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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수희 Nov 26. 2021

가난한 마음

존 윌리엄스 - <스토너>

설님, 안녕하세요.


우리가 책편지를 쓰게 된 지도 어언 4개월째인가요? 무지하게 더웠던 날에 설님을 만나 카페의 창 너머에서 불어들어오는 뜨거운 바람을 맞으며 맥주를 마셨던 기억이 나는데, 이제는 추워, 추워 하고 벌벌 떨며 일하고 있어요. 세월이란 얼마나 빠른지요. 뭐 어찌 됐든 두 계절이 지나는 동안 별 일 없이 멀쩡하게 살아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요즘입니다.


편지를 쓰면서, 저는 설님에 대해 알아가고 있어요. 설님과 저는 많이 다른 삶을 살아와서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되어버린 것 같기도 하고, 그럼에도 비슷한 사람인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떤 문장들을 읽다가는 ‘아아, 나도 똑같아!’ 하고 느끼기도 하고 또 다른 문장들에서는 ‘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하고 신기한 기분이 들기도 해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우리에게는 같은 점보다는 다른 점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요, 그건 아마도, 우리가 굉장히 진지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진실을 말하기 위해 노력하며 이 편지를 쓰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사람들은 대개 비슷한 얘기들을 하게 마련이지만, 겉에 대충 덮어둔 포장을 들춰내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면 누구의 것과도 다른 괴상하고 뒤틀린 것들이, 그러니까 지네나 전갈 같은 것들이 우글거리고 있는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거기까지 내려가는 이야기들을 만나기란 쉽지가 않지요. 우리가 우리 안의 지네와 전갈 들을 꺼내어 보일 용기를 낼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이 편지의 수신인에게, 그러니까 서로에게 적당히 기댈 수 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지난 편지에서 설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저 역시 가난에 대해서는 좀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습니다. 저는 대책 없는 낭만주의자라서, 가난을 떠올릴 때 수도원이나 절의 작은 방 같은 것을 먼저 떠올리곤 합니다. 저는 그런 가난을 동경합니다. 내 손으로 쓸고 닦는 데 어려움이 없을 정도의 크기에 내게 꼭 필요한 물건만이 놓인 단출한 방 같은, 그런 가난을 말이에요. 가난해서 단순하게 살 수밖에 없는 그런 가난을, 저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동경합니다. 결국 제가 생각하는 가난이란 단순한 삶의 방식, 그러니까 종교인들의 무소유의 개념과도 같은 가난인 것 같아요.


하지만 그것은 가난의 일면일 뿐이겠지요. 가난은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과 십여년 전, 우리가 가난해졌을 때, 천만다행으로 우리에게는 빚이 없었고 그 누구도 가난을 빌미로 우리를 괴롭히지 않았지만 저는 자주 화가 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나락으로 떨어지는 꿈을 꿨지요. 우산 하나를 새로 사면서도 수십 번을 고민했던 기억이, 버스에서 누가 버려둔 우산을 가져오면서 뿌듯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그 우산은 저희 집 신발장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 시절 그렇게 꿈꾸던 커다란, 옷장처럼 커다란 신발장 한켠에요. 저는 아직까지도 가족 외식을 하거나 하면 천벌을 받을 것 같아 불안해지곤 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저의 가난에 컴플렉스를 느끼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가난해지자마자 우리는 아파트촌을 떠나 가난한 동네로 이사를 갔는데, 그 동네에는 우리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이 차고 넘쳤기 때문입니다. 그 가난한 사람들은 다들 동네에 내리쬐는 햇살을 받으며 잘 살아가고 있었고, 저는 허리수술을 받고도 폐지를 주우러 다니는 할머니를 보며 사지멀쩡하고 뭐라도 할 수 있는 우리가 가난하다고 울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가난에 지지 않았던 이유는, 지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겉으로는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사실 저는 승부욕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만약 질 것 같다면? 어떻게든 이겨보려고 합니다. 아무리 해도 이길 수 없을 것 같다면? 난 원래 저런 것을 원하지 않았어, 하고 정신승리를 해버립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빚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빚을 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이 소심한 가난뱅이는 아직도 빚이 너무나 무서워서, 사람들이 쉽게 빚을 지는 것을 입을 벌리고 바라보곤 합니다.


며칠 전에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를 읽었습니다. 꽤 늦게 읽은 것이지요. 처음부터 이 책이 어떤 식으로 상찬을 받는지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실은 그래서 읽기 싫었습니다. 남들이 죄다 거들먹거리며 좋다고 하는 책은 읽기 싫은 것이 저의 심술입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무리들은 이제 다 사라졌으니 지금쯤은 읽어도 좋겠지, 하고 도서관에서 빌렸습니다. 첫 페이지에서부터 이 이야기에 빠져들었고, 결국 퇴근 후에 잠자는 시간을 늦추면서까지 멈추지 못하고 전부 다 읽어버렸어요.


윌리엄 스토너의 평범함이나 평범함의 위대함 같은 이야기는 남들이 다 하는 이야기니까, 그리고 남들이 다 하는 이야기를 나까지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저의 지론이므로, 저는 이 책을 읽다가 생각했던 두 가지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게요. 첫 번째는, '내 남편 같은 사람은 이런 책을 읽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이런 책은 못 읽습니다. 전에 한번 <대성당>을 읽어보라고 건넸는데 몇 장 읽더니 도저히 못 읽겠다며 덮어버리더군요.


대신 남편은 매일 웹소설을 읽습니다. 저 정도면 중독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일하지 않는) 깨어 있는 순간에는 계속해서 웹소설을 읽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일까요? 그는 활자중독에 걸린 것일까요? 아니면 이야기 중독인 걸까요? 그가 그렇게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인 걸까요? 아니면 단순히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걸까요? 아, 아마도 그것은 제가 인스타그램을 뒤지는 것과 같은 행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남들의 인생이, 대개는 반짝거리는 사진으로 남은 그들의 인생이 제 손가락 아래로 끝없이 밀려오고 또 밀려가는 그 쾌감. 그 쾌감은 불순한 구석이 있어서 더 유혹적입니다. 그 안에서 저는 현실을 도피합니다. 현실에 대한 희망으로 달아납니다. 삶은 좀 더 나아질 수 있는 것 같고 나는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꿈에서 깨면, 지저분한 방 같은 현실이 기다리지요.


아무튼 스스로 대단히 대중적인 취향이라고 자부하는 남편이 <스토너> 같은 책을 읽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나는 왜 이런 책을 읽고 있는 걸까요? 나의 글쓰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목적이라면 어차피 이런 이야기를 써봤자 내 남편 같은 사람은 읽지도 않을 텐데, 나는 그런 글을 왜 쓰는 걸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책을 읽는 사람은 적습니다. 책을 읽는 사람들이 느끼기에는 말도 안 된다 싶을 정도로 적습니다. 이것은 위험한 일일까요? 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요. 그러나 저는 의외로 낙관적인 사람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이야기를 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그것이 문자로 된 이야기가 아닐 뿐, 사람들은 여전히 영상으로 된 이야기나 그림으로 된 이야기, 언어로 된 이야기를 탐닉하고 있어요. 물론 좋은 이야기와 이야기를 들려주는 좋은 방식을 가려내는 심미안을 갖추었느냐, 아니냐는 또다른 문제지만 어쨌든.


저는 책을 읽는다고 자부심을 느끼며 남을 무시할 필요도 없고, 책의 미래에 대해 좌절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책의 시대는 이제 끝났으니까요. 폼페이가 화산재에 뒤덮였듯이, 대영제국이 몰락했듯이 책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이제 책은 수많은 문화 장르 중의 하나로서 소수의 즐거운 취미로 남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게 뭐가 나쁜 일이겠습니까. 인간사의 모든 일들은 원래 다 흥망성쇠를 겪는 법이 아닙니까. 아무튼 책도 좋아하고 드라마도 좋아하고 영화도 좋아하고 노래도 즐겨듣는 저는, 뭐 그럭저럭 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결론은 제 남편은 이 책을 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책이 좋았습니다. 이 책이 쓰인 방식도 좋았고, 이 책 속의 이야기도 좋았습니다. 사람들은 이 책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 라고들 했지만 저는 그게 호들갑처럼 느껴질 정도로 이 책과 이 책 속의 이야기와 주인공 윌리엄 스토너가 특별하다고 느꼈습니다. 무엇보다 이 작가가 인간을 환멸하지 않아서 저는 좋았습니다. 환멸하지도 동정하지도 않아서, 그래서 윌리엄 스토너는 위엄 있는 사람으로 그려졌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을 저 멀리에서 바라볼 수 있다면, 누구도 인생을 그렇게 살지 않을 거란 생각을 합니다. 어렵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야기를 읽고 보고 듣습니다. 타인의 인생을 보며 나의 인생을 빗대어 봅니다. 왠지 그럴 때 내 인생은 꼭 남의 집 선반 위에 놓인 액자나 화병처럼 느껴지고, 그러면 그것의 무게는 좀 가벼워지는 것 같고, 신선해지기도 하지요. 그러니까 이야기 속에 빠져드는 것은 마치 먼 곳으로 떠나는 여행과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스토너>를 읽으며 한 두 번째 생각. 이 책 속에는 제게 아주 인상적인 구절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스토너의 부모를 묘사한 부분과 스토너의 출신을 묘사한 부분, 그리고 스토너가 그의 부모를 그린 부분입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 부분들을 읽으면서 이 책이 더 좋아졌습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부모는 젊은 나이였지만(아버지는 스물다섯 살, 어머니는 겨우 스무 살), 어렸을 때부터 그에게 부모는 항상 늙은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서른 살 때 이미 쉰 살처럼 보였다. 노동으로 인해 몸이 구부정해진 아버지는 아무 희망 없는 눈으로 식구들을 근근이 먹여 살리는 척박한 땅을 지그시 바라보곤 했다. 어머니는 삶을 인내했다. 마치 생애 전체가 반드시 참아내야 하는 긴 한순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그의 정면에 있었지만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눈을 꾹 감고 무겁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어머니의 얼굴은 고통스러운 듯 일그러져 있고, 주먹 쥔 손은 양뺨을 누르고 있었다. 스토너는 어머니가 소리 없이 마음 깊이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좀처럼 울지 않는 사람이라 어색해하면서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스토너가의 부모자식 관계를 볼 때, 현대의 부모와 자식 관계란 어쩜 이렇게 징글징글하게 얽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항상 제 친구가, 어린 시절 부모가 자신에게 제대로 된 관심과 격려를 해주지 못한 것을 언제나 슬며시 원망하던 친구가, 자기 아이들과의 좋은 관계를, 거의 친구 같은 관계를 자랑스럽게 말할 때마다 놀라곤 합니다. 저는 제 아이들의 친구가 될 생각이 전혀 없거든요.


저는 아이들이  품을 홀가분하게 떠나기를 바랍니다. 저는  아이들을 너무나 사랑하고  애들을 항상 걱정하지만,  역할은 거기까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나를 밟고 가거라, 하는 마음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있는 이유는 어쩌면 제가 유년시절에 부모와 그럭저럭 좋은 관계를 맺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저는 반대로 부모의 품을 떠나는 것에  공포심과 거부감을 느끼지 았으며, 부모의 사랑과 관심에 대한 콤플렉스를 느낄 필요가 없었던 거지요. 남들의 부모자식 관계를 비판할 생각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이상하네, 하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보면 저와  아이들의 관계도 이상할  있겠지요.


저는 부모가 자식의 뒷편에 있는 그런 존재, 마음의 고향과 같은 존재인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애들이 저를 1등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그러기는커녕 15등 정도로 생각해도 상관없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부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평생 그는 그 탯줄에 묶인 상태라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때로는 벗어나고 싶은 족쇄일 것이고, 때로는 안전한 동앗줄 같은 것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즐거움이 없는 노동에 평생을 바쳤다. 그들의 의지는 꺾이고, 머리는 멍해졌다. 이제 두 분은 평생을 바친 땅 속에 누워 있었다. 땅은 앞으로 서서히 두 분을 자기 것으로 만들 것이다. 습기와 부패의 기운이 두 분의 시신이 담긴 소나무 상자를 서서히 침범해서 두 분의 몸을 건드리다가, 마침내 두 분의 마지막 흔적까지 모조리 먹어치울 것이다. 그렇게 해서 두 분은 이미 오래전에 자신을 바쳤던 이 고집스러운 땅의 무의미한 일부가 될 것이다.


스토너는 견디기 힘든 맹렬한 폭풍 속을 지나갈 때처럼 고개를 숙이고,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생각은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딛는 데에만 고정시킨 채 그 시절을 겪어냈다.


하지만 윌리엄 스토너는 젊은 동료들이 잘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세상을 알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 기억 밑에 고생과 굶주림과 인내와 고통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 그가 분빌에서 농사를 지으며 보낸 어린 시절을 생각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지만, 무명의 존재로서 근면하고 금욕적으로 살다 간 선조들에게서 혈연을 통해 물려받은 것에 대한 지식이 항상 의식 근처에 머무르고 있었다. 선조들은 자신을 억압하는 세상을 향해 무표정하고 단단하고 황량한 얼굴을 보여주자는 공통의 기준을 갖고 있었다.


<스토너>를 읽으면서 저는 제가 좋아하는 가난을 떠올립니다. 금욕적인 수도사의 방 같은 그런 가난을 떠올립니다. 가난하지만 풍요로운 그런 가난을 떠올립니다. 고생과 굶주림과 인내와 고통에 쉽게 굴하지 않는, 그런 무표정하고 단단하고 황량한 얼굴을 떠올립니다. 그러다 결국 무명의 존재로서, 자신이 나고 자란 땅의 무의미한 일부로 돌아가는 그런 삶을 떠올립니다.


이 평범한 비범함을 생각할 때면, 인류가 지금껏 살아남는 데 이런 이들의 인내심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을까를 생각할 때면, 작은 일에도 울고 웃는 나 자신이 하찮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저는 하찮은 존재로서의 제 삶을 최대한 만끽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어차피 나의 삶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나마 자손을 두 명 낳았으니 소기의 임무는 달성한 걸까요. 이 의미 없는 삶을, 가장 의미 없는 존재로서, 의미 없이 즐기다가 의미 없이 가보겠습니다.


11월 26일

무의미한 수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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