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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소혜 Jul 17. 2022

왕이라고 불리는 아이

비 오는 날이 싫었다. 그렇지 않아도 작은 목소리가 빗소리에 파묻혔고 선생님은 더 앙칼지게


- 큰소리로 읽어!


외쳐댄다. 눅눅해교실바닥은 쥐꼬리만 한 공부 의욕도 날려 보낼 판이다. 모두가 잠든 5교시에 국어 읽기는 자장가나 다름없다. 선생님도 밀려오는 졸음을 극복기 어려워 내게 읽기를 시킨 것이 분명했다.


나에게 책 읽기는 서커스단에 줄 타는 사람처럼 관심은 받지만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곡예다. 줄을 건너가기 전에는 절대 피할 수 없다. 일단 자리에서 일어서 읽으려 한다. 하지만 글자들은 내 눈을 피해 달아나는 것처럼 제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왕좌왕한다. 당황스럽고 긴장된 마음에 얼굴을 붉은 페인트를 칠해 놓은 것처럼 변했다.


- 뭐해? 빨리 읽어.


선생님 재촉은 가속도가 붙는다. 너 몇 번이야? 이름이 뭐야? 왜 시킬 때마다 책은 못 읽어? 미리 읽어보라고 했잖아! 아이들의 웅성거림까지 더해져 이래저래 5교시 국어시간은 흘러갔다. 그러다 보다 못한 은형이가 손을 든다. 이 아이는 나의 구세주일 것 같지만 나의 치부를 알고 있는 유일한 아이라 그 아이의 등장은 반갑지 않다.


- 선생님, 제가 읽을 게요.


선생님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은형이에게 읽으라고 시킨다. 그리고 곱게 나를 보내주지 않으신다. 한바탕 내 이름을 들먹이며 쏟아붓는다. 그 비아냥거림은 선생님 입장에서는 정신 차리고 노력하라는 훈계일 수 있지만 내게는 겨우 아물어가는 상처에 다시 생채기를 낸 거나 다름없다.


- 왕이 책도 못 읽으면 어쩌냐? 그래 가지고 백성을 다스리겠냐. 부모님에게 좋은 스승을 찾아달라고 해. 아니면 이름을 바꿔!


선생님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내가 싫어하는 어휘들이 쇠사슬처럼 발목을 휘감은 탓에 나는 앉지도 못한  벌을 서고 있었다.


맞다. 내 이름은 왕이다. 조선의 19대 왕 숙종이다.  '이숙종'이라는 성과 이름을 가졌지만 나는 이 모든 것이 싫다. 이름을 지었다는 엄마는 현재 같이 살고 있지 않고 왕의 교육은커녕 은형이네랑 동업해서 일하는 아빠는 늘 바쁘다. 그래서 동생이랑 단둘이 지낼 때가 많다.


학교에서 이름과 관련된 일화가 많다 보니 숙종 임금에 대해 찾아보았는데 모든 면에서 나랑 반대였다. 아버지 현종은 온순하다는데 나의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잘 내 동생이랑 잡동사니 방에서 문을 걸어 잠글 때가 많다. 모친 명성왕후는 한 성질 한다고 하는데 우리 엄마는 내 이름을 지은 걸 봐서 사랑이 많으셨을 것 같다.  엄마에 대한 기억이 없어 그냥 내 상상 속의 모습으로 위로받는다.


숙종 임금은 오래 나라를 다스렸다. 부인도 여러 명 두고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한 것 같다. 성품도 나처럼 참을 때가 많은 게 아니라 다 드러내며 여러 사람을 괴롭혔다. 그런데 나 이. 숙. 종 은 5교시 국어시간 식곤증에 시달리는 아이들의 잠 깨우는 용도로 늘 일어나 책을 읽어야 한다. 읽는 데 성공한 적이 없는 데도 이다.


은형이에게 고맙다는 말은 못 하겠다. 엄마가 우리를 두고 나가야만 했던 이유, 동생이랑 햇빛도 안 드는 방에서 텅 빈 배를 움켜 잡고 며칠씩 지낸다는 것을 차라리 알려주고 싶었다. 밖에서 일할 때 아버지는 친절했다. 아니 그래야만 돈을 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자꾸 일어나고 은형이는 마치 내 생활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측은하게 나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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