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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수희 Oct 30. 2021

친숙한 어리석음

안톤 체홉, <체호프 단편선> 중 ‘베짱이’


설님.


요즘 저는 <인간실격>이라는 드라마를 보고 있어요. 딱히 재미가 있지는 않지만 그냥 남들 사는 이야기를 보는 기분으로 잠들기 전에 조금씩 보고 있습니다. 나쁜 습관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잠자리에서 드라마를 보는 이유는 더 놀고 싶은데 놀지 못하는 이 현실이 억울해서예요. 잠결에라도 더 놀고 싶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드라마를 보고 있으려니 또 심심한 듯 재미가 있더라고요. 게다가 허진호 감독은 뭘 재미없게 만들 수는 있어도 이상하게 만들 리는 없는 사람이니까요, 그런 면에서 안심하며 보고 있기도 합니다.


사실 초반에는 이 드라마 속의 인물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인간들이 대체 무슨 소리들을 하고 있는 거야?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그렇게 불만스러운 마음으로 틀어두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천천히, 아주 느리게, 눈치채지 못할 만큼 조금씩 인물들은 변화해 갑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들 하지요. 하지만 저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변화한다고 믿습니다. 어쩌면 사람이 변하는 것은 너무나 느려서, 어쩌면 대륙이 움직여 산맥을 밀어올리는 속도만큼이나 느려서 대개 그 사실을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움직이고 변화하고 성장하고 쇠퇴하지요. 인간 역시 그런 변화의 과정 속에 있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변화는 직선적이 아니며 지진그래프처럼 들쭉날쭉하기도 하고, 저만치 나아갔다 다시 튕기듯이 제자리로 돌아오기도 하고, 그러다 결국 그 궤적은 원을 그리기도 하며, 또 어떤 때에는 나선을 그리기도 합니다. 흐흣.


사실 저는 이 드라마의 여주인공 이부정이라는 여자가 너무 싫었어요. 이 역할을 맡은 여배우의, 어쩐지 응석을 부리는 듯한 표정과 말투와 몸짓까지 더해져서 저는 아마도 이부정이라는 여자의 친구가 될 수 없을 것 같다고 느꼈지요.


저는 이부정처럼 세상 모든 고뇌와 비운을 한 몸에 짊어진 듯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거리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하지요. 저 사람은 어쩌면 자기가 비극의 주인공인 것이 만족스러운 게 아닐까? 어쨌든 주인공은 주인공이니까. 자기가 만든 비극의 주인공. 그런 생각을 하며 주인공은커녕 하나마나한 소리나 던지며 눈을 흘기는 동네 아주머니 역할에 딱인 저는 담벼락 뒤에 숨어 드라마 속의 그 여자에게 몸서리를 쳤습니다.


그런 이부정은 얼마 전 읽은 유명한 작가의 첫 장편소설에 나오는 여주인공을 떠올리게 했어요. 저는 그 책이 너무 재미가 없었고, 설정은 요즘의 그래요, 그놈의 여성 서사를 그대로 옮겨놓아 ‘이거 너무 안일한 거 아닌가’ 싶기도 했고, 특히나 여주인공이 너무 싫었습니다.


그 여자는 이부정과 비슷했습니다. 스스로 만든 비극의 주인공. 자기연민에 빠져 허우적대는 여자.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이걸 계속 읽어야 하나 말아야, 이런 책을 붙잡고 있을 만큼 내 인생이 한가한가, 하고 고민하다가 뭐 어쨌든 안 읽히는 책은 아니니까 그냥 읽어보자, 하고 참고 읽었습니다.(저는 의외로 참을성이 많은 타입입니다.)


그러다가 이야기가 마지막 부분에 도달했을 때 저는 찔끔 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건 이야기의 힘이었어요. 긴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어쩔 수 없이 울고야 마는 것,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쩔 수 없이 그 이야기에 마음이 흔들리고야 마는 것.


그러고 나니 그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쩌면 세상에는 이 여주인공 같은 사람들이 나 같은 사람들만큼이나 많겠구나. 나는 그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과 선택 같은 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쉽게 비웃었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도 저는 그 책을 좋아할 수 없었으며 특히 여주인공은 더더욱 좋아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조금은, 아주 조금은 그런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여전히 그런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는 없을 것 같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내 이웃이거나 동료라면 그들을 쉽게 나약한 인간이라 매도해버리지는 못하게 된 것 같아요.


아니 또 모르지요. 언젠가 그들의 마음을 통렬하게 이해할지도요. 고작 그깟 일로 왜 죽어? 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쪽에서, 그깟 일로도 죽는 것 말고는 답이 없는 사람들의 쪽으로 옮겨가게 되어버릴지도요. 뭐, 아니면 여전히 그들에게 진저리를 칠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인간은 살아보지 않은 인생에 대해서는 뭐라 말할 자격이 없는 법이지요.


자, 자, 서론은 그만. 이제는 제가 좋아하는 책에 대해 이야기해 볼게요. 지난번 설님의 편지에서 <체호프 단편선>의 ‘티푸스’ 이야기를 듣고 저는 '응? 그런 단편이 있었나?' 하고 저희 집에도 있는 그 책을 펼쳐보았어요. 있더라고요. 생각보다 굉장히 짧은 단편이었는데 설님이 길고 깊은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그 단편의 의미가 더 크게 다가오는 느낌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그 책에서 '베짱이'라는 단편을 가장 좋아합니다. 그 이야기를 읽고 나서 저는 약간 혼란스러운 기분이 들었고, 그런 다음에는 이 단편을 여러 번 다시 읽어봤습니다. 그리고나서야 제가 혼란스러웠던 이유를 깨달았어요. 그것은 저의 콤플렉스를 체홉이 이 이야기에서 정면으로 다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이 남자에겐 뭔가 강렬하고 압도적인 곰 같은 구석이 있지 않아요?



젊고 매력 넘치는 여자 올가 이바노브나는 드이모프라는 가난한 의사와 결혼했습니다.이 남자는 한마디로, 평범하다 못해 재미없는 남자입니다. 예술적인 재능을 타고난 올가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남자이지요. 사람들은 왜 그녀가 저렇게 재미없는 남자와 결혼했을까, 궁금해합니다.(요즘이었다면 다들 시집 잘 갔다며 덕담을 던졌겠지만, 체홉의 시대에는 아직 아니었습니다.)


올가 이바노브나의 결혼식에는 친구들과 점잖은 지인들이 모두 참석했다.
“저 사람 좀 봐. 정말 뭔가 있는 것 같지 않아?”
그녀는 자기 남편 쪽으로 고갯짓을 하며 친구들에게 말했다. 마치 왜 그처럼 단순하고 지극히 평범해서 도무지 볼 것 없는 남자에게 자신이 시집갔는지를 설명하고 싶다는 투였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올가가 왜 드이모프와 결혼했는지를요. 아마도 자신만을 바라보는 그 순수한 눈빛에 빠졌던 게 아닐까요. 올가는 자기 선택을 합리화하는 데 능한 여자라서(보통 자기애가 지나친 사람들이 그렇지요), 사람들에게 자신이 남편을 선택한 이유를 애써 납득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녀의 남편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정말이지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거든요.


올가의 삶은 바쁩니다. 그녀는 온갖 예술활동 및 예술가들과 사교활동을 하느라 매일 매일 장윤정 부럽지 않은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습니다. 그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비범하고 예술적이고 우아하며 매력적인 재능을 칭송합니다. 제대로만 한다면 저 여자도 정말 대단한 무언가가 되어 있을 텐데!


네, 우리 주변에도 이런 사람들은 많습니다. 제대로만 하면 뭐든 잘할 사람들. 하지만 제대로 하는 사람은 정말로 적지요. 아마도 올가는 예술가라는 직업의 실체, 그러니까 골방에 몇날 며칠, 몇 달 때로는 몇 년을 틀어박혀 홀로 고뇌하고 또 고뇌하는 일을, 그렇게 몸부림을 쳐봤자 고작 단어 하나를 쓰거나 선 하나 긋는 것이 다인 그런 하루하루를 견딜 수 없을 겁니다.


지금 왕성히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들, 그들보다 더 재능있는 사람들이 분명 이 세상에는 차고 넘칠 정도로 많을 겁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적지요. 예술가에게는 집념이 필요합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무슨 일이 있어도, 아무도 이걸 좋아해주지 않더라도, 결국 헛수고가 되더라도 어쨌든 끝을 보겠다는 집념 말이에요.


하지만 우리의 올가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은 예술 자체보다는 예술가들과의 교류입니다. 골방에 틀어박히기에 그녀는 사람들을 너무나 좋아하고, 사람들 속에 있는, 그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자신을 너무나 사랑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유명한 사람들과 재빨리 사귀고 가까운 사이가 되는 일에서만큼 그녀의 재능이 돋보이는 경우는 없었다. 누구든 그녀와 처음 만나서 다만 몇 마디라도 칭찬을 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면 그녀는 그날로 당장 그 사람과 친구가 되어 자기 집으로 초대하는 것이었다. 새로 친구가 생기는 날은 그녀에게 대단한 축일이었다. 그녀는 유명한 사람들을 숭배하고 자랑스러워했을 뿐 아니라 매일 밤 꿈속에서 이들을 볼 정도였다. 그녀는 이들을 갈구했으며 다른 무엇으로도 그 갈증은 채워질 수 없었다. 한 무리가 떠나가서 잊혀지면 그 뒤를 이어 새로운 무리가 나타났지만 그녀는 이들에게 금방 익숙해지거나 싫증을 느꼈다. 그러고는 탐욕스럽게 새로운 거물들을 찾고 또 찾는 것이었다. 무엇 때문일까?


그러게요. 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자신을 위해 헌신하는 남편은 안중에도 없는 올가는 예술가들을 쫓아다니다가 그들 무리와 함께 수개월에 걸친 여행을 하게 되고, 결국 한 화가와 바람을 피우기에 이릅니다. 그러다가 올가와 화가는 남편이 보는 앞에서 사랑싸움을 하는 것조차 아랑곳하지 않게 되지요. 불쌍한 드이모프는 그것을 모른체하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한번은 그녀가 랴보프스키에게 자기 남편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남자는 자신의 관용으로 나를 억압하고 있어!”
이 문구가 그녀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래서 자신과 랴보프스키와의 로맨스를 알고 있는 화가들을 만날 때마다, 그녀는 남편 이야기를 하면서 손으로 힘찬 제스처를 지어 보이는 것이었다.
“그 남자는 자신의 관용으로 나를 억압하고 있어!”


체홉은 이 소설을 실제로 그가 아는 지인 커플에게서 영감을 받아 썼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그 커플을, 특히 여자 쪽을 아주 혐오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종종 코웃음을 치는 것 같은 문장들이 등장하지요. 아마도 이 문장을 쓰면서 체홉은 올가를 비웃고 또 비웃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현상을 대충 한번 생각한 후, 어쩐지 '있어 보이는' 단어들, 유행하는 단어들로 라벨링을 하는 것은 너무나 쉽고 또 유혹적입니다. 자신에게 힘이 생긴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겠지요. 똑똑해지고, 유능해진 기분이 들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현상 아래의 진실은 그렇게 쉽게 라벨을 붙여 납작하고 균일하게 만들어버리기에는 너무나 심오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것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하고 깊이, 그리고 오래 생각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그리고 제 스승님인 우치다 타츠루 선생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아무튼 체홉은 이렇게 어리석은 올가를 벌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의 남편 드이모프가 죽음을 맞게 하지요. 그것도 전염병에 감염되어 방 안에서 홀로 죽어가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론적으로 올가에게 더 큰 벌이 되었지요. 그제야 올가는 지난날의 과오를 후회하고 또 후회합니다.


올가 이바노브나는 침실에 앉아서 이것은 남편을 속인 죄로 신이 자신을 벌주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말없는, 속삭임조차 없는, 불가해한 존재, 수줍음으로 인해 개성을 빼앗겨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존재, 지나친 선량함으로 가냘픈 이 존재가 저기 어딘가 자신의 소파 위에서 아무 불평도 없이 고통받고 있다.
(중략)
그녀에게는 이미 볼가 강에서 보낸 달빛 어린 저녁도, 사랑의 고백도, 오두막에서의 시적인 생활도 기억나지 않았다. 오로지 생각나는 것은 자신의 공허한 변덕과 어리광 때문에 손발이 온통 더럽고 끈적거리는 무언가로 뒤덮였으며, 그것은 앞으로 결코 씻어낼 수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저는 올가 이바노브나를 체홉이 표한 대로, 베짱이라고 생각합니다. 체홉이 혐오했던 것은 아마도 그 여자의 ‘품위 없음’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값싼 행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그 천박함에 체홉은 혀를 찼겠지요.


저에게는 늘 부끄러움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제가 멍청하고 머리가 나쁘다는 것은 매시간 매분 매초 느끼고 있는데다 이렇게 만천하에 그 사실을 밝혀도 별로 부끄럽지 않지만, 정말 부끄러운 것은 뭐랄까요, 저의 ‘건전함’ 입니다. 그게 저의 콤플렉스예요.


일례를 하나 들어드릴게요. 제가 학교에 다닐 때 시험이 끝나면 전교 등수를 표로 만들어 교실 뒷편에 붙이곤 했습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걸 너무 싫어하거나 심지어 울곤 했어요. 저는 그 애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왜? 왜 우는 거야? 공부를 안 했으니까 당연한 거 아니야? 공부를 안 할 때는 이런 결과가 나올 줄 몰랐던 거야?


그래요. 저는 사실 그 표를 붙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기대하기도 했어요. 그건 제 등수가 앞자리에 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고(시골 학교였으니 그랬겠지요), 그 인과관계의 확실함이 저에게 일종의 산뜻한 기분을 주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 기억을 떠올릴 때 저는 웃기기도 하고, 숙연해지기도 하며, 그와 동시에 서서히 퍼지는 부끄러움 비슷한 것을 느낍니다.


제가 부끄러워하는 '건전함'은 이런 것입니다. 제 안의 건전함은 타인의 어리석음을, 실수를, 부족함을, 실패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쉽게 재단하는 식으로 드러납니다. 그럴 때 저는 제가 부끄럽습니다. 제가 쓴 이야기들에도 그런 건전함이 들어 있습니다. 아니, 제 이야기의 뿌리에 바로 그런 건전함이 있지요.


사람이 건전해서 나쁠 것은 없지요. 하지만 건전함을 내가 아닌 타인에게 강요하게 될 때, 그것은 '바르게 살기 운동본부' 같은 것이 되어버립니다. 네, 바르게 살아서 나쁠 건 없지요. 하지만 바르게 살자고 운동까지 할 건 또 없지 않은가 싶은 겁니다.


그래서 제가 쓴 구절들이 인터넷상을 떠돌아 다니는 것을 발견하면 얼굴이 벌개질 정도로 부끄럽습니다. 이렇게 하면, 저렇게 될 수 있어, 하고 믿는 그 순진무구한 오만함이 저는 부끄럽습니다. 그것들은 때로는 난폭한 흉기가 되어 타인을 멋대로 재단하고 난도질합니다.


그러나 저는 체홉의 이야기들을 읽을 때마다 탈출구를 발견한 기분입니다. 체홉의 이야기들은 단순하고 소박합니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이야기들을 합니다. 거기에는 광기도, 천재성도, 특별함도 없습니다. 가끔은 오래된 구전 동화의 현대판이 아닐까 싶을 정도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비웃고 그들이 그 어리석음 속에서 비극을 맞게 내버려둡니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는 결코 난폭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건 왜일까요?


“드이모프, 당신은 똑똑하고 고상한 남자예요.”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매우 심각한 결점이 하나 있어요. 예술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거예요. 왜 음악과 미술을 거부하지요?”
“이해를 못하니까.”
그는 겸손하게 말했다.
“나는 평생을 자연과학과 의학에 매달렸어. 그러니 예술에 관심을 둘 겨를이 있었어야지.”
“그건 끔찍한 일이라고요, 드이모프!”
“어째서 그렇지? 당신 친구들은 자연과학도 의학도 몰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그들을 비난하지는 않잖아. 모두에게는 각자의 일이 있어. 나는 풍경화나 오페라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이런 생각은 해. 만약 똑똑한 사람들이 그런 일에 자신의 일생을 바쳤다면 다른 똑똑한 사람들이 거기에 대해 거금을 지불하지.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이 필요하니까. 나는 이해를 못해. 하지만 이해를 못한다고 해서 거부한다는 건 아니잖아.”


다시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저는 올가와 드이모프가 처음 나눈 이 대화를 다시 들여다봅니다. 아아, 드이모프는 이렇게나 훌륭한 인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올가는 그 진가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지요.


하지만 또 이런 생각이 듭니다. 드이모프가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올가 같은 여자를 사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요. 어쩌면 그는 올가의 그 매력과 활기에 눈이 멀었던 것 아닐까요. 자신에게 없는 것을 가진 이 여자의 어떤 면을 마치 트로피를 획득하듯 손에 넣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이 남자는 그쪽 방면에 있어서는, 역시 어리석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제게 체홉이 뛰어나 보이는 이유는, 체홉은 언제나 등장인물들의 어리석음을 고립시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상하게도 그 어리석음은 너무나 친숙합니다. 체홉은 그들을 비웃지만 그 비웃음은 어쩐지 타인의 죄를 성토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에게 던지는 조소처럼 느껴집니다.


아니, 그 어리석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필연적으로 품고 살아가는 그런 어리석음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요. 구원은 거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어리석다. 이 문장에 구원이 있는 겁니다. 우리는 이 문장에 희망을 걸어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올가 이바노브나는 그와 함께 했던 자신의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낱낱이 돌이켜보았다. 그리고 그가 참으로 얼마나 비범하고 드문 인간인지, 자기가 알았던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그가 얼마나 위대한 인간인지를 문득 깨달았다. 또한 그녀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모든 동료 의사들이 그를 어떻게 대했는가를 상기하고 그들 모두가 그에게서 장래의 저명인사를 보았으리라는 것을 이제야 이해했다. 벽과 천장과 등잔, 그리고 바닥에 깔린 양탄자가 그녀를 조롱하듯 너울거렸다. 그것들은 마치 <기회를 놓쳤어! 기회를 놓쳤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것과 자기를 끝없이 연민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후자의 경우 유아적인 이기심과 어리석음의 발로일 수도 있지요.


끝없이 내가 제일 아파, 내가 제일 힘들어, 그 인간(그 일)만 아니었다면 내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나 좀 봐줘, 하고 외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제가 <인간실격>이라는 드라마의 이부정과 문제의 장편소설의 여주인공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면 이 세상에는 내 아픔과는 비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아픔들이 있지요. 저는 아이를 잃은 부모들이, 건강을 잃고 생계를 잃은 사람들이, 그렇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다른 이들의 아픔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생각했습니다. 아아 인간은 진정 위대하다.


인간은 어리석은 동시에 위대합니다. 아마도 체홉이, 그 옛날의 체홉이 쓴 이야기들이 현재에도 이렇게 잘 읽힐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인간의 어리석음과 위대함을 동시에 다루는 작가이기 때문이겠지요.


저는 이 이야기의 뒤가 궁금합니다. 올가는 어떻게 살아갈까요? 제 생각에 올가는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올가는 또 사람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살아갈 겁니다. 사람들에게 ‘재능이 있다’는 칭찬을 듣는 상태에 만족하면서요.


그러나 올가는 늙어가고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점점 줄어가겠지요. 그리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재능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고 말겠지요. 그리고 올가는 어두운 방 안에 홀로 앉아 운명과 세상을 한탄할 것입니다.


이런, 저는 또 올가를 벌주고 있네요. 또 모르지요. 올가는 자신의 비통함을 예술로 승화할지도요. 이렇게 저렇게 운이 잘 풀려서 그녀는 예술가로 대성할지도 모르지요. 모르는 거지요. 하지만 저는 남몰래 이 세상의 수많은 올가의 불운을 빕니다. 그것이 저의 사악함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저의 사악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같습니다. 체홉이 저를,  어리석음을 지켜주고 있으니까요.


202110월 30일

40대에도 여전히 어리석은 수희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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