던 외할아버지 집안의 선산을 찾아 엄마의 뼛가루를 그곳에 뿌리기 위해서이다. 문제는 서래가 불치병으로 죽음만 기다리는 엄마의 부탁으로 엄마를 죽인다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서래의 불행과 한국행의 동기를 설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후반부에 또 다른 이야기를 완성하는데 다시 사용된다. 동시에 서래의 이 에피소드는 관객이 쉽사리 서래에 감정이입이 되지 않게 한다. 어쨌든 한번 살인을 저지른 인물은 무슨 일을 더 저지를지 모른다는 생각이 서래에 대한 심리적인 거리를 만드는 것이다. 서래가 앞으로 욕망에 따라 행동을 하든, 좀 더 숭고한 행동을 하든 그 진심을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뒤 이어 서래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해준을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고 관객은 급기야 극 중의 해준보다 더 서래의 의도를 의심하게 된다.


서래의 진심은 영화의 마지막에서야 비로소 밝혀지는데, 이제 관객은 그 의심을 거두고 서래에게 사과하고 싶지만 서래는 영원히 떠났고 미안한 마음을 전할 길은 없어져 버렸다. 마지막 장면의 붉은 노을은 곧 밤이 올 것을 알리며, 밀물까지 밀려드는 바닷가에서 서래를 찾아 헤매는 해준의 모습은 끝까지 서래에 대한 판단을 미루었던 바로 그 관객의 망연한 모습이다.


왜 서래를 믿지 못했을까? 서래는 그저 좋은 남자를 알게 되었고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되어 그의 마음을, 그의 ‘심장’을 가지고 싶었던 것뿐인데. 모국어를 달리 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사랑은 온전히 전해지지 못하고 미묘하게 삐걱거리며, 주변인들의 죽음과 맞물려 결국 비극을 낳는다. 이 영화가 비극인 이유는 단지 여러 사람이 죽어 나갔기 때문이 아니라, 이루지 못할 사랑의 고통 때문에 서래는 죽음으로써 해준이나마 고통에서 구원하려 하지만 해준은 거기서 결코 구원을 찾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래가 자신의 사랑을 찾아가고 주어진 현실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그 사랑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것이 이 이 영화의 진짜 기둥이다.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영화는 너무나 많고 그중에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기억이 나는 영화도 꽤 있지만, 이렇게 생각지 못한 사랑을 이야기하고 그 사랑에 대하여 물어오는 영화는 흔하지 않다. 이 영화를 보는 동안 그러한 영화들이 떠올랐었고, 언젠가 또 운 좋게 극장에서 잘 만든 사랑에 대한 영화를 보게 된다면 그때 떠올릴 ‘그러한’ 영화들의 마지막에는 <헤어질 결심>이 떠오르게 될 것을 예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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