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8일
어릴 때 학교에서 배웠던 것들 중에 시간이 지나면서 오류임을 알게 된 것들이 좀 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과학 시간에 배운 “맛을 느끼는 혀의 부위”이다. 학교에서 배운 것은, 사람이 느끼는 맛의 종류는 ‘단맛’, ‘짠맛’, ‘신맛’, ‘쓴맛’ 네 가지가 있고 이 네 가지 맛을 느끼는 혀의 부위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었다. 신기하게 느꼈던 나는 집에서 설탕과 소금 - 신맛과 쓴맛을 내는 재료는 어디서 구할지 그때는 몰랐다- 을 가지고 내 혀로 실험도 해보았는데, 배운 것과 달리 단맛이나 짠맛이나 혀의 아무 부위에서 다 느껴져서 당황했었고 심지어 내 혀가 이상한 것을 아닐까 심각해지기도 했었다. 다음날, 찬구들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별 짓을 다 하네, 라면이나 먹으러 가자.” 하는 시큰둥한 반응만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되고서야 “혀는 모든 맛을 혀 전체로 느낀다”는 것이 밝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덧붙여 위의 네 가지 맛에 ‘감칠맛’도 더해져 다섯 가지 맛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도 ‘혀가 느끼는 맛의 부위’의 변화 같은 것은 과학 분야에서는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일이니 그럴 수 있다 치지만, 다른 과목, 특히 국어나 영어같이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는 과목에서도 잘못 배운 것들이 있어서 어른이 되어 그 오류를 알게 되면 살짝 낭패감도 들고, 그때의 선생님들에게 뒤늦은 실망도 하게 된다.
영어에서 잘못 배웠던 것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영어는 존대어가 없다’였다. 나이와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서로 반말을 쓴다고 배웠었는데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되는 것이, 어떤 언어를 쓰는 문화권이든 우리말에서처럼 엄밀하고 체계적인 존대법은 아니더라도 그 나름의 문화와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존중과 겸손의 표현이 있기 마련이다. 당장에 “Sir”라는 단어가 있지 않은가? 게다가 영어의 경우에는 우리말처럼 규칙이 엄격하지 않아, 그 언어를 적절히 사용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더 복잡하고 미묘한 표현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국어에서의 오류는 조금 더 복잡하다.
지금도 그렇게 가르치겠지만, 수필이라는 문학 장르를 정의할 때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고 자유롭게 쓰는 산문 문학”이라 배웠었다. 이 경우는 틀렸다고 하기보다는 제대로 다 알려주지 않았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수필을 쓰려할 때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아도 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써도 좋다는 뜻은 아닌데, 어떻게 쓰는 것이 좋은지는 알려주지를 않았었다. 그 뒤 대학 입학시험에 논술이 생긴 후에야 논술이나 작문 수업에서 선생님들이 어느 정도 정형화된 틀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틀이라는 것이 좋은 글을 쓰는 방법이라기보다는 튀지 않는 글을 쓰는 방법에 가깝다 보니, 쓰는 이의 개성이 드러나기 힘들어 수필이 갖는 문학으로서의 가치가 퇴색되어 버린다. 그렇다고 정말 되는대로 썼다가는 읽는 사람들 입장에서 재미있고 없고 이전에 읽는 것 자체가 고역이 되기도 한다. 그나마 되는대로 써도 되는 글은 나만 보는 “일기”밖에 없는데, 일기조차도 미래의 내가 읽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냥 되는대로 쓸 수도 없다. 내일의 나, 일 년 후의 나, 혹은 10 년 후의 나에게 핀잔을 듣지 않으려면, 일기를 쓸 때조차 독자가 있는 것처럼 쓰는 경우가 더 많아진다.
이렇게 장황하게 글을 이어온 이유는 글쓰기에 대한 글을 쓰려함인데, 사람들이 책을 오래 많이 읽다 보면 공통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생각이 ‘나도 한번 글을 써볼까?’ 일 것이다. 그리고 써보고 싶은 글은 대개 ‘나의 이야기’, ‘가족의 이야기’, ‘친구의 이야기’, 또 ‘누군가, 무언가의 이야기’로 시작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수필-에세이-이다. 하지만 학생 시절 국어 시간에 스쳐가듯 배운 수필의 정의와 작문 시간에 써봤던 몇 편의 글의 경험으로는 의욕과 달리 한 줄의 글을 시작하기도 힘들다. 그래도 생각을 쥐어짜며 글을 써보지만, 쓰다가 다시 읽어보면 별로 길지도 않은 글이 우왕좌왕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처음에는 쓰다 보면 멋들어진 표현과 근사한 문장이 술술 나올 줄 알았는데, 정작 처음의 생각을 이어가기도 쉽지가 않다. 결국, ‘내 주제에 무슨 글은… 사놓은 책 읽을 시간도 모자란데…’ 하며 컴퓨터의 워드 프로그램을 닫아버리거나 새로 산 노트를 덮어버리고 만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은 바다 건너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지, 이를 지켜보던 미국의 어느 글쓰기의 고수가 에세이의 비법 두세 가지를 누설하는 책을 썼다.
우리가 쓰려고 하는 에세이의 소재나 형식은 당연히 제한받지 않지만, 쓰기 시작하면 좋은 에세이가 될 수 있도록 지켜야 할 원칙들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우선, 책 제목 그대로 어떤 “상황”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황”이란 것은 글의 시간적인 또는 공간적인 배경을 말하는데,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의 계기가 된다거나 이야기의 흐름에 중요한 영향을 줄 수 있으면 좋다고 한다. “이야기”는 주어진 상황 안에서 인물이든, 사물이든, 사건이든 그 무엇에 대한 글자 그대로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전개와 성장은 상황과 밀접하게 맞물려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가장 중요한 것은 “페르소나”라는 개념이다. 우리는 아주 자연스러워 평소에 의식하지 못하지만,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가정에서, 직장과 학교에서, 연인이나 친구 사이에서 그 순간순간 주어진 책임과 역할을 다하기 위하여 적절한 얼굴을 드러낸다. 그러다 보면 집에서 아이를 대할 때 내 모습과 직장에서 직원들을 대할 때의 내 모습은 정말 다른 사람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본질은 한 사람이지만 다양한 캐릭터들이 내 안에 있고 상황에 맞추어 적당한 얼굴을 꺼내 들게 되는데, 이 적당한 얼굴 하나하나가 ‘페르소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고닉은 이 ‘페르소나’를 적극 활용할 것을 권장한다. 하나의 주제에 대하여 글을 쓸 때, 그 주제를 위해 가장 적절한 페르소나를 정하여 그 페르소나가 글을 쓰게 하는 것이다. 한 여자의 남편도 나의 모습이고 한 아이의 아빠도 나의 모습이며 한 회사의 관리자도 나의 모습이지만, 어떤 주제의 글을 쓰려할 때 어느 얼굴을 가진 페르소나가 그 글을 가장 잘 이끌어 갈 것인가를 정하고 끝까지 밀고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생각해 보면 소설에서 시점이 중간에 바뀌어 버리거나, 화자가 서술하는 톤을 바꾸어 버리면 독자는 당황하게 된다. 물론, 의도적으로 화자를 계속 바꾸거나 모호하게 쓰인 소설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독자들도 금방 알아채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으며, 대체적으로는 일관되게 진행된다. 에세이에서는 이 부분에 대하여 소설처럼 엄격하지는 않지만, 좋은 글을 쓰고 싶고 어딘가에 있는 독자가 내 글을 끝까지 읽기 원한다면 지키는 게 좋은 원칙인 것이다.
고닉은 위의 원칙을 가지고 많은 예시-다른 작가들의 좋고 나쁜 작품들-들을 통해 에세이와 회고록이 어떻게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을지 이야기하는데, 예시로 언급한 작품들을 일부나마 맛볼 수 있는 것도 이 책의 큰 매력이다. 그리고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고닉의 잘 다져진 문장이다. 고닉의 문장은 그 자체로 읽는 즐거움을 주며, 그가 이 경지에 이르기 위하여 얼마나 글을 쓰고 갈고닦았을지 상상해 보게 만든다. 결코 어렵지 않으면서도 힘 있고 함축적인 문장들, 끝까지 논조를 유지하는 방식은 자신이 이 책에서 강조하는 좋은 에세이의 원칙을 스스로가 잘 보여주고 있다.
많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그의 글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온라인 서점에서 그의 다른 책들을 검색해서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장바구니에 우선 담아보고 있다. 적어도 그의 책 두어 권은 더 읽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