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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 Nov 18. 2021

그까이꺼 대충 살지

빈곤의 여왕 (오자키 마사야)


수희님 안녕하세요?  세상에서 가장 쉽게 그림을 그리는 밥 아저씨의 그림 속 풍경 같던  가을도 이제 서서히 가고 있어요. 그것이 못내 서글프네요. 저는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 예민자입니다. 햇빛이 쨍하면 기분이 좋아서 히죽히죽 웃는 사람이 되고 일조량이 적은 겨울이 되면 겨울잠을 자는 곰이 되고 싶어 져요. 그래서 동굴로 들어가는 걸 끊임없이 시도하는 사람이 되거나 눈이 오면 휴대폰을 꺼버리고 어딘가에 숨어버리고 싶어요. 그러다 보니 날씨에 따라 일하기 싫어지는 사람이 되기도 해요. 예전에는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그걸 눈치채는 게 싫어서  일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으로 보이려고 애쓰기도 했어요. 게으른 사람이라는 평가가 두려웠고 그  예민함이 개인의 성장에는 분명한 방해 요소라고 생각한 적도 많아요. 그때는 왜 그렇게 지나치게 남들을 의식하며 살았는지 모르겠어요. 왜 그렇게 소란스럽고 안달하고 절박하고 어수선하고 고군분투했는지.






다행스럽게 지금은  여러 면에서 편안합니다. 대단한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때를 지나고 삶이란 대단하지도 위대하지도 않다는 걸 알아서 일까요? 보통의 평범한 일상이 날마다 이어지고 있어요. 책을 읽고 도서관에 가고 상호대차를 신청하고 잡다한 글을 썼다가 지우고 차를 마시고 야채를 챙겨 먹고 산책으로 팔천보를 걷고 마지막에는 마트에 가서 돼지고기 앞다리 살을 사 와서 매콤하게 양념을 해놓고 식구들을 기다리는 평범한 날들입니다. 그래도 약간의 변화는 있죠. 월요일엔 월요일의 일이 있고 수요일엔 수요일에 해야 할 일이 있는 식이에요. 매일은 조금씩 다르지만 삶의 단위를 일주일로 바꿔 보면 결국 매주 비슷합니다. 그렇게 지루함이 이어지다 어느 한순간이 잠깐 반짝이는데요  그 반짝거리는 순간은 눈 깜빡하는 사이에 지나가 버려요. 지나갔다는 것도 모를 만큼 빨리 가버리고 바로 평범한 일상이 이어지니까 뭐가 지나갔나? 하는 거죠. 요즘은 그 짧은 반짝임을 놓치지 않고 산다는 게  무척 좋고 그런 사람으로 늙어간다는 것도 기쁘네요. 앞으로도  지금처럼  반복되는 일상이 주는 작은 즐거움을  잘  붙잡고 싶답니다. 여기까지 쓰고 생각하니까 수희님은 요즘 어떤 즐거움으로  일상을 채워가는지 궁금하네요. 이 편지가 즐거움의 작은 일부분을 차지했으면 좋겠다 싶고요.



며칠 전에는 사는 게 힘들어 죽겠다는 사람들을 만났어요. 저에게 어떻게 하면 삶이 평온해지는지 물었는데, 저도 뭐 완전한 평온이란 걸 알지 못하고 그런 게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니까 그럴듯한 답을 해주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비슷한 질문을 받으면 꼭 이 이야기를 해줍니다. 평범하게 사는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서 규칙적으로 생활하지 못하는 건 아닌지 자신의 일상을 돌아보라고요, 자기 일상을 재미있고 화려한 이벤트로 채우려고 하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라고요. 물론 정답은 없습니다만, 내가 안정감이란 걸 느끼기 시작한 건 사소하지만 규칙적인 일을 만들고 일상에서 그걸 지킬 때부터였거든요. 요즘도 저녁 설거지를 끝내고 차 한잔을 앞에 두고  앉으면 자주 생각해봐요. 오늘 있었던 좋은 일과 나쁜 일을 종합해보는 거죠. 신기하게 딱 반반인 날이 많아요. 그저 그  정도로 하루를 보냈으니  딱 좋은 상태라고 여겨요. 그다음엔 정해진 순서처럼 내가 조절할 수 없는 일이  떠오르는데  내 경우엔 결국 돈과 연관된 것들입니다. 내 능력은 여기까지다 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런 씁쓸한 일들, 하지만 그건 신경을 꺼버립니다.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사소하고 규칙적으로 살아가되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돈) 것에는 적당히 신경 끄라는 게 질문에 대한 저의 하찮은 답이네요.  








돈에 신경을 꺼서 그럴까요? 나는 가난합니다. (난데없는 고백 1) 보통의 계산법으로는 그럴 거예요. 그런데 신기한 건 가난한데도 가난하다는 인식이 잘 없어요. 그런 인식이 흐려서 스스로 놀랄 때가 많아요. 가난한 인간이 자신이 가난한지도 모르고 사는 게 맞는 건가? 싶거든요. 그럴 때면 시마자키 도손의 글이 생각나요.



가난이 하는 말

나에게 익숙해지면 안 되네. 날 좀 더 존경해 줬으면 좋겠어. 나한테 청 자를 붙여서 청빈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난 그렇게 차갑지 않네. 난 내가 걸어온 발자국에 꽃을 피울 수 있지. 또 내 집을 궁전으로 바꿀 수도 있어. 난 일종의 마술사야.



나는 가난이 하는 협박이 들리지 않는 사람인가 봐요. 사람들도 나처럼 가난에 익숙해지기 마련인지 오죽하면 이런 글을 썼을까 싶네요. 나는 궁전 같은 집에 관심도 없어요. 누가 100평짜리 집을 준다고 해도 청소할 일이 끔찍해서 거절할 사람이고요.  넓은 집을 관리하려면 드는 시간과 경비를 생각하면 기분이 좋다는 생각보다 번거롭다는 생각이 앞서네요. 그러고 보니 나는 천상 가난을 타고난 사람 같네요.(웃어야 할지) 가난이 어떤 마술을 부리는지, 얼마나 끔찍한 마술을 부리는지 누구보다  알아서인지 가난이 두렵지 않아요. 그래서 심지어는 가난을 무시하는가 봅니다. 이제는  자신에게조차도 성공적으로 보이고 싶지 않아요. 날개 돋친  팔리는 글을  쓰지 못하고 트렌드에 발을 들이는 일도 서툴고 앞을 향해 달려가기엔  체력에 한계가 있고 점점 늙어갈 일만 남았으니까 어쩌면 불행이 도처에 있을 텐데도  믿고 여유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언젠가는 이런 내가 이상해서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속의 가난한 사람들과 나의 모습을 비교해  적이 있어요.


 

가난한 사람들이란 뒤틀린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을 보는 눈조차 전혀 다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곁눈질해보고 언제나 겁먹은 눈으로 자기 주위를 둘러보면서 남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혹시 내 얘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꼴사나운 놈이라고 욕하고 있는 게 아닐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를 살피고 있는 건 아닐까? 나를 흉보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쓸데없는 신경을 쓰게 됩니다.


 

이 문장을 읽고 무척 찔렸던 게 생각나네요. 내가 쓴 글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더라고요. 앗, 내가 이런데,... 나는 가난한 사람이 맞구먼, 아..... 참.... 하면서 웃었어요. 인간은 자기가 어떻게 절망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알면 그 절망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발터 벤야민이 말했다죠. 나는 이 문장을 가난으로 바꿔봅니다. 자기가 어떻게 가난해졌는지 알면 그 가난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 써놓고 보니 억지스러운 말장난 같은데요. 어쨌거나 나는 가난함 속에서도 잘 살아내고 싶었던 것 같아요. 가난을 비껴가지 않겠다는 마음이 컸어요. 가난, 빈곤, 허덕임, 배고픔, 경제적 어려움 같은 단어가 보이면 책이든 뉴스든 무조건 읽었어요. 그렇게 가난의 주변을 돌다가 2019년에 만난 책 빈곤의 여왕을 오늘 소개하려고 합니다.


빈곤의 여왕은 두 시간만 집중하면 완독 할 수 있는 얇은 책이지만 책에 담긴 내용은 가볍지 않아요.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저자가 쓴 소설답게 드라마의 대본을 읽는 느낌이 들어요. 오자키 마사야라는 작가의 첫 소설인데요. 어딘가 약간 엉성한 느낌이 없지는 않지만 내용면으로는 참 좋았어요. 주인공 다치바나 마이코는 개인의 능력과 성실함, 비전 같은 걸 쉽게 묵살하는 방송국 시스템 속에서

AD로 일하다가 그런 상황을 견디지 못해 퇴사를 함과 동시에 여러 가지 안 좋은 일이 한꺼번에 닥쳐 결국 빈곤해집니다. 빈곤하다 못해 빈곤의 여왕으로까지 불리는 상황이 되는데도 마이코는 무조건 절망하지 않아요. 빈곤해졌다고 해서 자신을 쓸데없이 추긍하지도 않고 닥쳐온 불행이 자신의 성실함과 불성실함이 반반 섞인 탓이라는 것도 순순히 받아들이고 행여 성실하지 않았다고 해도 무조건 부끄러워하지만은 않아요. 완벽한 인간은 없고 완벽하지 않아서 실수하고 여기저기가 터지고 튼튼하다고 믿었던 외투의 주머니에 구멍이 날 수도 있다는 걸 , 통장의 잔고가 0 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어서 좋았어요. 인생의 우여곡절의 책임이 모두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서 나는 마이코가 무척 마음에 들었어요. 사회의 불합리가 자신에게 어떻게 작용했는지 분명히 안다는 점도 멋있더군요.  빈곤의 여왕은 빈곤보다는 현명한 여왕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나에게는 성공보다는 성취의 즐거움을 찾아가는 사람을 바라보는 즐거움이 어떤 건지 알려주는 책이었답니다.












수희님 나는 언제부턴가 하면 된다! 를 비장하게 외치는 사람들을 보면 조금 불편해요. 사람들이 자신의 실패를 인정해야 할 땐 순하게 인정했으면 싶어요. 자신의 실패나 잘못을 지나치게 부끄러워하는 것이 오히려 자만심이 강해 보일 때가 있어요. 자신은 어떤 상황에서든 실패해서는 안 되는 인물인 것처럼 착각하는 거, 다시 말해 자신은 절대 가난하게 살 사람이 아니라는 의식에 줄곧 지배당하는 사람도 대단하다 싶어요. 실패를 인정하고  어떤 부분은 단념도 하고 노력을 해보지만 포기해야 하는 것이 있다는 것에 어느 정도는 익숙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달리 말하면 사회가 어떤 형태든 그 자체가 완벽한 곳이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의 희망은 실현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점을 인정하는 거예요. 일종의 단념 훈련이라고 해야 할까요?  어릴 때부터 조금씩 훈련해 두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단념과 포기까지 갈 때는 엄청난 절망이 따라오겠죠. 그 태풍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폐허를 바라보고 난 뒤에는 생의 다음 순간, 다음 장소로 이동하게 되는 게 아닐까요? 그럼 그 장소에서 또 뭔가가 우릴 기다리는 거겠죠.  



수희님. 나는 겁쟁이입니다. (난데없는 고백 2) 저는 이 나이가 돼도 살아가는 게 무서워요. 평생 해온 게 살아가는 건데도 내일 또 살아야 하는 건 솔직히 무서워요. 아무리 만반의 준비를 해도 어그러지기 일쑤고 실패를 수없이 많이 겪어왔어도 실패를 맞닥뜨릴 때마다 매번 실패가 낯설고 새로워요. 그럴 때마다 어떻게 버티는가가 내 인생의 커다란 질문이었는데요. 나에게 버티는 힘은 잡다한 진지함은 버리고 어쩔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일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은 하나가 더 추가되었어요. 나이 들어도 여전한 겁쟁이의 선택, 그까이 꺼 대충입니다.  어떤 말에 갖다 붙여도 단번에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주는 그까이꺼 대충. 그까이꺼 대충, 그까이꺼 대충, 조금 전에 딸에게 여러 번 써먹었는데  역시 즐겁네요. 수희님도 그까이꺼 대충 지내세요. 사무실 청소도 그까이꺼 대충 하시고요.


그럼 곧 만나요.

 

2021. 11. 18

김설


ps : 편지를 쓰고 보니 침묵이 더 품위 있다는 말이 생각나네요. 품위 그 까이꺼 대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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