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으로의 삶 고군분투기
아이가 다니던 학원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동안 아이를 잘 가르쳐 주신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담아 마지막 수업일, 아이에게 선생님께 드릴 빵 꾸러미를 들려 보냈다.
준비한 선물이 소박하기도 했고 일을 키우고 싶지 않은 마음에, 아이에게 원장 선생님이나 다른 분들이 물어보시면 "교실에 뭘 놓고 와서 찾으러 가는 길"이라고 말하라고 시켰다.
아이에게 그렇게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시킨 뒤, 뒤돌아서자마자 흠칫 놀랐다. 내가 아이에게 거짓말을 시켜 기망을 사주한 것이다.
이럴 때 필요한 건 빠른 반성과 사과다. 심부름을 마치고 나온 아이에게 아까 거짓말을 시켜서 미안하다고, 설명하기 곤란한 상황을 모면하려고 한 것이 실은 옳은 선택이 아니었다고 이실직고했다.
"엄마, 나도 '엄마가 왜 거짓말을 하지? 평소엔 하지 말라면서?'라고 생각했어."
"그랬구나. 엄마가 불편한 상황을 피하려고 그랬네. 미안해. 엄마도 더 진실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할게."
화끈거리는 볼만큼이나 내 마음속에 '진실되게 살자'는 불덩이가 활활 타오르는 순간이었다.
아이는 수영 강습도 듣고 있다. 이제는 강습 후에 형들과 함께 놀고 나올 만큼 컸다. 아이가 노는 만큼 나의 자유 시간도 늘어나기에 쾌재를 부르며 픽업을 간 어느 날이었다.
수영장 사우나에서 아이와 놀던 형 두 명이 잡기 놀이를 하듯 뛰어나왔고, 소운이는 헐레벌떡 그 뒤를 쫓으며 외쳤다.
"형~ 기다려! 엄마, 먼저 집에 가 있을래? 형들이랑 놀고 갈래!"
이미 저만치 가버린 형들의 뒷모늬만 바라보며, 일부러 데리러 온 엄마를 홀로 남겨두는 아이가 야속했다. 나는 있는 힘껏 사자후를 내뿜었다.
"안 돼! 엄마가 너 데리러 왔잖아. 그리고 저 형들은 기다려주지도 않고 가버렸는데, 놀기는 무슨!"
단전에서 나온 사자후에 흠칫 놀란 아기 사자는 형들이 지나간 자리를 아쉽게 바라보더니, 이내 체념하고 엄마 사자에게 앞발을 내주었다.
아기 사자의 눈에 가득 찬 미련과 무리에서 도태될까 봐 걱정하는 두려움을 읽었다. 엄마 사자는 아기 사자는 안중에도 없이 떠나버린 무리가 남긴 스산함을 갈기로 느끼며 말했다.
"너를 존중해 주는 무리에게 너의 시간을 쓰는 거야. 꼭 기억해."
그날도 아니나 다를까, 수영 강습이 끝난 후 아이가 씩씩거리며 나왔다. 자신을 놓고 가는 형에게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내가 왜 널 챙겨야 하느냐"는 반문이 돌아왔단다. 엄마 말대로 자신은 그들에게 소중한 존재가 아니었던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안 그래도 그 형이 나를 '민트 상어'라고 부르며 술래를 시키려고 했어. 다른 형이 말렸지만, 나를 따돌리려고 하는 것 같아."
아이는 지난 에피소드를 들려주며 무리의 하이에나 습성을 알아챈 듯 포효했다. 아기 사자의 포효에 엄마 사자는 갈기 사이로 진하게 서린 약육강식의 도를 털어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훌훌 털어내기는커녕, 아이들의 비겁한 행동에 대한 분노로 갈기가 다 타버릴 지경이었다.
"그래, 쉽진 않겠지만 너를 소중하게 대하지 않는 무리로부터 거리 두기를 해보자."
아기 사자 앞에서 겨우 이성의 끈을 놓지 않고 백수의 도를 가르치며, 엄마 사자는 아이와 새끼손가락을 걸어 약속했다.
분명 수영 수업이 끝나고 약속한 시간보다 20분이 더 흘렀는데 아이가 나오질 않는다. 걱정이 풍선처럼 부풀어 터지기 직전, 문이 열렸다.
"어머님, 아이가 사우나 키를 잃어버렸어요."
안도감도 잠시, 아이는 지난 약속은 없었던 일인 양 형들이랑 놀려고 서두르다 키를 잃어버렸노라고 실토했다. 게다가 놀다가 장난이 과해지는 것 같아 혼자 빠져나왔더니, 형들이 '배신자'라고 놀렸다며 속상해했다. 나는 화가 너무 나서 온 초원이 울리도록 포효했다.
"엄마가 화난 건 네가 네 자신을 잃어버릴 정도로 에너지를 다 뺏기고 와서 속상해서야! 자신과 한 약속을 저버리고 놀았지만, 결국 너만 배신자 소리 듣고 물건 잃어버리고 상처받았잖아!"
하이에나의 습성을 분별하게 된 시원함과 속상함이 뒤섞인 울음을 토해낸 후, 엄마 사자의 품에 안겨 잠든 아이를 보았다. 하지만 화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분노의 밤을 보내다 불현듯 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나는 왜 비겁한 사람을 봤을 때 이렇게까지 분노하는가.'
그 순간, 며칠 전 아이에게 빵을 들려 보내며 거짓말을 시킨 내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아, 내가 그렇게 누르던 비겁함을 마음껏 표현하는 무리를 보며 내가 이토록 화가 났구나.'
전광석화 같은 깨달음이었다. 빵 봉투 뒤에 숨어 거짓말을 시킨 내 안의 비겁함은 언제나 사자의 그림자에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백수의 왕으로 살고 싶어 비겁함을 보이지 않으려 꾹꾹 참고 노력하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비겁함을 드러내는 하이에나 무리의 그것은 내 그림자 속에 숨겨놓은 그것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내 본능은 일찍이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전광석화가 지나간 자리, 신기하게도 내 마음의 초원에는 연민의 꽃이 피고 있었다.
그날 이후, 아기 사자와 엄마 사자는 약속했다. 비겁한 사람들에게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내어주지 않기로. 고독하더라도 자신의 소중함을 지키고 선택하는 용기를 내보기로.
동시에, 비겁한 하이에나 무리에게도 연민의 꽃 한 송이를 내어주기로 했다.
고독한 사자는 이제 부끄럽지 않다.
초원의 왕이 되는 법보다 중요한 건, 내 그림자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사자가 되는 법을 알았으니 말이다.
아기 사자는 그렇게 엄마 사자와 함께 겪으며, 오늘도 조금 더 용감하게 자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