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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없는 시네코아...극장전

2024년 2월 24일

by 행크

오늘은 날이 조금 풀린 것 같아서, 국립극장 위쪽으로 남산을 오르기 시작하여 남산 북측 순환로를 지나다가 충무로 쪽으로 내려왔다. 남산 한옥 마을의 후문을 지나 정문을 통과하고도 계속 걸어 을지로의 ‘커피한약방’에서 정말 한약보다 더 쓴 초강배전의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참새가 방앗간 찾아가듯 교보문고를 향했다.


청계천을 건너 삼일빌딩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몸을 틀어 교보문고 쪽으로 가려하는데 묘하게 주변의 분위기가 예전과 다르게 느껴졌다. ‘뭐가 바뀐 걸까?’ 두리번거리는데 곧 뭐가 바뀐 건지 알아챘다. 삼일빌딩 건너편에 늘 서있던 시네코아 건물이 사라진 것이다. 악간의 놀람과 함께 근처로 가본다. 건물이 통째로 헐리고 있었는데, 철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1층의 반 정도가 아직 남아 3대의 포클레인에게 애처롭게 저항을 하고 있었다.


대학 시절, 서울 구석에 처박혀 있는 학교에서 뭔가 기분 전환을 하고 싶을 때, 혹은 약속이 있을 때에 자주 가는 곳이 종로였는데, 그럴 때면 약속 시간보다 조금 더 일찍 나가 들리는 장소가 ‘종로서적’과 ‘코아아트홀’이었다. 그리고 당시 새로 생긴 ‘시네코아’. 책이나 음반을 구경하거나 살 때-지갑이 얇다 보니 살 때보다는 구경만 할 때가 더 많았다-는 종로서적, 영화가 보고 싶을 땐 코아아트홀과 시네코아를 자주 찾았었는데, 어느 순간 종로 서적이 없어지고 코아아트홀도 문을 닫았다. 그리고 좀 더 견디던 시네코아도 결국 없어졌는데, 그래도 건물은 남아 가끔 그 앞을 지나갈 때면 옛날의 기억을 되살려주곤 했었다.


그 앞에 서서 무너져 가는 건물을 보고 있으니, 조금은 씁쓸하고 좀 많이 쓸쓸했다. 우리가 알아내기 힘든 어떤 경제의 논리에 따라 정해진 결정에 건물은 철거되는 것이겠지만, 그곳에서 과거 언젠가부터 쌓여왔던 사람들의 이야기, 기쁨과 슬픔의 그 이야기들은 더이상 끼어들 틈이 없다, 바닥에 놓여 있는 건물의 잔해들처럼 그저 그렇게 부서지고 흩어져 갈 뿐.


잠시 서있다 원래 가던 길로 다시 향한다. 길을 걷다가 문득 예전에 시네코아에서 봤던 영화가 생각났다.


홍상수의 <극장전>


<극장전>이 개봉된 해가 2005년이고 이 극장이 문을 닫은 해가 2006년이니 어쩌면 나에게는 시네코아에서 마지막으로 본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가 떠오른 이유는 이것 말고 더 큰 이유가 있는데, 이 영화는 다른 어느 극장보다 시네코아에서 보아야만 느낄 수 있는 경험과 감흥이 있기 때문이다. <극장전>은 영화 자체로도 충분히 재미있는 영화이지만, 시네코아에서 보는 게 훨씬 더 좋은 이유는 이 극장 자체가 영화의 중요한 공간적 배경이기도 하고, 영화가 끝나고 극장 밖을 나온 후에 다른 영화와는 다른 특별한 영화적 경험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이 시네코아 극장에서 어떤 영화를 감상하는데, 그 영화 속 영화에서도 시네코아가 위치한 이 근방이 중요한 공간적 배경이 되고, 영화를 다 보고 나온 주인공이 시네코아와 주변 종로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방금 본 영화에 주인공 역을 맡았던 여배우를 우연히 만나면서 영화가 진행된다.


현실의 극장에서 화면을 보고 있는 관객-나 같은-과 그 화면 속 주인공과 그 주인공이 보고 있는 영화 속 인물들이 있는 공간이 모두 하나의 장소라는 아주 독특한 경험이 인상적이었고, 영화가 끝나고 극장 밖으로 나서면 지금 내가 방금 본 영화 속에 들어간 건 아닐까 하는 즐거운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러고 나서는 자연스럽게도 주인공이 지나갔던 길이 어디였나 두리번거리며 그 길을 따라가 보게 된다.


어떤 영화들은 영화 자체가 좋아서, 보고 난 후의 여러 감정이 일어나고 그 감정들이 마음에 남아 현실을 살아가는 동안 오래 곁에 머무는 경험을 하곤 한다. 하지만 이렇게나 직접적으로 영화와 현실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버리는 영화는 흔하지 않은데, <극장전>을 시네코아에서 본 경험은 이렇게 현실과 이미지에 대한 인식과 구분의 의미에 대하여 생각하게 하는, 나의 영화 감상에 특별한 경우로 남아있다.


다시 길을 가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네코아의 형님 격인 ‘코아아트홀’이 있던 건물 앞으로 돌아가본다. 물론 코아아트홀도 극장 문을 닫은 지 오래인 건 알고 있었지만 건물 자체가 헐리는 건 아닐까 과도한 걱정이 든 것이다. 다행히 코아아트홀이 있던 건물은 여전히 잘 있었다. 코아아트홀에서 보았던 수많은 영화와 그에 얽힌 추억들이 마치 <시네마 천국>의 마지막에 나오는 키스신 장면처럼 머릿속에서 스윽 풀려나오다 곧 다시 스르륵 사라지는 것을 마음의 눈으로 지켜보다가 아주 조금의 안도감을 얻은 채 교보문고로 발을 옮긴다. 나의 이 모든 마음을 받아 안아 줄 만한 책이 서점 어느 진열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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