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해주는데도 이유가 있다

by 지소혜

섭대리의 짝사랑을 의도치 않게 목격했다. 정확히는 사랑의 감정을 품은 30대 초반 남성의 전화 통화를 엿들었다는 표현이 맞다. 섭대 옆자리 특권이라면 특권이랄까. 유난히 흰 피부인 그가 전화통만 붙들고 나면 볼이 발그레지자 너도나도 섭대리의 반말 섞인 거친 답변이 부담되어 내게 물었다.


- 요즘 섭대리 사랑에 빠졌나?

- 무슨 일이에요? 잔소리가 싹 사라졌어요.


섭대리는 예산 관련 일을 해 문의전화가 많다. 하지만 친절한 답변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저번에 물어봤잖아요. 그것도 기억 못 해요? 예산 증액을 요청하거나 삭감을 따지면 회사 방침이라며 전화를 서둘러 끊는다. 그래도 깔끔한 일처리와 밀어붙이는 성향 때문에 회사 윗분조차 눈치를 보며 맡고 있는 조직의 예산을 부탁했다. 섭대리의 손을 거쳐간 그 무엇들은 굉장히 그럴싸하고 당연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질문, 즉 사생활과 관련된 질문은 분노할 정도로 싫어하니까 묻는 것 자체가 금기다. 그가 사내 서클 볼링부에 빠진 것도 수요일 볼링 모임 있는 날 칼퇴근을 해서 알았다. 숙소 친구인 영애가 볼링부 퀸카였는데 섭대리 볼링 실력이 형편없다고 얘기했다. 그는 시도 때도 없이 공을 굴려 보내는 동작을 사무실에서도 연습했다. 동료들은 아무도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동작에 결재받던 서류가 날아가도 이면지를 뭉쳐 볼링공처럼 만들어 굴려도 지켜만 보았다. 그의 숨소리는 유례없이 작고 평온해졌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어 자신의 단점을 애써 평범하게 만들려고 노력 중이었다. 섭대리가 연모 하는 사람은 대체 누굴까? 직접 물어볼 수 없으니 통화의 발신지를 유추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 전산실과 예산 관련 프로그램을 협의하는 내용이다. 업무를 하는 중인지 연애를 하는 중인지 그의 낯빛은 계속 홍조를 띠고 있었다. 추적은 의외의 순간에 끝이 났다. 섭대리는 진짜 짝꿍에게 구원 요청하듯 내게 실명을 밝혔다.


- 전산실 영애 씨랑 같이 살아요?

- 예.

- 영애 씨는 요즘 무얼 제일 좋아해요?


이 광범위한 질문에 하마터면 사실을 말할 뻔했다. 영애는 이름이 말해 주듯 꽃봉오리같이 자그만 체구에 덧니가 있어 그냥 말하는 것도 애교 섞이게 들리는 입사 동기다. 영애는 요즘 짝사랑에 빠졌다. 볼링부의 모 대리라고만 알고 있고 그 사람은 사내 비밀연애 중이라 애인이 있다고 했다. 인기가 많은 영애지만 정작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고백 수 없는 현실을 괴로워했다.


섭대리는 영애의 사랑을 받는 대상이 갖는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그는 머리숱이 적은데다 빠지고 있었으며 일찍 결혼한 누이 외에는 가족이 없었다. 번듯한 집보다는 상당한 저축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사 기숙사에서 단조로운 생활 하는데 도가 튼 사람이었다. 영애는 볼링 모임 있는 날 어김없이 비교될 정도로 실명을 밝히지 않으며 두 남자의 이야기를 했다. 그냥 싫어하는 사람과 그냥 좋아지는 사람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사랑이 이뤄지지 않을 거라고 했다.


섭대리가 사랑의 대상을 정확히 밝힌 뒤에는 나도 모르게 조력자 역할이 주어졌다. 섭대리는 눈에 띄게 잘해 줬다. 내 업무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고 부리기 쉬운 직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볼 때마다 내쫓을 듯한 말을 하는 홍 과장을 방어해 줬다. 말끝에 욕을 달고 책상을 뒤흔들며 아슬아슬한

분노도 보여줬다. 하지만 고마움보다는 점점 부서 내에서 고립되는 것이 느껴 불안했다. 그도 마찬가지로 외사랑이지만 자신의 감정을 불안하게 느꼈는지 영애의 실신 얘기를 전해 듣자마자 사고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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