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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건우 Jun 30. 2023

나는 엄마의 ‘존재의 이유'였다

“가시나가 공부해서 뭐하노, 학교 가지 말고 일이나 해라.”

엄마는 ‘엄마의 엄마’가 싫다고 했다.

나의 외할머니는 학교 가려는 엄마를 매번 돌려세웠고, 그것은 엄마의 평생 ‘한’이 되었다.


나는 1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위로 누나가 세 명이 있다는 말이다. 어릴 적 막내 누나는 나와 싸우기라도 하면 으레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세상에 나오지도 못한 주제에…”

그러면 나는 질세라 맞받아 친다.

“내가 먼저 태어났으면 누나는 지금 존재하지도 않거든….”

그랬다. 정부의 강력한 ‘산아제한정책’에 반기를 들고 엄마는 기필코 나를 세상에 나오게 했다. 또한 아버지 의사에도 반하는 결정이었다.


매 학년이 바뀔 때마다 학교에서는 ‘가정환경조사’라는 것을 했다. 그 조사에는 부모학력을 적는 곳도 있었다. 아버지는 ‘부’란 에는 중졸을 ‘모’란 에는 국졸을 적었다. 하지만 나는 나이가 들면서 알았다. 두 분 모두 국민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다는 것을… 하루하루 먹고사는 것도 절박한 세상에서, 엄마아빠에게 국민학교 졸업장은 사치에 불과했을 것이다.


국민학교 6학년 때쯤이었다. 우리 집은 스무 평이 넘는, 당시로서는 큰 편에 속하는 집에서 살았다. 하지만 방은 달랑 두 개이고, 절반 이상은 가게가 차지했다. 작은방은 누나 셋이 사용했고, 안방은 엄마와 아빠, 내가 함께 사용했다. 어느 날 안방의 장롱이 앞으로 당겨졌다. 그 뒤로 바닥부터 천장까지 칸막이가 생겼고, 미닫이 문이 하나 달렸다. 그 공간에는 좌우 1cm의 여유도 없이 싱글 침대와 책상이 일자로 배치되었다. 나에게도 공부방이 생긴 것이다. ‘나의 첫 번째 방’은 엄마의 아들에 대한 열망이 담긴 산물이었다. 이곳은 엄마가 못다 한 ‘공부의 한’을 자식인 내가 풀어야 하는 공간이 되었다.


그 무렵, 엄마는 새벽 4시에 일어났다.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쌀 한 되 정도를 물에 불리는 것이다. 모두가 잠들어 있는 시간, 가뜩이나 조그마한 주방은 엄마의 전쟁터가 되었다. 고등학생이 된 누나 둘은 도시락 두 개씩, 막내 누나와 나는 한 개씩 해서 여섯 개의 도시락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등교 순서대로 한 명씩 밥상이 차려진다. 이렇게 쌀 한 되로 지은 밥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자식들이 모두 떠난 시간, 여유를 부릴 새도 없이 집안일을 최대한 빨리 끝낸 엄마는 장사 준비를 한다. 그렇게 저녁까지 장사를 끝내면 다시 저녁준비를 하고, 밀린 집안일을 했다. 자정 넘어서야 엄마는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그런 엄마에게 철없는 아들은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을 저질렀다. 맨날 김치뿐인 도시락 반찬이 부끄러웠다. 학교 가기 전 엄마 몰래 도시락을 밥솥에 담다가 들켰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천 원 한 장을 주면서 가는 길에 빵이랑 우유를 사가지고 가라고 했다. 그 뒤로 내 도시락엔 항상 소시지가 들어 있었다.


중학생 때였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깊은 밤이었다. 달도 보이지 않았고, 길도 보이지 않았다. 매서운 바람과 비릿한 냄새가 바닷가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엄마, 어디가? 무서워~”

엄마는 거의 다 왔다고 했다. 잠시 뒤 도착한 곳에서 낯설고 무서운 복장을 한 사람이 마늘과 양파를 내 몸에 던지고, 미나리로 머리와 얼굴을 마구 후려쳤다. 아프기도 하고 겁이 나 온몸이 떨렸다. 그러고는 귀가 찢어질 듯한 쇳소리와 함께 굿판이 벌어졌다. 끝나고 가는 길에 엄마가 얘기했다.

“조상 중에 니 앞을 막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오늘 풀어 준기다.”

이렇게 엄마는 나의 앞길을 하나하나 풀어주고 있었다.       


고3 학력고사가 백일 앞으로 다가왔을 때였다. 엄마는 백일기도에 들어갔다. 장사를 끝낸 늦은 저녁, 하루도 빠짐없이 절에 갔다. 하루가 끝나갈 시간,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엄마는 온몸이 땀범벅이 되어 있었다. 1080배를 하는 날도 있고, 2160배를 하는 날도 있다고 했다. 오로지 아들을 위해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백일 동안 십만 번 이상의 절을 했다. 절을 할 때 어떠한 마음으로 했을지는 미루어 짐작이 된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IMF금융위기’가 터졌다. 졸업한 지 1년이 다 되어도 취업이 되지 않았다. 맨날 마음 졸이며, 노심초사하고 있는 내게 엄마는 말했다.

“걱정 마라, 잘 될끼다. 내가 얼마나 니한테 공을 드맀는데~~”

엄마는 아들에게 쏟아부은 열정과 기도를 긍정으로 승화시키고 있었다.


그랬다. ‘가시나’로 태어난 엄마는 끝끝내 아들을 낳았다. 학교를 가고 싶어도 못 간 엄마는 어떻게 해서든지 아들을 대학까지 보냈다. 아들 앞의 걸림돌은 모두 거두어 주었다. 올해도 초파일을 맞아 아들 이름으로 ‘등’ 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나는 엄마의 ‘존재의 이유’였고, 엄마는 나의 ‘존재의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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