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설 Dec 19. 2021

책에 관한 편지를 쓰지 못했습니다.

INFJ인간의 사랑


수희님


안녕하세요? 수희 님이 운전을 해서 이천인가를 갔던 날이 어제였던가요? 오후가 되고 제법 큰 눈송이가 떨어지는 걸 무심히 바라보다가 잠시 수희 님을 생각했어요. 예상했던 폭설이라 재설 준비를 충분히 했다는 뉴스를 들으면서도 걱정이 되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괜찮으셨는지요? 눈길 운전의 아찔함과 고독함을 제가 좀 알아요. 25년 동안 운전을 하면서 딱 두 번 예상치 못한 폭설을 만난 적이 있어요. 서른 중반이었을 거예요. 워커힐 호텔 앞 언덕길 한가운데 고립되어 뜬 눈으로 아침을 맞았던 그날은 대한민국 역사상 손에 꼽히는 폭설이 쏟아진 날이라고 했던 기억이 나요. 왜 그런 이상한 날이 있잖아요. "어쩐지 이상하더라니..""오늘 어째 조짐이 안 좋았어." 같은 말을 자주 내뱉게 되는 날이요.

그 이상한 날에 나는 평소에는 절대 하지 않을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어요. 별로 친하지도 않은 여자 후배와 역시 친하지도 않은 남자 후배의 소개팅을 주선했던 날이었거든요. 전화번호만 줘버리면 당사자들이 알아서 만나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굳이 그 자리에 나간 건 여자 후배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두 사람 모두 첫 번째 결혼을 서둘러 정리한 사람들이라서 긴장감이 컸던 상황이었거든요. 그래서 인사만 시켜주고 오자 했던 거였는데 난데없이 엄청난 눈을 만나게 된 거죠. 기름이 떨어질까 봐 시동을 꼈다 껐다 반복하고 오들오들 떨면서 집에 혼자 있을 딸아이 생각에 훌쩍거렸어요. 그러고는 다시는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리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재밌는 사실은 뭔지 아세요? 이틀 뒤에 듣고 보니 글쎄, 그날 집에 가지 못한 사람은  소개팅을 주선한 나만이 아니라는 거예요. 소개팅을 나온 당사자들도 집에 가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요. 눈에 갇힌 두 사람은 첫 만남부터 한 침대에서 자게 되었고 그로부터 두 달만에 결혼을 했어요. 눈은 그렇게 좋은 핑계가 되기도 하죠. 나는 그때 눈이 만들어 낸 낭만에 놀랐고 두 사람이 결혼까지 가기 위해  내는 광속 스피드에 혀를 내둘렀었어요. 눈이라는 게, 더구나 폭설이라는 게 그런 거죠. 세상의 풍경을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꿔 버리는 거예요. 아주 순식간에  온갖 지저분한 것들이 깨끗한 순백색으로 통일되는 거요. 그들이 그날 온몸에 뒤집어쓴 건 눈이 아니라 사랑일 거예요. 예기치 못했다고 말하지만 어쩐지 인생에 한 번쯤은 기다리게 되는 운명 같은 사랑이요.


수희 님, 편지를 여기까지 읽고 난 뒤의 수희 님의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아요. 이 이상한 아줌마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러나... 하는 얼굴이요.




 

네 그래요, 오늘은 책 이야기 말고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지긋지긋한 사랑. 온 세상을 순식간에 순백색으로 만들었다가 다음 날이면 눈이 오기 전보다 더 지저분해지고 질척해지고 치우기 힘들어서 난감해지는 눈 같은 사랑에 대해 짧은 이야기를 하려고요. 저는 사실 사랑 이야기를 좋아하지는 않아요. 사춘기엔 하이틴 로맨스를 읽으며 특별한 사랑을 상상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건 어릴 때 얘기고요.  이상하게 나이가 들수록 이성과의 사랑을 잘 모르겠어요. 대체 사랑은 무엇인가? 그게 무엇이길래 누군가에게는 사랑이 고통이 되고 또 다른 누군가에는 사랑이 행운이 되는 걸까. 그렇다면 불운한 사랑이란 게  존재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막 미친 듯이 궁금하지는 않아요. 사랑이 궁금할 나이도 지났고요. 허물을 벗듯이 벗어놓은, 늘어질 대로 늘어진 수면바지를 다시 껴입는 편안함과 뜨뜻미지근한 느낌, 그것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저는 그런 사랑이 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 이틀 전에 우연히 글을 하나 읽었는데요. 그건 어떤 남자와 사랑에 빠진 여자의 글이었어요. 첫눈에 반한 순간부터 그 글을 쓰는 순간까지 계속되는 설렘과 끓는점을 무시하는 뜨거움 그리고 선을 넘으려는 아슬아슬함을 묘사한 글이었는데요. 그분이 글을 너무나 잘 쓴 탓일까요? 아니면 제가 그 글에 지나치게 몰입한 걸까요? 집에 있지도 않은 대패를 가져와 온몸에 돋은 소름을 밀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답니다.


와.... 사랑 사랑 사랑에 미친 사람. 개인적으로 존경합니다.



내가 왜 두서없는 이런 편지를 쓰고 있나 쓰면서 생각해 봤는데요. 아무래도 지금이 바이오리듬상 남편을 미워하는 주기에 돌입한 탓인 것 같아요

여성의 바이오리듬 주기가 대략 28일이라는 학설이 있어요. 나는 15일 주기 같아요. 15일을 기점으로 남편이 꼴 보기 싫다가 나머지 15일은 그럭저럭 봐줄 만하게 된답니다. 물론 대강 그렇다는 거고요. 어쩌다 일주일 단위로 바뀌기도 하는데요. 그  주기가 짧아질수록 바이오리듬에 휘둘리는 자신이 너무나 피곤하다는 거예요. 그렇게 획획 바뀌는 나를 바라보는 남편은 하도 당해서 그런 건지 침착하고 초연해요. 꿈쩍도 안 하는 바위 같은 점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어요. 그 사람이 줄곧 밉기만 하면 영원히 거리두기를 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미움이라는 감정이 끝없이 지속되지는 않아요. 그렇게 이어온 세월이 별거 기간을 합쳐서 25년이 되었네요.


25년 동안 저는 남편에게서 수없이 많은 약속을 받았어요. 그때도 그 약속들이 결국 허망한 약속이 될 거라는 걸 알았지만 그거라도 안 받으면 불안해서 살 수가 없었어요. 나는 나랑도 약속을 했어요. 앞으로는 쓸데없는 약속을 받지 않기로 나와 약속을 했던 거죠. 지난주에 또다시 굳은 약속을 했어요. 변하지 않는 사람과 변하지 않는 인생에 다시는 약속 따위는 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했어요. 결코 마르지 않았던, 끝없이 깊고 넓은 약속의 강에 삐걱거리는 작은 나룻배를 띄우고 팔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참으며 저어 가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요. 며칠이 지난 지금은 어떻게 하면 그 사람도 나도 각자의 강에서 유유자적할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어요. 분명히 좋은 방법이 생각날 거라고 믿어요.


수희 님

나는 지난 며칠 동안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피곤하다는 생각을 했고 다른 누군가가 되고 싶었어요. 남편의 단점이 생각날 때마다 동시에 내 단점이 끝없이 떠올라서 잠이 들려고 재빨리 이불속으로 들어가곤 했어요. 인생이라는 것은 누구나 그렇지만 내 인생은 유난히 희극과 비극이 정신없이 혼재되어 있어서 이젠 비극인지 희극인지, 희극으로 끝날 지 비극으로 끝날 지도 모르는 상태가 되었어요.

그래서 이런저런 정리가 필요했어요. 책을 읽어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서 이번에는 책에 관한 이야기를 쓰지 못하게 되었답니다. 이 정도의 넋두리는 작가님이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며 이 편지를 썼습니다. 나라는 사람은요. 남의 이야기에도 영향을 잘 받지만 내가 한 말이나 쓴 글에도 영향을 잘 받는 사람이라서요. 내가 한 이야기에 내가 달라지기도 하는 사람이라서요. 나에 대한 농담, 나에 대한 진담을 쓰고 과장하고 축소하고 생략하고 덧붙이면서 나를 다듬는 시간을 갖고 싶었던 것 같아요. 부디 이해해 주시기를 바라요.


오늘부터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는 걸 미뤄두고 책장에 꽂힌 사두고 안 읽은 책을 읽으려고 해요. 재밌는 책을 읽게 되면 편지를 통해 말해 드릴게요. 연말이 지나고 해가 바뀌면 실제로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어쩐지 새 마음을 꺼내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분이 좋네요. 오늘의 편지는 여기서 이만.


2021. 12.19

김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