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18일
목요일인 대입수학능력평가일과 그 다음날 학교의 재량휴업일 지정으로 토, 일요일까지 4일 연휴가 만들어져 교토로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그런데 아이가 체육 수행평가로 제기 차기를 해야 한다며 교토 여행에 제기를 가지고 왔다. 좀 못해도 괜찮다고 달래보았지만 학교 성적에 대한 욕심이 보통이 아닌데다가 한번 마음 먹은 것에는 고집이 대단해 여간해서는 꺾을 수가 없다. 그래서 늦은 밤이면 호텔 7층-머무는 방이 7층이다- 엘리베이터 타는 곳에 있는 넓은 공간으로 나가 20~30 분씩 제기 차기 연습을 했다. 방 바로 밖이라 무슨 일이 나지는 않겠지만 혼자 보내기에 마음이 쓰여서 슬며시 따라 나갔다. 아이는 제기를 차고 나는 구석에서 지켜보며 응원도 했다가 우스갯소리도 하면서 같이 시간을 보냈다. 그 공간이 좋은 점은 뜻 밖에 넓어 제기 차기를 하는데 충분하다는 것도 있지만, 한 쪽 벽이 통유리창으로 되어 있어 밖을 볼 수 있는데 그 창을 통해 교토역을 들고 나는 기차와 사람들과 플랫폼을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역답게 열차가 운행하는 시간동안에는 수많은 기차가 쉴 새 없이 들어오고 떠나는데, 그 기차들을 타고 내리는 승객들로 역은 가득하다. 직장인, 학생, 이러저런 이유로 역을 찾은 사람들, 또 우리 가족같은 멀리서 온 뜨내기 여행객들. 바다의 밀물과 썰물이 들고 나듯, 짧게는 파도와 물결이 오고 가듯 사람들이 흘러갔다 또 흘러오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들 각자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이겠지만 그러다가 어느 순간들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떠밀리듯 흘러가버린 때가 있지는 않았었나 하고 지난 시간을 곰곰이 돌아보게 된다.
이렇게 이용객으로 역이 가득한 풍경은 기차가 운행하는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볼 수 있고 평소의 역의 모습은 여기까지인데, 더 늦은 밤, 그러니까 우리가 낮 시간을 어딘가에서 보내고 호텔로 돌아와 제기차기 연습을 시작하는 아주 늦은 밤, 열차들이 하나, 둘 운행을 종료하고 문을 닫는 그 시간이 되면 교토역은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 넓은 역에 사람들이 깨끗이 사라진 후 빈 플랫폼에 가로등 불빛만이 남게 되면, 일본 특유의 무미건조한 콘크리트 색이 -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 색도 칠하지 않은 콘크리트도 나라마다 색이 조금씩 다르다 -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 때문에 볼 수 없었던 기차역 구석구석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호텔 7층 창에 서서 찬찬히 보고 있노라면 ‘저기에 저런 것이 있었나?’하며 시선을 끄는 것도 많고 무엇보다 교토역이라는 곳이 전체적으로 온전히 보이게 된다. 여러 개의 선로와 그 선로에 맞닿아 있는 플랫폼들이 바로 기차역의 본질적인 모습이고, 복합 상업 공간으로서의 교토역이 아니라 기차가 들고 나며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이어나가는 진짜 기차역으로서의 교토역이 드러나는 순간인 것이다. 기차역이라는 공간이 간직한 정체성이 더 잘 드러내는 순간이 오히려 모든 기차들이 떠나고 끊긴 깊은 밤 시간이라는 것이 역설적이면서 평소에는 경험하기 어려운 감흥을 느끼게 해준다.
낮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공간으로서의 교토역이지만, 이제 밤이 되어 그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난뒤 그 자리에 덩그러니-조금은 쓸쓸하게-남아 있는 교토역을 보고 있으니 당연하게도 낮과는 다른 상념에 젖게 되는데, 살면서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속절없이 떠나보내고 그 뒷 모습을 보며 그저 우두커니 서있었던 어떤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런 기억이, 그런 경험이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고 많은 이들이 그런 경험 몇 번씩은 있었을텐데, 어쩌면 그들 중 누군가는 그 기억과 그 때의 감정들을 바로 이 역에서 겪고 나서 그것들을 감당하기 힘들어 여기 어딘가에 묻어 두고 가버린 탓에, 이 밤의 교토역은 그렇게 자신을 지켜보는 이방인에게 그런 정서를 전해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번 여행은 교토의 단풍을 보고 싶어 온 여행인데, 기대와 달리 교토의 나무들은 아직 가을을 맞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고 여전히 푸르기만 했다. 교토 북쪽 오하라까지 찾아가 보았지만 교토의 자연은 인간들의 성급한 마음을 조금도 헤아려주지 않은 채, 한여름처럼 소나기까지 내렸었다.
하지만 창백한 회색의 콘크리트와 녹이 슬어 있는 철골과 고압의 전선들과 무심히 놓여있는 자동판매기로 이루어진, 그리고 그 어떤 미적인 고려도 들어가 있지 않은 형광 가로등만이 어둠을 밝히고 있는 심야의 교토역이 ‘이런 도시의 가을은 어떤지…?’ 하며 오히려 나에게 말을 걸어 주고 있었다.
여행을 떠날 때는 항상 나름의 목적을 가지고 떠나지만, 정작 도착해보면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도 많고 생각지 못한 사건 사고가 생기기도 한다. 동시에 예상하지 못한 시간과 장소에서 여행객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순간을 만나기도 한다.
이번 여행에서 가보았던 북쪽 마을 오하라나 야간 개장한 청수사는 그 자체로 충분히 좋았지만 가을의 정취가 살짝 모자라 아쉬웠는데, 깊은 밤 적막한 교토역이 자신을 우연히 내려다 본 이방인에서 깊어가는 가을, 짙은 페이소스를 이렇게 전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