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이름은...프랑켄슈타인

2025년 11월 28일

by 행크

넷플릭스에서 제작하여 스트리밍 중인 드라마 <웬즈데이>는 1991년에 개봉한 <아담스 패밀리>의 스핀오프에 해당하는 작품인데, 재미있게 잘 만들어져 큰 인기가 있었다.

‘웬즈데이’는 수요일이라는 뜻이 먼저 떠오르지만, 드라마에서는 아담스 가족의 딸인 주인공의 이름이다. 작고 깡마른 체구에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냉정한 캐릭터인데 목표를 향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돌진하면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또 해결한다.


이러한 주인공을 포함하여 선악의 경계가 모호한 - 대놓고 악당도 좀 있다 - 인물들이 좌충우돌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가는 것을 보는 재미가 이 드라마의 주요 매력이라 할 수 있는데, 그들 가운데 심심치 않게 등장하면서도 유독 자신의 서사가 없고 심지어 대사도 거의 없는 인물이 하나 있다. 바로 아담스 집안의 운전수인 ‘러치’이다. 대사도 거의 없고, 극 중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운전하고 차문을 열어주고 닫아주는 역할이 사실상 다인데, 러치를 그냥 무심히 지나쳐 보낼 수만은 없는 것이 그의 외모 때문이다.


훌쩍 큰 키에 창백한 피부와 묘하게 각진 얼굴을 가진 러치의 외모는 누가 보아도 영락없이 <프랑켄슈타인>에 등장하는 괴물의 모습인데, 괴상하고 강렬하고 인상적인 외모의 캐릭터 - 세이렌이나 늑대인간, 심지어 메두사 같은 고르곤도 있다 - 들이 난무하는 <웬즈데이>에서도 결코 빠지지 않는 외모이다. 그런 탓에 시청하는 동안 ‘러치’가 어떤 문제를 일으키든, 아니면 문제를 해결하든 뭐라도 할 것 같은 기대를 품어보았지만, 현재 공개된 시즌2까지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고 - 웬즈데이가 위독할 때는 좀 뛰어다니긴 했다 - 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안 하는 ‘러치’에 대하여 특별히 이야기하는 것은 얼마 전에 드디어 이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메리 셀리의 <프랑켄슈타인 또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


이래저래 책을 읽다 보면, 분명히 읽은 기억이 있는데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책이 있는가 하면 -사실 좀 많다- 간혹 읽지 않았는데도 마치 읽은 것으로 착각하는 책도 생긴다. <프랑켄슈타인…>은 그중 후자에 속하는 책인데, 사람들에게 들어온 이야기, 이 책을 인용하거나 해설하는 다른 책들, 결정적으로 프랑켄슈타인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들 때문에 그 내용을 대략 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좀 더 시간이 지나자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에 대한 기억의 경계가 희미해진 채로 시간이 흘러버렸다.


그러다가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새 영화 <프랑켄슈타인>이 개봉한다는 소식과 함께 발 빠른 유튜버들이 <프랑켄슈타인…>의 리뷰 동영상을 올리기 시작했다. 델 토로 감독을 좋아하는 나는 영화 예고편을 찾아보다가 자연스럽게 원작 소설의 리뷰 동영상까지 흘러가게 되었는데, 보다 보니 ‘아, 내가 이 소설을 안 읽었구나.’ 새삼 깨달은 것이다.


나의 얄팍한 독서 생활에 대하여 n 회차 반성하며 책장을 뒤져보았더니, 언제 산 지 기억도 안나는 <프랑켄슈타인…>이 꽂혀 있었다. 뽑아서 표지를 보니 제목부터가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프랑켄슈타인” 또는 “닥터 프랑켄슈타인”이 아니라 위에도 쓴 것처럼 매우 긴 제목이었다. (n+1) 회차 반성 후, 그나마 책이 얇다는 것에 용기를 얻어 펼쳐 들고 읽기 시작했다. 책이 얇기도 하고 그 시대의 다른 소설들과 달리 속도감 있게 쓰여서 상당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는데,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을 만들기까지의 과정과 만든 후의 후회와 두려움을 담고 있는 1부는 조금 지루하였지만, 괴물의 성장 이야기인 2부와 프랑켄슈타인과 괴물의 대립을 그린 3부는 정말 술술 페이지가 넘어간다.


특히, 만들어지자마자 버려진 괴물이 겪게 되는 고난과 성장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괴물에 감정이입을 하게 되는데, 다른 매체를 통해 이 소설의 결말을 알고 있음에도 책을 읽는 내내 괴물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괴물은 자신에게 총질을 하고, 내쫓고, 비명을 지르는 인간들에게 화는 나지만 결코 미워하지 - 괴물이 미워하는 존재는 단 한 명뿐이다 - 않는다. 심지어 괴물은 언어를 배우고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몇 권의 책을 읽는데, 그 책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실낙원>이다. 이 소설이 쓰인 200 년 전은 물론이고 세상에 책이 흘러넘치는 지금도 이 세 권의 책을 모두 다 읽어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니, 한 권이라도 읽어본 사람은? 물론, 윗줄에 언급한 책들이 세상 사람들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은 아니겠지만, 출생의 남다름과 흉측한 외모 때문에 괴물로 불리는 이 존재가 그 정도 책을 읽고 사유하는 시간을 가졌다면 더 이상 괴물로만 천대받아서는 안 되는 한 인간이 된 건 아닐까?


그래서 어느 순간 이 괴물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다. 더 이상 괴물이니, 이것, 저것으로 부르지 말고 소박한 이름 하나 지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제임스’나 ‘한스’ 나 뭐 그런 특별할 것 없는 이름이라도 말이다. '프랑켄슈타인’이 자신의 피조물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은 이유, 그러니까 작가 메리 셸리가 괴물에게 이름을 주지 않은 의도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비평과 학술적인 연구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없는 것 가지고 소설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괴물에 많이 이입한 독자의 한 명으로서, 그를 이름으로 부르고 싶어진 것이다. 우리가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 아끼는 인형이나 장난감에도 이름을 지어 부르는 그런 것처럼 말이다.


내 희망과 상관없이 소설에서 괴물은 이름은 고사하고 자신을 창조한 프랑켄슈타인에게 저주만 받은 채 그가 죽는 것을 지켜본 후 결국 북극 얼음 너머로 떠난다. 자기 스스로 소멸하여 고통을 끝내기 위하여.


그렇게 떠난 괴물의 마지막은 알려지지 않은 채 소설은 끝나는데, 이 괴물을 많이 아꼈던 나는 <웬즈데이>를 보고 나서 조금 엉뚱한 상상을 해보았다. 평범한 인간과 달리 슈퍼 히어로 급의 강인한 육체를 지닌 그가 쉽사리 죽었을 것 같진 않고, 북극을 떠돌다가 혹시 아담스 가문의 조상, 그러니까 ‘웬즈데이’의 고조할아버지를 만난 건 아닐까? 그 당시에는 유럽 여러 나라에서 탐험대가 북극으로 떠났으니 말이다. 이상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아담스 가문의 사람들에게 괴물은 별로 거부감이 없었을 것이고 그냥 ‘별종 중에 이런 별종도 있구나’ 하며 집에 데려왔을지 모른다. 그리고는 “사람이 이름도 없으면 쓰나…”하며 이름도 지어주었을 것이다.


“자네, 이제부터 ‘러치’라고 하지.”


이제 괴물은 러치가 되었고, 러치는 자신의 과거를 굳이 떠벌이고 싶지는 않아서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과묵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 살갑지도 않고 조금 기괴한 면도 있지만, 자신을 사람으로 대해주는 아담스 집안에서 집사 겸 운전수가 되어 큼직한 리무진을 몰며 고요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러치의 모습은, 어쩌면 이백 년 전 어느 시골 마을의 헛간에 살면서 자신이 꿈꾸었던 바로 그 모습이 아닐까 한다.


웬즈데이를 포함한 아담스 가족이 네버모어 아카데미에서 대소동을 벌이는 동안, 화면 밖의 러치는 특유의 표정없는 얼굴로 주차장에 세워둔 검은색 리무진에 앉아 소동이 끝나길 기다리며, 글로브 박스에서 꺼낸 낡디 낡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24번째 읽고 있거나, 아니면 새로 구한 <죄와 벌> 같은 책을 읽고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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