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 (은모든)
수희 님 안녕하세요.
금요일 아침입니다. 주말이 시작되는 날이라 수희 님 마음도 조금 편하겠구나 짐작해 봅니다. 지금 사는 집은 동남향이라 햇빛이 귀해요. 내가 자주 앉아있는 식탁까지 햇살이 들어와 있는 시간은 아침에 잠깐인데요. 짧은 시간이라서 소중하고 그래서 최대한 느긋한 기분으로 앉아있곤 합니다. 지금 그곳에서 편지를 씁니다. 요즘은 날씨가 정말 좋죠. 길을 걷다가 만나는 풍경이 영화 속 장면 같아서 감탄을 합니다. 리처드 기어가 주연을 맡은 영화 뉴욕의 가을의 배경이 이랬었나? 생각해요. 지난 며칠 동안은 야외에서 계절을 즐기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요. 내가 가을을 즐기는 방법은 제법 긴 산책이에요. 결코 운동이 될 수 없는 속도로 걷습니다. 주로 혼자입니다. 산책을 나가는 시간에 함께 할 가족도 친구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누군가가 함께 하자고 해도 달갑지는 않아요. 걷는 속도가 느려도 너무 느려서 같이 걷던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다 지쳐서 뒤로 넘어갈 것 같다고 해요. 속이 터져 버릴 것 같다고요. 동네 친구가 딱 한 명 있는데 언젠가 그 친구가 산책이나 할까? 하고 물었을 때 나의 느린 걸음에 대해 미리 말해줬어요. 상관없다고 괜찮다고 하더군요. 그리고는 산책이 끝나고 그 친구가 말했어요. 그냥 혼자 다니라고요. 뜬금없는 곳에서 멈추는 것도 이상하고 '아, 이쯤에서는 쉬겠지?' 하고 예상한 시간보다 더 일찍, 더 자주 쉬는 통에 차라리 중간에 확 누워버리고 싶었다나요?
이틀 전에는 몇 년 전부터 조금씩 써놓은 메모 같은 글을 다시 읽었습니다. 내용은 역시 시답잖은 것들이었고 건질 만한 글이 하나도 없어서 웃음이 날 지경이었어요. 오래전에 쓴 글을 읽는 일은 언제나 부끄럽고 곤혹스럽지만 나를 알아내는 데는 그만한 일도 없어요. 그 글을 쓸 당시의 마음들과 시간이 현재로 이동하면서 서서히 달라지는 나를 바라보는 거죠. 글을 읽으면서 새삼 깨달은 건 저라는 사람이 일부러 명랑하려고 애쓰며 산 사람이라는 사실이에요. 낙천적인 사람을 보면 그 낙천을 배우고 싶어서 안달을 했었고. 사물의 어두운 면을 보는 게 습관처럼 몸에 붙어있어서 그걸 떼어내려고 무던히도 노력했었죠.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는 필연적으로 가식이 있었을 거고 무척 부자연스러운 사람이었을 거예요. 그런 모습이 고스란히 글 속에 담겨있어서 얼굴이 붉어지더라고요. 그때는 도무지 삶도 나도 믿을 수가 없어서 그냥 눈앞에 보이는 것, 즐거운 순간이나 고통스러운 순간에 몸을 던지는 일이 많았어요. 마음속에는 항상 게으름을 부리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막상 게을러도 되는 때가 오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굴었어요. 필요 이상으로 바쁘고 필요 이상으로 일하고 필요 이상으로 말하고 심지어 필요 이상으로 웃고 울었어요. 그렇게 오래 살아도 지치는 않는 사람들이 꽤 있나 본데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꽤 오랜 시간 모르고 살았었죠. 아마 인생에 커다란 사건이 없었다면 지금까지도 필요 이상으로 무언가를 저지르면서 살았을지도 몰라요.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런 일이 생기죠. 나를 완전히 변화시키는 어떤 사건 말이에요.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바꾼 굵직한 일을 설명할 때 흔히 말하잖아요. 그 일이 있기 전과 있고 난 후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삶에 불쑥 나타나는 그 일이 나에게는 남들보다는 조금 이른 부모님의 죽음이었어요. 엄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십 년 동안 병원 생활을 하셨고 아빠는 엄마가 떠나고 3년 뒤에 가셨으니 죽음이라는 것이 13년 동안 내 삶을 휘저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어요 그 세월 동안 많은 걸 목격했고 생각이 많은 부분 달라졌어요. 그 변화 가운데 가장 재밌고 놀라운 일은 부모님의 죽음 앞에서 내가 내 인생을 설렁설렁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었어요. 그저 그날그날 마주한 문제를 융통성을 최대한 끌어올려 해결해 나가고 있더라고요. 쉬운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지만 또 못해낼 것도 없다는 생각도 들면서 이런 게 정신력이라는 건가? 이제 사는데 여유라는 게 조금 생겼네? 했었죠. 지금 생각해도 내 뒤통수를 쓰다듬어 주고 싶네요.
수희님
어제부터 저는 앞으로 먹어야 할 약이 하나 더 늘어났어요. 약을 세어보니 비타민을 포함해서 총 9개의 알약을 삼켜야 하더군요. 대부분의 지병이 그렇듯 치명적이지는 않아서 관리만 잘하면 현재의 상태를 그럭저럭 유지할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몰라요. 경험이라는 건 그런 거죠. 삶의 우선순위가 정리되는 것, 그래서 매일매일 큰 기쁨보다 작은 기쁨에 매달리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요. 그래도 내가 내 몸을 모를 리 만무하지요. 나는 내가 아프다는 걸 느낍니다. 저 멀리서 죽음이라는 것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아요. 경험이라는 것은 우선순위를 정리해 주기 전에 많은 걸 짐작하게도 만드니까요. "당신의 주변을 서성이는 죽음에 대해 말하기에 당신은 너무 젊습니다."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많은 건 고마운 일이지만 죽음을 떠올리게 할 만한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는 사실 작은 위안도 안 되는 말이랍니다.
그런데 괜찮아요. 괜찮은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 괜찮습니다. 언젠가 오게 될 죽음에 대해 조금 산뜻한 마음이 되고 싶어요. 어딘가에 조금 괜찮은 죽음은 없나? 계속 두리번거렸죠, 그러다가 [안락]이라는 제목에 시선이 머물러 읽게 된 책. 은모든 작가의 소설에 대해 얘기하려고 합니다.
소설은 안락사를 선택하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는 할머니가 주인공이에요. 저는 할머니의 성격을 설명해 주는 구절이 마음에 쏙 드는데요. 바로 이 문장입니다.
우선 그분의 삶의 신조를 일러둘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말이 씨가 된다 라는 말이다. 나는 그 말을 할머니에게 배웠다. 자신의 의지를 담은 말을 씨앗으로 하여 싹을 틔우고 열매까지 보시는 분. 그게 우리 할머니였다. 이를테면 할머니가 처음 이대 앞에 밥집을 내고 못해도 오 년 안으로 반지하 신세 면해야지 라고 한 말은 정말 오 년째 되는 해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할머니가 길 하나 건너 이 층 건물로 밥집을 옮기던 날, 장차 가게를 세 딸 중 한 명에게 잇게 하겠다고 공언했는데, 그 말이 결실을 맺은 듯 현재 할머니의 밥집은 작은 이모가 운영하고 있다.
소설 속 할머니는 자기 삶의 전반을 자기의 의지로 만들어가는 사람이에요.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지 않나? 하고 착각하지만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만들어가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워요. 하물며 안락사라니, 죽음의 방식과 날짜까지 자신이 결정해서 죽는다는 건 지금의 현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이야기잖아요. 은모든 작가가 후기에서 말했듯 어떤 희망적인 무드에서 쓴 소설이라서 그런지 적어도 나에게는 판타지를 읽는 기분이 들었어요. 어쩌면 이게 내가 꿈꾸는 죽음이자 마지막 희망 같은 거라고 여겨지기까지 했거든요.
"앞으로 어떻게 사나 하는 것보다 앞으로 어떻게 죽어야 되나 그 생각하느라 바빴어. 너희 애비처럼 내 새끼들하고 눈 한번 제대로 못 맞추고 허망하게 가지는 말자. 그러려면 내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준비를 잘해야 된다. 그런 다짐을 했어."
그러나 스스로 선택한 마지막 순간, 할머니의 표정은 편안했다. 개운하게 가겠다 라던 결심이 그대로 이루어진 듯 모든 짐을 내려놓고 떠나는 할머니의 입 끝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수희님
저는 최근에 이 소설 <안락>이 자주 생각나요, 죽음에 관한 이야기지만 슬프기는커녕 너무나도 산뜻하고 유쾌해서 좋아요. 평소에는 아프지 않던 어딘가가 뜬금없이 아픈 날, 인생의 속도가 너무 빨라 덜컥 조급함이 밀려오는 날, 자글자글한 눈 밑 주름이 깊어져 뭘 발라도 소용이 없음을 깨닫는 때, 참을 수 없는 소변 때문에 화잘실을 수시로 들락거릴 때마다 할머니의 개운한 죽음이 떠올라요. 그렇다고 죽고 싶은 건 아닙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건 저에게 삶을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으니까요. 얼마가 되었든 남은 시간만큼은 평온하고 싶어요. 인생이 계획대로 되는 건 아니니까 어떻게 될지는 정말 모르는 일이지만요.
지난주엔 성능이 좋다는 가정용 혈당체크기 고르고 골라서 샀어요.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약을 먹고 부항을 뜨고 피를 뽑고 몸이 반기는 음식을 먹으며 지내려고 합니다. 다른 집착들은 거의 사라지고 있어요. 그것도 마음에 드는 일 중 하나예요. 어쨌거나 저는 즐겁답니다.
2021. 11. 5
김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