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28일
살면서 돌아보면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느끼는 순간들이 있는데, 그 처음은 “군인 아저씨”가 더 이상 “아저씨”가 아니라는 걸 체감할 때였다. 애초에 대부분의 군인들은 아저씨가 아니지만, 어린 시절 초등학생(국민학생)들을 곤혹스럽게 했던 위문편지 시간 이후로 한동안 군인들은 모두 “아저씨”가 되었었다. 그러다 한 10 년이 지나 스무 살 대학생이 되고 보니 그들은 아저씨가 아니라 내 친구들이고 선후배들이 아닌가? 아직도 소년의 흔적이 남아있는, 초등학생들 입장에서도 ‘아저씨’ 라기보다는 ‘형’이거나 ‘오빠’ 들이었고, 20대 중반에 들어서자 그들은 대부분 동생들이 되었다.
그러다 또 10 년이 지나 30대에 들어섰다. 사회인이 되고 심지어 결혼도 했지만 마음만은 20대에서 몇 발짝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데, TV에서 경기를 휘어잡는 스포츠 스타들이 죄다 나보다 어리다는 걸 깨닫는 순간 ‘아, 내가 이젠 정말 아저씨가 되었구나!’ 마음속으로 탄식하였다. 아저씨 인증에 마지막 쐐기를 박은 것은, 더 이상 아이돌 그룹의 노래 가사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분명히 우리말로 노래하는 것은 알겠는데,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남아이돌이고 여아이돌이고 서로를 구별하지 못하게 되었다. 내가 음악을 안 듣는 편은 아닌 것 같은데, 그쪽의 음악 세상에서는 밀려나버린 느낌이 들었고, 그들의 춤사위를 따라 하는 건 고사하고 노래를 흥얼거릴 정도조차 안되니, 어딘가 있을 ‘삼촌’ 팬들에게 과외라도 받아야 하나 생각도 슬쩍 해보았다.
또 시간은 흘러 정신없는 30대를 보내고 더 정신없는 40대를 맞이하면, 어쩌다 한 번씩 누군가의 부모님의 장례식장에서 아무 맛도 없는 육개장과 또 비슷하게 맛없는 찬 몇 가지를 사이에 두고 오랜 친구들이나 사회에서 알게 된 여러 지인들과 마주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들과 근황을 주고받으며 육개장에 술 한잔을 나누다 보면 모두의 어깨 위로 세월이 제법 두껍게 내려앉고 있었다. 아주 간혹 그 장례식이 누군가의 부모님이 아닌 친구나 지인 당사자인 경우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내가 아니라는 얄팍한 안도감과 함께 어찌할 수 없는 망연자실함이 그 어깨 위에 더해진다.
그리고 의학적이며 생물학적 모습을 빌려 전 인류에게 가혹하게 주어졌던, 시간과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에 해답을 찾아 헤매던 3 년이 지나고 나니, 그 답은 여전히 찾지 못한 채 50 대에 접어들고 말았다. 그리고 늘 쓰고 다니던 마스크를 벗는데 조금 익숙해질 무렵 전해온 그들의 부고 소식.
오에 겐자부로, 2023년 3월 3일 사망
밀란 쿤데라, 2023년 7월 11일 사망
그리고 좀 뒤늦게 소식이 알려진 페터 비에리, 2023년 6월 27일 사망.
그들을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살아오면서 그들의 책에서 영감을 받고 그들의 생각, 그들의 정신에 닿아보려 했던 시간들이 있었기에 더 이상 그들이 세상에 없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여느 유명인의 부고 소식과는 달리 짙은 아쉬움이 남았고, 코로나 19가 던지고 간 ‘시간과 삶의 의미’를 새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이것이 50대가 된 지금의 내가 나이 들었음을 느끼는 방식이다.
그들의 생명을 앗아간 것이 코로나19는 아니었음을 그나마 다행이라 여기면서, 책 한 권을 꺼내어 다시 읽기 시작했다.
코로나19의 기세가 여전하던 2021년 겨울에 한번 읽었었는데, 아주 얇은 책이었지만 그 내용은 만만치 않은 그런 책이었다. 아주 오래전, ‘파스칼 메르시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도 그러했듯이 고심하고 힘들여 쓴 것이 역력한 문장들을 하나하나 따라가다 보면 100 페이지가 채 안 되는 책이 마치 대학 시절 받아 들었던 500 페이지 짜리 전공 책을 읽는 느낌마저 들곤 했다.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비에리가 강조하는 것은 남들이 하는 얘기, 특히 언론이나 인터넷에서 하는 이야기들에 현혹되지 말고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행동하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충분한 교양을 쌓는 것이라 이야기한다. 교양을 쌓는 일은, 그래서 진정한 교양인이 되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우선 교양이 무엇이지 그 정의를 내리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 사람들마다 교양에 대한 생각이 다르고, 쌓은 교양이 드러나고 힘을 발휘하는 모습도 너무나 다양하다. 오죽하면 ‘슈바니츠’가 아예 <교양>이라는 두꺼운 책까지 썼겠는가?
<교양 수업>을 다시 한번 읽으면서 나에게 ‘교양’이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우선은 세상의 수많은 지식들, 하지만 조각조각 흩어져 있는 지식들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의 체계를 세워 앞뒤 맥락을 확인한 후, 나만의 통찰력으로 그것들을 연결해야 한다. 그 후에 나의 가치관을 결합하여 다시 새로운 지식, 새로운 현상과 마주하는 것. 이것이 지금 내가 생각하는 “교양”이다.
이 책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우리가 문학 작품을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명석한 대답이다. 주변에서 보면 책을 안 보는 사람뿐만 아니라, 책을 제법 열심히 읽는 사람 중에서도 시나 소설을 왜 읽어야 하나 의문을 던지는 경우를 볼 수가 있는데, 그 대답은 아주 다채롭게 할 수 있지만, 비에리는 거기에 그만의 훌륭한 답을 이 책에 남겨 두었다.
또한,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손이 가는 책이 있는데, 바로 빨간색 표지에 비슷한 두께를 가진 <자기 결정>이다. 원래는 한 권이었을 것 같이 내용이 연결된 책인데, <교양 수업>에 이어서 같이 읽으면 더 좋은, 마치 대학교 철학 수업의 1학기와 2학기 교재인 것 같이 느껴지는 책이다.
나에게는 ‘메르시어’라는 이름으로 먼저 다가왔던 비에리의 명복을 바라며, 코로나19 이후의 시대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나 그의 생각을 듣고 싶지만 영영 들을 수 없게 된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