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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건우 Jun 30. 2023

자랑스러운(?) 나의 선생님

“O Captain, my Captain”

“O Captain, my Captain”

‘죽은 시인의 사회’ 영화의 대사 중 가장 의미 있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 중 하나이다.


문득 학창 시절을 떠 올릴 때가 있다. 친구에 대한 기억, 장소에 대한 기억, 특정 사건에 대한 기억… 또 하나 빠질 수 없는 것이 선생님에 대한 기억일 것이다. 세월이 흘러 좋은 기억은 모두 잊어버린 것일까? 내 기억 속 선생님은 대부분 좋지 않은 모습으로 남아있다. 선생님은 학부형들을 수시로 학교에 불러들였다. 학부형들은 죄라도 지은 것처럼 흰 봉투를 선생님에게 바쳐야 했다. 가을이면 학교 뒤뜰에는 여러 색의 국화꽃이 화분에 예쁘게 피어 있었다. 이 국화꽃은 하나도 빠짐없이 비싼 가격에 강매되었다. 모금이라며 거의 매달 돈을 가져오라고 했고, 집이 가난해서 가지고 오지 못한 친구는 공개적인 수모를 감당해야 했다. 아픈 친구, 도시락 못 싸 온 친구, 부모 없는 친구에게도, 선생님은 어떠한 사랑도, 연민도 주지 않았다. 사랑은커녕 여러 친구들 앞에서 타박만 줬다.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면 우리들에게 화풀이하는 것은 기본이고, 매질하고 벌을 주는 것은 일상이었다.

적어도 내 어릴 적 눈에 비친 선생님은 그러했다. 그로 인해 몸도, 마음도 많은 상처를 남기는 학창 시절을 우리는 보내야 했다.


# 1

선생님의 사랑(?)은 국민학교 때부터 시작되었다.

국민학교 2학년 때였다. 같은 반에 친한 친구가 있었다. 옷도 제일 좋은 것을 입었고, 장난감도 최신식으로만 가지고 놀았다. 친구의 생일날 초대를 받고 간 곳은 꽤 규모가 큰, 친구의 할아버지 회사였다. 먹어보지 못한 맛있는 것도 먹고, 처음 본 천연잔디에서 축구도 하면서 엄청 재미있게 놀았다.

2학기가 막 시작했을 무렵이다. 학교 운동장에 봉고차 한 대가 들어왔다. 차 문이 열렸고, 건장한 아저씨 두 명이 가늘지만 꽤 많은 작대기를 들고 내렸다. 그리고 작대기는 교무실로 옮겨졌다. 조금 지나서 알게 된 것이지만, 친구 할아버지는 유명한 낚싯대 회사 회장님이었다. 우리는 매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운동장에서 봉고차를 목격했다. 그리고 졸업할 때까지 그 낚싯대로 맞으며 국민학교 시절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가장 장난꾸러기였던 친구는, 낚싯대로 맞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 2

국민학교 4학년 때는 처음으로 남자 담임선생님을 만났다. 학교는 새로 지은 신식건물이었고, 바닥은 최신공법, 일명 ‘도끼다시’로 만들어 뛰어놀기 좋았다. (어릴 적 왠 만한 신식용어는 일본말이었다) “복도에서는 뛰지 말고 걸어 다녀라”는 선생님의 말을 어기고 뛰어놀다 선생님에게 들켰다. 선생님은 태어나서 듣도 보도 못한 자세를 우리에게 요구했다. 우리는 반들반들하고 딱딱한 도끼다시 바닥에 머리를 박고, 뒷짐을 져야 했다. 그게 ‘원산폭격’이라는 것을 세월이 조금 흐른 뒤 알게 되었다.


# 3

중학교는 남중이었다. 우리들에 대한 선생님의 애정표현이 국민학교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스케일도 엄청 컷을 뿐만 스킬도 상상을 초월했다. 선생님이 들고 다니는 몽둥이의 크기가 달랐고, 사용하는 도구도 다양했으며, 기술도 엄청 뛰어났다. 특히 아무런 도구를 사용하지 않는 선생님이 가장 무서웠다.

아무런 도구를 사용하지 않는 선생님들은 기술을 공유하는 듯했다. 일단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푼다. 이것은 두 가지 효과를 노린 듯하다. 부상방지와 사전 공포감 조성. 다음은 선생님의 왼손으로 우리들의 왼쪽 귀를 잡아 최대한 천정 가까이 잡아당긴다. 그러고는 오른손으로 있는 힘껏 뺨을 후려 치시는 것이다. 남자 선생님의 소리는 둔탁했지만, 여자선생님 소리는 찰 졌다. 선생님은 짜릿한 손 맛을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들 자존심은 우주 끝까지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야구선수 출신 체육선생님은 몽둥이 휘두를 때 스윙소리가 일품이었고, 쇠 자를 이용하던 수학선생님의 뺨 때리기는 애교 수준이었다. 교양 있는 음악선생님은 가느다란 당구 큐대로 살이 없는 부위를 때렸고, 기력이 쇠하신 선생님들은 원산폭격을 시켰다.

선생님이 때리는 횟수가 늘어나고 강도가 세질수록, 우리들의 말투와 싸움도 거칠어졌다. 각종 무기가 등장했고 간혹 유혈사태도 벌어졌다. 선생님에게 두드려 맞은 분풀이를 우리들 사이에서 하고 있었다. 힘없는 친구는 선생님에게도 맞아야 했고, 친구들에게도 맞아야 했다.

 

# 4

고등학교도 남고를 다녔다. 나름 전통이 있는 학교답게 선생님도 품위를 지켰다. 오로지 몽둥이만 사용했고, 때리는 대신 벌을 세우기나, 드물게 반성문 써 오라는 선생님도 있었다. 하지만 품위가 좀 떨어지는 것은 선배들을 시켰다.

고1 입학 오리엔테이션 때였다. 우리는 고등학교 생활에 대한 꿈과 기대를 안고, 체육관에 모여 있었다. 선생님은 격려와 희망의 말을 남기고 체육관을 떠났다. 잠시 뒤 엄청난 공포가 도사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체육관 문이 잠겼고, 조명은 모두 꺼졌다. 눈을 뜨는 사람은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목이 쉬도록 복명 복창했다.

“선배님은 하늘입니다.”

“선배님은 하느님과 동기동창생입니다.”

극한 공포 속에서 수 백 번 외치고, 엄청 두드려 맞고 나서야 고등학생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죽은 시인의 사회’를 읽고, 읽고, 또 읽었다. 영화도 몇 번을 봤다. 현실에서 만나지 못한 선생님을 책에서나마 보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우리의 자존감이 싹틀 시간도 없이 밟기만 한 선생님들을 향해, 책상 위에 올라서서 외쳐 보고 싶었다.

“O Captain, my Capt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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