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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적 인간...교양

2022년 8월 29일

by 행크

어떤 책이 한 권 있다. 700 페이지가 넘는 아주 두꺼운 책이다. 그런데 그 책을 펼쳐 들었더니 저자가 자신이 공들여 잔뜩 써놓은 한 부분을 읽을 필요가 없단다. 심지어 그 책의 가장 앞부분인데 말이다. 그것도 조금 당황스러운데 그 책에 추천사를 쓴 추천인은 이 책의 전반부인 1부가 읽기 힘들다면 굳이 읽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후반부에 해당하는 2부만 읽어도 충분히 좋다고 한다. 그런 책이 있다.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교양>


읽지 말라고 하니 살짝 좀 무시당하는-읽어봐야 니들이 알겠냐 하는- 느낌도 들고 무슨 내용이길래 그러나 궁금하기도 해서 처음부터 자세를 가다듬고 읽기 시작했다. 음, 다섯 페이지를 채 읽기 전에 저자가 왜 읽지 말라고 한지 알겠다. 저자의 나라인 독일의 교육 체계에 대한 논문 수준의 분석 보고서였다. 이런 내용을 왜 <교양>이라는 책에, 그것도 뒷부분에 부록이 아니라 책의 제일 앞에 첨부하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저자가 그 글을 누군가는 꼭 읽기를 바란 모양이다. 자, 이렇게 저자가 읽지 않아도 된다고 한 부분은 해결했고, 이제 추천인이 안 읽어도 된다는 1부를 해결해 보자.


1부를 펼쳐서 읽어 보니 유럽에서 교양인 혹은 지식인 행세를 하려면 알아야 할 유럽의 역사, 문학, 미술, 음악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독일의 영문학자가 쓴 책이다 보니 유럽이라는 지역 안의 이야기에 집중되어 있으며 아주 많은 페이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다루는 주제들을 고려하면 오히려 간략하게 쓴 편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방대한 주제를 간략하게 쓰다 보니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오히려 더 난해한 면도 있다. 전 후 사정의 충분한 설명 없이 빠르게 흘러가는 이야기를 모두 따라잡기는 사실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중간중간 이야기가 도약하는 부분에서 빈자리를 메우는, 작가의 통찰력이 베여있는 절묘한 문장들은 간간이 감탄이 나와서 나도 모르게 꼼꼼히 읽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트로이 전쟁이 끝난 뒤의 이야기인데, 트로이 쪽 생존자인 아이네이아스가 가족을 이끌고 탈출하여 먼 훗날 로마 건국의 시조가 되는 이야기이다. 한 페이지가 안 되는 아주 짧은 분량이지만, 유럽이 신화의 시대에서 역사의 시대로 넘어가는 순간을 포착해 명료하면서도 아름답게 서술한 이 부분만으로도 1부는 끝까지 참으며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한편 1부를 읽다 보면 이 책이 갖는 아이러니가 드러나는데, 어떤 한 사람이 교양을 쌓고 싶어서 이 책을 펼쳐 들고 읽기 시작하지만 정작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이미 어느 정도 -사실은 아주 많이- 교양을 쌓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확실히 교양인이 되려면 이 정도의 지식은 알고 소화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교양을 쌓기 위하여 <교양>이라는 책을 빼어 들었는데, 정작 이 책은 이미 교양인의 레벨에 오른 사람들의 등급 테스트를 하는 것 같은 책이라니, 우리는 어쩌란 말인가! 이 책의 내용도 사실은 유럽에 한정된 이야기일 뿐인, 인류 문명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의 추천인이 정 읽기 힘들다면 1부도 읽지 말고 넘기라고 한 모양이다. 그래도 1 부를 꾸역꾸역 다 읽기는 했는데 한참을 지나 생각해 보니 이 책의 1 부는 새로이 교양을 쌓으려는 독자들을 위한 내용이라기보다는 이미 제법 알만큼 아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아니면 알고 있다가 잊어버린 것 없는지 확인해 보는데 유용한 내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 부와의 힘겨운 싸움을 패배-축구 경기로 치면 5:0 정도-로 마무리하고 2부로 접어들자 새로운 세상으로 접어드는 느낌이 확 찾아왔다. 2부에서는 교양인이 되기 위한 지식과 통찰력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교양 자체가 어떤 것인지, 교양인들의 실제 모습이 어떤지, 교양인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스킬은 어떤 것이 있는지에 대하여 위트와 풍자를 곁들여 아주 흥미롭게 서술하고 있다. 마침내 교양인으로 살아보는 게 어떤 즐거움이 있는지도 알려 준다. 1 부를 읽을 때의 심정은 마치 무협지에서 고수가 되기 위하여 온갖 힘든 훈련과 수련을 견디는 것과 같았다면, 2부는 강호에 출도 하여 다른 고수를 상대할 때 유용한 스킬들을 알려주는 느낌이라고 할까. 이제야 이 책의 추천인이 1부를 건너뛰고 2부만 읽어도 좋다고 한 의미를 이해했다.


학생 시절,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들에 대한 책을 들추어 보다가 ‘뭐, 저런 인간들이 다 있지?’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화가이고 조각가이면서 -여기까진 좋다 치자- 과학자이고 건축가인데 당시 역사와 문화도 꿰뚫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천재들 중에서도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내공을 한 갑자는 쌓은 듯한 강호의 절정 고수를 보는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이들을 묶어서 르네상스적 인간, 전인적 인간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 ‘전인적 인간’이라는 말에 마음이 까닭 없이 끌려서 나도 그런 전인적 인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생각했었다. 그리고 아주 게으르고 방향성 없이 긴 시간 속에서 그 길을 헤매며 걸어왔던 것 같다. 역사 속 그 인물들처럼 거의 모든 분야의 최고 전문가가 되기에는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가 너무 멀리 가버려, 단 한 분야에서조차 전문가 행세 하기도 녹록지 않지만, 그 대신 이 시대는 교양인이 되어 여러 분야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즐기며 통찰력을 자랑할 기회는 남아 있다. 그런 전인적 인간이 되는 것이, 그리고 그 과정을 흐느적흐느적 걸어가는 것이 나의 인생 즐거움이 되어 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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