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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건우 Jun 29. 2023

울분에 찬 선생님의 가르침

[일본 고교생들, 3년 만에 한국 수학여행…정부 “미래세대 교류”]        2023-03-20  한겨레신문


우연히 뉴스 검색 중 위 기사 제목이 눈에 꽂혔다. 참 좋은 내용이다. 하지만 위 제목을 보는 순간 30여 년 전 담임선생님이 조회시간에 했던 말이 떠 올랐다.


중학교 3학년이었다. 날씨는 화창했고, 학교생활은 무료했다. 목련은 꽃을 활짝 피웠고, 벚나무는 꽃망울을 머금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감천항에는 눈부시게 반짝이는 물살 위로 배들이 떠 다니고 있었다.


점심시간. 같은 재단의 여고 운동장에 낯선 장면이 포착되었다. 여고생들의 교복 치마는 무릎 위로 한 뼘이나 올라가 있었고, 색상은 화려하고 세련되어 보였다. 삼삼오오 모여 장난치고 수다 떠는 모습은 생기발랄했다. 혈기 왕성한 중3에게, 수 백 명이나 되는 여고생의 하얀 허벅지를 보는 것은 ‘문화충격’ 그 자체였다. 그날 우리는 오래간만에 무료함을 달랠 수 있었다.


우리는 하얀 허벅지의 여고생 정체를 누구나 알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잘살고, 우리는 몬 살아서 여기로 수학여행 온다 안카나”

“저거 나라보다 훨씬 싸게 먹힌다 카드마”         


다음날 조회시간. 담임선생님은 선생님만큼이나 연륜이 있어 보이는 몽둥이를 손바닥에 치시면서 교실로 들어왔다. 선생님 얼굴을 한 번 살핀 우리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인 채 숨을 죽였다. 선생님의 어두운 표정이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

꽤나 긴 시간 정적이 흐른 뒤, 선생님은 평소보다 차분하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너그 어제 여고에 일본학생들 온 거 봤제?”

“예, 봤는데예.”

“가들 왜 우리나라로 수학여행 오는지 아나?”

“우리나라가 싸다 카든데 예..”

“………………………………”

또다시 긴 정적이 흘렀다.


선생님은 작년까지 여고에서 근무를 했다. 연세가 있으신 선생님은 일본말을 할 수 있었고, 작년 요맘때 일본여고생 수학여행 가이드를 맡게 되었다. 숨을 길게 내뱉은 선생님은 말을 이어갔다.

“안내 할라믄 일정을 알아야 하니까 일본선생한테 안내책자 좀 보자고 했다. 그 안내책자 받아서 열어보는데 무슨 말이 적혀 있었는지 아나?”

“…………………………………………”

첫 장을 읽은 선생님은 안내책자를 바로 덮었다. 그러고는 상대방에게 표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며 그 자리를 피했다. 선생님이 이야기한 안내책자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은 36년간 선조들이 지배했던 나라다.’

‘한국이 이 정도 잘 살게 된 것은 모두 우리 선조들이 깨우치고 베풀어 줬기 때문이다.’

‘이번 수학여행에서 잘 보고 배워, 앞으로 엄마가 되면 이 역사를 아이들에게 잘 교육시킬 의무가 너희들에게 있다.’


그랬다. 일본여고생이 우리나라에 수학여행 온 것은, ‘싸기’ 때문에 온 것만은 아니었다. 그날 선생님은 울분에 찬 목소리로 우리에게 이야기했다.

“다시는 이런 수모 안 당할라 카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라, 알겠제?”

위 기사를 보고 30년이 넘게 지난 지금, 일본 학생들은 어떤 목적으로 우리나라에 수학여행을 오는 것일까 생각을 했다. 그때만큼 ‘싸기’ 때문은 아닐 것이고, 기사에서 말하는 ‘미래세대의 교류’라고 순수하게 믿어도 될지 의문이 들었다. 봄 햇살 따듯하고 무료했던 그날, 우리의 눈은 즐거웠지만 머리는 망치로 한대 얻어맞은 듯이 먹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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