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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수희 Nov 11. 2021

시시껄렁함과 심오함

사노 요코 <어쩌면 좋아>

설님. 안녕하세요. 저는 지금 설님이 보내주신 소박하고 품위 있는 꽃들이 꽂힌 꽃병을 바라보며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제가 그 꽃을 전달받은 북토크 자리에서 저는 그렇게 말했지요. 저는 하루에 70퍼센트나 80퍼센트는 회사원(사실 사장…)으로 살고, 나머지 10퍼센트는 주부 및 엄마로 살며, 나머지 10퍼센트 정도가 작가의 삶이라고요. 그러나 고작 10퍼센트밖에 안 되는 그 삶을 빼면, 저는 제가 아닐 것 같다고 말이에요.

요즘은 정말 사이드 잡이니 부캐니 하는 속 좋은 소리를 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꺼져라 이 마귀들아, 하고 소리치고 싶습니다.(성질 좀 죽여야 하는데…) 하나도 제대로 하기 힘든 세상에 두 개나 하라니요. 엄청나게 일을 많이 하는 것도 아니건만, 해도 해도 끝이 나지 않는 일과 미뤄둔 일들에 대한 스트레스와 부담감에 곧 다시 끔찍한 목과 어깨 통증이 시작될 것 같은 몹시 께름칙한 기분이에요.

그리하여 저는 어제 비로소 용단을 내렸습니다. 지금 내 심신은 과열 상태다. 당분간은 잠시 멈춰야 한다. 따라서 이번 주가 지난 후, 다음주부터 12월 초까지 3주 동안 회사 일 말고는 어떤 일도 하지 않을 거예요. 아, 물론 이 편지를 쓰는 것은 빼고 말이에요. 그렇게 생각하니 아이고 이제 조금 살 것 같습니다. 룰루루.


설님. 오늘은 제가 좋아하는 사노 요코 할머니의 책을 가져왔습니다. 혹시 이 책 읽어보셨나요? 제가 가져온 책은 <어쩌면 좋아>입니다. 저는 오래 전에 <사는 게 뭐라고>라는 책으로 이 할머니를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첫 번째 글을 읽자마자 이 할머니에게 푹 빠져 버렸지요. 아침 일찍 홀로 노구를 끌고 커피를 마시러 가는 할머니들(자신도 포함)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아 뭐야, 뭐 이렇게 못되고 웃긴 할머니가 다 있어?! 너무 좋아! 이렇게 되어버린 겁니다.

사노 요코 할머니의 책은 언제 다시 읽어도 좋습니다. 특히 저는 그 자유분방함과 못됨이 좋습니다. 나이든 사람들은 왜 저렇게 느끼한 소리만 하는 걸까, 나도 그렇게 되려나, 하고 불안해 했었는데 사노 요코 할머니는 달랐습니다. 누구나 마음 속에 꽁꽁 숨겨 들키지 않으려,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못됨과 못남을 사노 요코 할머니는 말 그대로 힘차게 긍정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다못해 암 수술을 받고 통증 때문에 데굴데굴 굴다가 별 수 없이 한류 드라마와 배용준에 빠진 이야기에조차 웃을 수 있습니다. 아, 이거 웃으면 안 되는 얘긴데 어쩌지, 하면서요.


싱글벙글당은 깨달음의 세계나 세속의 세계 그 어느 쪽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말만 한다. 하지만 도움이 되지 않은 이야기만큼 사람을 빨아들이는 게 있을까. 쓸데없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묘미 아닌가.


이 책 <어쩌면 좋아>는 <사는 게 뭐라고>와 별반 다를 바 없는 그냥 슬렁슬렁 쓴 산문집입니다. 사노 요코가 기타가루이자와라는 시골 마을에 집을 짓고 살면서 보낸 생활을 그리고 있는데요, 뭐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시골 마을 이웃들의 이야기, 벌에 쏘인 이야기, 고양이가 병에 걸려 죽는 이야기, 잘생긴 남자 이야기, TV 프로그램 감상, 한밤중에 어두컴컴한 온천에 들어가 목욕을 한 이야기 같은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사노 요코라는 한 인물을 여과한 현실은 뭔가 다릅니다.


나는 후네를 볼 때마다 암에 걸렸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인간이 놀라는 모습을 떠올렸다. 나는 거의 하루 온종일 후네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거의 하루 온종일 인간이 죽는 방식을 생각했다. 생각할 때마다 숙연해졌다. 나는 이 작은 짐승보다 못하다. 생명체의 숙명인 죽음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이 작은 생명체의 시선을 보고 나는 기가 죽었다. 그 의연함 앞에서 부끄러웠다. 내가 후네였다면 울부짖고 신음하며 고통을 저주했을 것이다.
나는 후네처럼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달까지는 갈 수 있어도, 후네처럼 죽지는 못한다. 달까지 가기 때문에 후네처럼 못 죽는다. 후네는 소란 떨지 않고 죽었다.
아주 먼 옛날, 사람도 어쩌면 후네처럼, 후네 같은 눈을 하고, 소란 떨지 않고 죽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집 고양이 죽었어요”하고 아라이 씨에게 보고했더니, “결국”하고 아라이 씨는 예사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설님. 시시껄렁한 이야기도 심오하게 들리게 하는 비법은 무엇일까요? 심오한 이야기를 시시껄렁하게 질러 버릴 수 있는 그 여유와 배짱은 대체 어디에서 올까요? 그건 어쩌면 사노 요코가 경계의 안쪽과 바깥을 넘나들 수 있는, 그런 사람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일본인이면서도 일본의 바깥에서 일본인을 봅니다. 여자이면서 여자의 바깥에서 여자를 보고, 할머니이면서 할머니의 바깥에서 할머니를 봅니다. 그리고 또 인간이면서 인간의 바깥에서 인간을 봅니다. 그리하여 세속적인 것과 세속을 뛰어넘는 것을 휘휘 뒤섞어, 별 노력 없이도 그럴 듯하게 맛있는 요리를 내놓는 것처럼 이런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세상을 옆에서 볼 뿐이라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마음 편한 일인가. 노년이란 것은 신이 내려주신 휴식이다. 온갖 의미에서 현역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쓸쓸한 일만은 아니다. 폭신폭신하니 기쁜 일이기도 한 것이다.


사노 요코 할머니는 수도 없이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합니다. 전쟁 후 굶주리던 시절과 오빠의 죽음에 대해서 엄마에 대해서 계속 계속 이야기를 합니다. 지치지도 않고 합니다. 그건 박완서 할머니와 똑같습니다. 저는 이렇게 잊지 않는, 질릴 정도로 잊지 않는, 무서울 정도로 잊지 않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참 징글징글도 하다, 하고 생각하며 계속 읽습니다.

그런데 저는 사실 박완서 할머니의 책을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너무 유명한 사람이니까 알고는 있었지만 너무나 유명해서 손이 잘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30대 중반쯤에 <나의 여행가방>이라는 여행에 관한 산문집을 읽었는데 꽤 재미있었어요. 그렇다고 해도 큰 매력을 느끼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박완서 할머니의 소설을 본격적으로 읽게 된 것은 최근 2~3년간입니다. 재미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문장과 마음이 같이 달려가는 것이 좋았습니다.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이해할 것 같은 느낌이, 그의 문장에 제 마음이 착 달라붙은 채 움직이는 느낌이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그 거침없음, 그 나쁨이 좋았습니다. 이렇게 징글징글하게 못될 수 있다는 것이 멋졌습니다.

착한 사람들과 착한 문장들로만 가득 찬, 거대한 치즈 케이크 속을 헤엄치는 것만 같은, 담양 죽녹원 같은 데라도 가서 “난 이 책이 너무 너무 너무 싫어!!!” 하고 외치고 싶은 책들을 연달아 읽다가 박완서 할머니의 책을 읽으면 시원한 동치미 국물을 들이키는 것처럼 속이 뻥 뚫렸습니다.

사노 요코 할머니의 못됨처럼 박완서 할머니의 못됨 역시 결코 타인을 향한 화살이 되지 않을 못됨입니다. 이 할머니들은 자기가 제일 못됐다는 것을 압니다. 어쩌면 그것이 인간이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인지도 모릅니다. 내가 제일 못된 놈이라는 걸 아는 것.


설님. 사실 말이에요, 저는 이상하게도 한국 소설에는 손이 가지 않아서, 박민규나 김영하 같은 제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 전성기였던 몇몇 작가들의 책을 제외하고는 읽어본 것이 별로 없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요즘도 읽기는 하는데 기억나는 것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것은 나를 위한 이야기야, 하고 느낀 것도 별로 없습니다. 그것은 대체 왜일까요.

얼마 전에 그 일에 대해서 생각을 좀 해봤습니다.(저는 온갖 것들을 다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어쩌면 그 소설들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내 이해력이 심하게 딸려서가 아니라(어쩌면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저 그 소설들이 한국어로 쓰여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제 생각에 모국어라는 것은 그 언어를 쓰는 이의 생각과 마음마저 구조화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한국어의 마음으로 쓰인 한국어로 된 이야기를 읽다 보면 왜인지 부끄러워지는 겁니다. 마치 외국의 호텔 수영장에서 ‘아무도 날 모르니까 상관 없어!’ 하고 비키니를 입고 뱃살을 출렁거리며 신 나게 놀고 있는데, 어딜 봐도 한국인인 사람을 맞닥뜨린 것과 비슷한 기분입니다.

어딜 봐도 한국인인 사람은 정말이지 어딜 봐도 한국인입니다. 단지 외모 뿐만이 아닙니다. ‘아, 나 저 사람 알 것 같아’ 의 느낌이 한국 사회의 모든 것들로부터 최대한 달아나고 싶어 여기에서 이 꼴로 있는 저 자신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그 표정, 그 몸짓, 그 행동. 그것은 내가 너무나 잘 아는 것이며 제게도 있는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모국어로 쓴 이야기를 읽을 때 저는 어쩐지 부끄러워집니다. 모국어의 세계 속에 갇힌 이야기를 읽을 때면 더 그렇습니다. 하지만 가끔 어떤 작가의 세계는 모국어를 뛰어넘지요. 박완서의 소설을 읽을 때 저는 그런 기분을 느낍니다. 너무나 한국적임에도 불구하고, 박완서의 이야기들에는 이 징글징글한 모든 것들을 바깥에서 바라보는, 그리고 결국 그 경계를 뛰어넘는 쾌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봉준호의 영화도 그렇겠지요.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살고 있다. 사는 동안은 살아가는 것 말고는 달리 없다. 산다는 건 뭐냐. 그래, 내일 아라이 씨네로 커다란 머위 뿌리를 나눠받으러 가는 거다. 그래서 내년에 커다란 머위가 싹을 낼지 안 낼지 걱정하는 거다. 그리고 조금 큰 어린 꽃대가 나오면 기뻐하는 거다. 언제 죽어도 좋다. 하지만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여기 이 일본에서.


설님. 저는 착한 것을 좋아합니다.

뜬금 없지요. 자기는 못된 주제에 착한 것을 좋아한다니요. 하지만 저는 착한 사람이 좋습니다. 대하기 어렵지 않은 사람이 좋습니다. 친절한 사람이 좋고 다정한 사람이 좋습니다. 매력적인 사람보다 편안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무례한 사람을 싫어하고 눈치 없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그 중에서도 못된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싫습니다.

그러나 가끔 저는 무례하고 눈치 없고 못된 사람인 것만 같습니다. 제가 가진 증오심의 일부는 제 자신을 향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착하고 대하기 어렵지 않고 친절하고 다정하고 편안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순전히 노력하는 것일 뿐, 저는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또 착한 것을 싫어합니다.

아니, 저는 순진한 것을 싫어합니다. 이 세상에 무해한 사람이 있다고, 무해한 관계가 있다고 믿는 순진함에, ‘무해’라는 단어 자체의 순진함에 소름이 돋습니다. 그 순진함은 맹목적이라 사악한 구석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을 믿지 않습니다. 좋아할 수 없습니다. 자기 안의 사악함을 세계의 책임으로 떠넘기고, 자신은 언제까지나 무해하고 무구한 아이의 입장으로 살아가겠다는 뻔뻔함에 치를 떱니다.

그러다가 저는 뱀처럼 기분 나쁜 제 마음의 일부에 놀랍니다.


사노 요코 할머니의 책을 읽을 때마다 제 마음은 순수해집니다. 이상하게도 그렇습니다. 이 할머니의 이야기에는 순수함이 있습니다. 순수함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밝고 착하고 따뜻한 것만은 아닙니다. 순수함은 정리되지 않은 방처럼, 아이가 되는 대로 그린 벽화처럼, 선과 악과 밝음과 어둠이 마구 뒤섞여 있는 것입니다. 저는 실컷 웃고 울고 소리지르고 화내고 미워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풀이 죽었다가 다시 용기백배해집니다. 그 후의 마음은 마치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맑습니다. 태풍이 휩쓸고 지나갔기 때문에 더 맑은, 그런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여전히 착한 것을 좋아합니다.

피천득 할아버지의 말처럼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모두를 사랑하며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눈이 내리는 날에는 홀로 거리를 걷고 싶습니다. 착하고 나쁜 나와 함께 걷고 싶습니다. 그런 날에는 모두를 용서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아주 잠깐이라도, 그렇게 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2021. 11. 11

착하고 못된 수희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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