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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수희 Dec 12. 2021

꿈과 책과 힘과 벽

우사미 린 <최애 타오르다>

설님, 안녕하신지요.


드디어 3주간의 글쓰기 휴가가 끝났습니다. 어영부영하다보니 3주는 순식간에 지나가버리더군요. 아침에 일어나서 허리 건강에 좋은 운동을 20분 정도 따라하고 아침을 먹고 사무실에서 먹을 점심 반찬을 준비하고 하루 종일 긴장한 채 일을 하다가 저녁에 집에 돌아와 한숨을 돌리며 멍청하게 TV를 보는, 그런 삶을 3주 정도 살았더니 그나마 한숨을 돌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이게 뭔가 싶기도 하고, 이런 인생에는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아주 잠깐 들기도 하다가, 그래도 열심히 돈을 벌어서 생계를 꾸려 나가는 나 자신의 정수리를 ‘자식 많이 컸구만’ 하고 쓰다듬어 주고 싶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드론 카메라 같은 것으로 제 인생을 내려다보고 있다면, 어이 없을 정도로 한심할 것 같기도 하고 웃길 것 같기도 하네요. 저는 제 인생이 비극처럼 느껴질 때마다 저 하늘 위로 올라가 인공위성이나 드론 카메라 같은 것이 되어보려고 노력합니다. 그 위에서 보면 제 인생은 코미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겠지요. 아무튼 이제 글쓰기 휴가가 끝났으니 자투리 시간을 또 노트북 앞에서 허리가 뒤틀리도록 보내야 합니다. 그 기분은 암울하면서도 즐거운, 복잡한 것입니다.


설님. 이 책 읽어보셨습니까?


얼마 전에 도서관에서 우사미 린의 <최애 타오르다>라는 책을 빌렸습니다. 20대 초반의 젊은, 아주 젊은 작가의 책입니다. 우사미 린은 19살에 등단해 미시마 유키오상을 타고 21살에 이 소설로 아쿠타가와상을 탔다고 합니다. 마치 고교 졸업 전에 수능 만점을 받고 서울대에 조기 입학한 수재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습니다.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말이지요.(아마 토익도 만점을 받고 수업과 교과서 위주로 공부를 했고 평온한 표정에 새침한 성격의 소유자이겠지요… 아마도…) 19살에 저는 한 장짜리 레포트 쓰는 데도 절절맸는데, 어떤 이들의 재능은 이렇게 빠르게 발현되나 보아요.


그러나 이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우사미 린의 화려한 이력과는 대비되는, 모든 면에서 부족한 한 여고생입니다. 소녀는 아이돌 그룹의 한 멤버를 좋아하지요. 그가 바로 소녀의 ‘최애’ 입니다. 그런데 이 소녀는 학교 생활이건 사회 생활이건 좀처럼 적응을 하지 못합니다. 소녀의 유일한 낙은 최애를 좋아하고, 최애가 등장하는 모든 프로그램들, 콘서트들, 행사들을 빠짐없이 관람하고, 최애의 앨범과 굿즈를 사모으는 것뿐입니다. 소녀는 집에서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학교에서는 유급을 하고, 결국 별 수 없이 자퇴를 한데다, 집에서도 쫓겨나다시피 하지요.


출입문을 닫는 데굴데굴 소리, 물결치는 유리문 너머로 들리는 2차 어쩌고 하는 소리, 사치요 씨가 설거지할 때 들리는 특유의 텁텁한 물소리, 환풍기와 냉장고 소리, “아카리, 침착하면 돼. 침착하게 하면 괜찮아”라고 말하는 점장님의 부드러운 목소리, 네, 네, 죄송합니다 대답하지만 침착하다는 게 대체 뭘까, 분주하게 움직일수록 실수를 하고 그러지 않으려고 하면 갑자기 일시정지가 되는데, 이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아직 손님이 있다고 비명을 지르는 내 의식 속의 목소리, 몸속에 퇴적된 그것이 넘쳐서 역류한다. 아까부터 나를 향한 것인지 손님을 향한 것인지 모르게 수없이 밀어 넣은 ‘죄송합니다’에 질식할 것만 같아, 나는 누런 벽지와 벽지가 벗겨진 이음매 부근에 걸린 시계를 훔쳐봤다. 한 시간 일하면 사진을 한 장 살 수 있고, 두 시간 일하면 CD를 한 장 살 수 있고, 만 엔을 벌면 티켓 한 장이 된다. 이런 식으로 견뎌온 여파가 몰려온다. 곤란한 듯이 웃으며 테이블을 닦는 점장님 눈가에도 주름이 새겨진다. - <최애 타오르다>


사실 처음 읽을 때는 그렇구나, 흥 그렇구나 하면서 별 느낌 없이 책장을 팔랑팔랑 넘기는 정도였습니다. 응, 이런 책이 아쿠타가와상을 받는구나, 일본에서는 이런 여성 작가들이 데뷔하고 있구나, 그러고 보니 전에 읽은 <편의점 인간>이나 <보라색 치마를 입은 여자>도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데뷔작이었던 것 같은데 어쩐지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하네? 이 정도 느낌이 전부였다고나 할까요. 일본 문학과 한국 문학은 예전에도 그랬지만 요즘에도 느낌이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뭐가 더 낫고 뭐가 더 못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문제인데요, 적어도 어설프게 어른 흉내를 내지는 않는 것 같아서 읽으면서 마음이 편해지기도 하고, 또 반대로 생각해 보면 왜 이렇게 어리광을 피우는 걸까 싶기도 합니다. 어쩐지 힘이, 그러니까 기백 같은 것이 없어서 김이 빠지기도 하고, 기백 같은 것이 없어서 마음에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책에 대해서 쓰기 위해 발췌해둔 문장들을 다시 읽으니, 마음이 좀 흔들립니다. 제 어린 시절이 떠오르기도 하고 제 어린 딸이 떠오르기도 해요. 모든 것에 무능하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던 중고교 시절의 저는 겉보기에는 화목한 가정의 우등생이었겠지만, 실은 자주 숨이 막혔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되는 엄마의 끝없는 히스테리, 그리고 어디서나 겉도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던 나 자신의 히스테리를 견디기가 힘들었지요. 엄마와 사이가 좋아지게 된 것은 30대도 훨씬 지나고나서부터입니다. 우리는 서로 떨어져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젖을 먹이고 안고 물고 빨며 키운 자식이 결국 나와 상극으로 드러난다는 것은 말이에요.


“공부가 힘드니?”
“뭐, 못하니까요.”
“왜 못한다고 생각하니?”
목구멍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 왜 못하는지 내가 묻고 싶다. 눈물이 솟구쳤다. 흘리기 직전에 여드름 피부에 울기까지 하면 얼마나 추할지 생각해 참았다. 언니라면 이럴 때 넉살 좋게 눈물을 흘리겠지만, 약한 척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못 봐주겠다. 육체에 지는 것 같다. 이를 악물고 있던 힘을 풀었다. 눈가에서도 힘을 빼고 서서히 의식을 옮겼다. 바람이 세차다. 학생 상담실은 산소도 부족해 압박받는 기분이다. 담임은 무턱대고 혼내지 않고, “그래도 역시 졸업은 하는 게 좋아. 앞으로 조금만 힘을 내면 어떨까? 앞으로를 생각해서라도”라고 설득했다. 옳은 말이지만 내 머릿속 목소리는 “지금이 괴로워”라고 외치며 전부 덮어버렸다. 유심히 들어야 할 것과 몸을 지키려고 도피하려는 것 사이에서 더 나은 선택은 도무지 불가능했다. -<최애, 타오르다>


제 딸은 얼마 전에 고등학교 원서를 썼습니다. 그 애는 같은 중학교 아이들이 대부분 지원하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고등학교 대신, 그 학교를 지원했다가 떨어진 아이들이 2지망이나 3지망으로 억지로 가는 그런 고등학교를 1지망으로 지원했습니다. 공부 못하는 애들이 가는 학교라는 소문이 있어서 다들 꺼려하는 학교인데, 딸은 그 학교에 가서 내신이라도 잘 받고 싶다고 했습니다. 뭐, 실은 그 학교가 제 친구가 나온 학교이기도 하고, 제 다른 친구의 딸이 다닌 학교이기도 하고, 그리고 제 친구도 제 다른 친구의 딸도 그 학교를 썩 마음에 들어 해서(축제와 운동회와 특별 활동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는 학교라고 했습니다) 저도 나쁘지 않지, 하고 생각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애는 저에게 묻습니다. “엄마, 내가 만약에 특성화고 간다고 했으면 가라고 했을 거였어?” 그래서 저는 대답했지요. “니가 간다고 하면 가야지.” 그러다가 저는 딸에게 말해주었어요. “먹고 사는 건 뭘 해도 힘들어. 그래도 좋아하는 걸 하면서 힘든 게 나아. 싫어하는 거 하면서 힘든 것보다는.” 딸은 좀 생각하다가 저에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꿈이 없어.” 저는 당연히, 괜찮다고, 벌써 꿈 있는 것도 특이한 거라고, 나중에 차차 생길 거라고 말해줬지요.


얼마 전에 문득 깨달은 것인데요, 어느날부터인가 저는 딸의 방에 불쑥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버렸습니다. 문을 열기는 여는데 문틀 주변에 결계라도 쳐진 것처럼 발길이 멈춰버립니다. 결국 저는 문 틈으로 딸의 눈치를 보며 뭐라고 중얼거린 뒤 문을 닫지요. 설님의 첫 번째 책 제목이 떠오르는 상황입니다. 나는 오늘도 너의 눈치를 살핀다. 아아. 세상에서 가장 슬픈 말. 뭐, 그렇다고 딸과 제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이 어린 친구와는 서로 잘 맞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 실은 정말 힘들었어요. 제 딸이 혹시나 이런 글을 우연히 읽고 상처를 받지 않을까 싶어 걱정이 됩니다. 만약 딸이 제가 쓴 글을 읽게 된다면 그것은 아주 오랜 후이기를 바랍니다. 딸이 제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나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잘 맞지 않는 이유는 제게 무슨 문제가 있거나 딸에게 무슨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너무나 독립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저는 딸에게 꼭 알려주고 싶어요. 물론 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자신은 여전히 사는 게 어렵고 무섭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고 있을 것이고, 그리고 앞으로도 자주 하겠지요. 저렇게 잘났으면서도 결국 소설 속의 부적응 여고생을 통해 자신의 두려움과 어려움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우사미 린처럼 말이에요.


세상에는 친구나 연인이나 지인이나 가족 같은 관계가 가득하고, 서로 작용하며 매일 미세하게 움직인다. 항상 상호 평등한 관계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균형이 무너진 일방적인 관계를 건강하지 않다고 한다. 희망도 없는데 계속 매달려봤자 무의미하다느니, 그런 친구를 뭣하러 계속 돌보느냐느니 한다. 보답을 바라지도 않는데 멋대로 불쌍하다고 하니까 지겹다. 나는 최애의 존재를 사랑하는 것 자체로 행복하고, 이것만으로 행복이 성립하니까 이러쿵저러쿵 잔소리는 하지 말았으면 한다. 서로서로 배려하는 관계를 최애와 맺고 싶지 않다. 아마 지금 당장 나를 봐달라거나 받아주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최애가 실제로 나를 좋게 봐줄지 알 수 없고, 나 역시 최애 곁에 계속 있을 때 즐거울지는 또 다른 문제일 것 같다. 물론 악수회에서 몇 초쯤 대화를 나누면 폭발할 정도로 흥분하지만. 휴대폰이나 텔레비전 화면에는 혹은 무대와 객석에는 그 간격만큼의 다정함이 있다. 상대와 대화하느라 거리가 가까워지지도 않고 내가 뭔가 저질러서 관계가 무너지지도 않는, 일정한 간격이 있는 곳에서 누군가의 존재를 끝없이 느끼는 것이 평온함을 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최애를 응원할 때, 나라는 모든 것을 걸고서 빠져들 때, 일방적이라도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충족된다. - <최애, 타오르다>


제 느낌에 이 이야기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살아간다는 일의 무게에 대한, 마치 거대한 프레스 기계처럼 짓누르는 듯한 삶의 압력에 찌부러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한 소녀의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사는 일은 그저 숨쉬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아서, 전혀 충분치 않아서, 우리는 가장 숙련된 기술자처럼 모든 것들의 밸런스를 미세하게 조정해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일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뜻대로 되지가 않습니다. 지금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지만 지금보다 더 미숙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차가운 바람이 부는 어두운 벌판 위를 얇은 코트를 한 장 입고 걷고 또 걷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몸서리가 쳐지곤 합니다.


 딸도 앞으로 가늠할  없이   춥고 어둡고 무서운 길을 걸어야 하겠지요. 저는  애에게 가능한  최선을 다해  영혼은 무척이나 독립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독립적이라는 것은  모든 어려움과 두려움과 무지의 세계를 뚫고 나가려는 강렬한 힘이라는 것을, 너에게는 그런 힘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요. 제가 만약 빨리 죽게 된다면 무엇보다 먼저 저는 딸에게 그걸  알려주고 싶어요. 그리고 저는  모든 불행을 담보로  딸의 행복을 빌릴  있다면, 기꺼이(물론 잠깐 고민은 하겠지만) 그렇게   있을 정도로  아이를 사랑하고 행복을 기원한다는  역시도요.


하지만 저는 지난번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역시나 뒤에서 지켜보는, 문 뒤에서 서성대는 그런 소극적인 부모로 남을 작정입니다. 네 삶의 모든 어려움과 두려움을 내가 어떻게 해줄 수는 없어. 그건 네 몫이야. 인간이라면 누구나 짊어져야 할 숙명 같은 것이지. 하지만 나는 언제나 문 뒤에 있을 거야. 문을 열면 그 벽 뒤에 우리가 있을 거야. 그런 것을 저는 항상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최애를 둘러싼 모든 것이 나를 불러 일깨운다. 포기하고 놓아버린 무언가, 평소에는 생활을 위해 내버려둔 무언가, 눌려 찌부러진 무언가를 최애가 끄집어낸다. 그래서 최애를 해석하고 최애를 알려고 했다. 그 존재를 생생하게 느낌으로써 나는 나 자신의 존재를 느끼려고 했다. 최애의 약동하는 영혼이 사랑스러웠다. 필사적으로 쫓으려고 춤추는 내 영혼이 사랑스러웠다. 외쳐, 외쳐, 최애가 온몸으로 말을 건다. 나는 외친다. 소용돌이치던 무언가가 갑자기 풀려나 주변 모든 것을 쓰러뜨리는 것처럼, 성가신 내 목숨의 무게를 통째로 짓뭉개려는 것처럼 외친다. - <최애, 타오르다>


<최애 타오르다>의 주인공에게는 ‘자기’가 없어 보입니다. 소녀에게는 오로지 ‘최애’ 뿐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자기’밖에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내 쪽에서만 주고받는 애정. 이 애정의 주도권은, 너를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의 버튼을 누르는 쪽은 오로지 나에게 있습니다.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소녀의 애정은 유치합니다. 하지만 그 유치함을 욕할 수 있을까요. 과연 이 늙은 아주머니에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요.


중년이 되어도 ‘자기’밖에 없는 유치한 영혼들은 수두룩합니다. 격렬한 통과의례를 겪지 못한 이들은 결국 그런 영혼으로 평생을 살다 가는 것이 아닐까요. 적어도 소녀처럼 끝까지 가봐야 하는 거 아닐까요. 최애의 민낯을 보기 위한 시도라도 해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바닥까지 떨어져봐야 하는 거 아닐까요.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요, 얼마 전에 친구와 제주도로 여행을 가서 운전을 하며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내가 어릴 때 좋아했던 가수들, 윤종신이나 김현철 같은 가수들의 새 노래는 너무나 실망스러웠어, 전보다 못하다면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이렇게 주절대다가 생각해 보니(저는 말하면서 생각하는 타입…) 그래도 하고 싶은 걸 어떡해, 하고 싶어서 하는데 그걸 누가 말려, 싶었습니다. 그래, 방금 한 말 취소다 취소. 자기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그걸 누가 말려.


그런데 윤종신이 어떤 프로그램에 나와서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나는 전보다 더 세련되어졌는데, 왜 사람들은 내가 옛날에 만들었던 투박하고 촌스러운 노래들을 더 좋다고 하는 걸까. 나는 여전히 열심히 음악을 하고 있는데 내 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 말을 듣자마자 저는 소리쳤지요. 아저씨, 욕심이 너무 과하신 거 아니에요? 한때 유명했던 가수들 중에 지금까지 살아남아서 방송에 얼굴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 계속해서 노래를 만들고 발표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그 시절에도 약간 애매했던 위치의 윤종신은 그간 수많은 예능 프로그램에(심지어 시트콤과 영화에도) 출연하면서 끝까지 살아남았고, 기획사도 차렸고, 돈도 꽤 벌었겠지요. 거기다가 노래도 계속 만들어서 간간이 히트곡도 만들었지요. 그 정도면 된 거 아닌가요? 돈은 돈대로 벌고, 예술적으로도 인정까지 받고 싶은 거라면 그건 너무 과한 욕심 아닌가요?


저는 제가 한때 좋아했던 종신 오빠의 씁쓸한 고백을 곱씹습니다. 뭐야, 별 꼴이야, 싶으면서도 그 마음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구석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 자신의 위치에서 묵묵히 밭을 일궈야 하는 걸까요? 열심히 하면, 정말 열심히 하면 저는 좋은 것을 만들 수 있을까요? 근데 열심히 하는 건 뭐죠? 저는 왜 이 나이에도 뭔가를 만들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걸까요? 어떻게 이 욕심을 다뤄야 할까요? 인간은 대체 어떻게 망해가야 하는 걸까요? 어떻게 스러져야 하는 걸까요? 어떻게 늙어가야 하는 걸까요?


그러면서 저는 딸과 나눈 짧은 대화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봅니다. 꿈이라는 게 뭘까요. 꿈은 꼭 있어야 하는 걸까요. 꿈이 없는 인생은 인생이 아닌가요. 세상 사람들은 다들 꿈을 품고 살아갈까요. 그 꿈을 다들 실현은 했을까요. 멀쩡히 잘 살다가 어느 날 문득 꿈을 찾아 떠나는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제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저는 분명 꿈을 찾아 떠나온 사람이었습니다. 연극영화과의 입학 원서를 냈을 때 담임은 코웃음을 쳤지요. 저는 그 담임과 정말 사이가 안 좋았거든요. 대학에 가보니 저 같은 어중이 떠중이들이 넘쳐나더군요. 그리고 그 중에는 20대 중후반의 나이 많은 동기들도 있었습니다. 다른 대학을 다니다가, 이 일 저 일도 하다가 영화를 하고 싶어서, 연극을 하고 싶어서 온 사람들이었어요.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지 20년이 지났습니다. 그 중에서 갓 스무 살, 20대에 품은 꿈이라는 불꽃을 여전히 꺼트리지 않은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요. 꿈을 품는 것과 그 불씨를 지켜나가는 것은, 그것을 하나의 커다란 횃불로 만드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누구도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고, 우리 자신도 배우려 한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의 저는요, 잘은 모르겠는데 어쨌든 그 모든 시절을 거쳐온 사람으로서는, 꿈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살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인생이지요. 그리고 가급적 꿈은 직업이 아닌 것이 낫지 않나 싶습니다. 또 자주 바뀌어도 상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이게 하고 싶은데 전에는 그게 하고 싶었고 나중에는 저게 하고 싶어도 괜찮은 겁니다. 꿈이 하나고 그 하나의 꿈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가야만 하는 인생이라니, 그것은 얼마나 무시무시합니까. 아무튼 인생은 좀 흐느적 흐느적거리며, 닥치는 대로 수습하며, 뭐 잘 안 풀려도 이게 내 인생이려니, 하고 받아들이며, 군데군데 숨 돌릴 틈을 만들어두며 사는 게 좋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 딸도, 제 아들도 그렇게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설님. 저는 소설 속의 소녀가 꽤 괜찮은 여자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끝까지 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한없이 비참해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여자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받아들여야 하는 것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라, 왜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묻는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의 마지막 단락에 그런 희망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이 책을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아, 그런 책이 있었어, 중의 하나가 될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마지막 단락의 희망에 대해서는 언제까지고 호감을 품게 될 것 같습니다. 여기에 마지막 단락은 옮기지 않겠습니다. 언제나 일말의 궁금증은 남기는 것이 좋으니까요.


2021년 12월 12일.

밀당을 잘하는 수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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