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수희 Dec 23. 2021

쾌변의 기쁨, 추락의 공포

가쿠다 미쓰요, <행복의 가격>

안녕하세요, 설님.


이 편지 교환, 처음에는 2주에 한 번 껌이지,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1주일에 한 통도 쓸 수 있는 걸?! 하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미쳤나 봐요. 2주는 사실 너무 짧은 시간이었어요. 지난 편지를 보낸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다음 편지를 보내야 하는 때가 찾아와 버렸습니다.


때때로 나는 왜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어딘가에 묶이는 것을 좋아하는 저는 지금의 기분이 아주 편안합니다. 이것은 누가 억지로 묶어놓은 목줄이 아니라 제가 스스로 묶어놓은 목줄이니까요. 저는 목줄에 묶인 행복한 개 한 마리입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사실 요즘 제게는 책 읽을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제가 책을 가장 많이 읽는 시간과 공간은 주로 이동하는 전철이나 버스, 차 안이거든요. 집에서 사무실까지는 도보로 5분이면 충분한 요즘은 도통 전철도, 버스도, 차도 탈 일이 없습니다.


아니, 사실 그것보다는 쉬는 시간을 줄여가며, 잠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어서 빨리 퇴근해서 읽고 싶어질 정도로 재미있는 책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몰라요. 나름 독서의 정체기인데요, 뭐 딱히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책을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성취하기 위해서 읽지 않으니까요. 음, 지금은 딱히 책이 끌리지 않는 시기로구나. 좀 더 있으면 또 책을 읽고 싶어지겠지. 이런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난 주 저는 이천의 한 도서관에 북토크를 하러 갔다가 친구를 만났어요. 실은 이 도서관 사서 선생님이 섭외를 하실 때 도서관에 열심히 다니던 친구가 “나 이 사람을 안다”고 말해줘서 섭외가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이랍니다. 친구와 저는 20년도 더 전, 서울시와 성남시의 경계, 아주 외딴 곳에 있던 기숙사의 옆방에서 만난 사이입니다. 우리는 군인의 자녀였고 그 기숙사는 군인의 자녀들이 대학에 다니는 동안 머물 수 있는 기숙사였어요. 사감도 군인이었고, 군인 버스로 근처 지하철역까지 이동했고, 그 버스를 운전하는 사람도 군인이고, 가끔 군대리아 버거도 나왔던, 아주 군대스러운 곳이었지요.


그 기숙사는 2인 1실이었으나 두 개의 방이 하나의 욕실과 베란다를 공유하는 구조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친하게 지냈습니다. 함께 여행을 가기도 했어요. 저는 그 기숙사가 너무 지긋지긋해서 2학년인지 3학년 때 탈출을 했고, 그 이후로 우리는 서서히 연락이 끊어졌어요. 그러다 제 룸메이트였던 친구가 연결을 해주어서 각기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1살, 2살, 3살 무렵이던 때에 만난 적이 있지요. 그러고 나서 친구에게는 아주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났습니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가슴 아픈 일 중 하나였지요.  


친구를 다시 만난 것은 2년 전입니다. 친구가 도서관에서 우연히 제 이름이 박힌 책을 읽고 그게 저라는 걸 알아차려서, 책에 쓰여 있던 블로그의 주소로 연락을 해온 것이었어요. 2년 전에 다시 만나서 친구는 우리가 만나지 못했던 시간 동안 그 애에게 일어난, 그 일만큼이나 가슴 아픈 일들을 들려주었습니다. 사람의 인생에서 이렇게 불행한 일이 이렇게 잦은 빈도로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싶을 정도의 일들이었어요. 다행히 친구는 그 모든 불행을 견뎌내고, 지금 건강한 얼굴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날, 북토크가 있기 전 도서관의 복도에서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우리는 1초도 고민하지 않고 서로를 와락 끌어안았습니다. 원래 우리는 그런 사이가 아니었는데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 시간이란 얼마나 이상한 것인가요. 사람이라는 것은 얼마나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인가요.


우리는 하룻밤 함께 묵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저는 주로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는 쪽이었지요. 한때 많이 아팠던,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건강해진 친구의 딸이 다니는 승마클럽에 가서 아주 커다란 몸과 아주 슬픈 눈과 아주 선한 긴 얼굴을 가진 말들을 보았고, 눈이 내리는 시골길을 차로 천천히 달렸고, 담배를 피워보고 싶다는 친구와 호텔 베란다에서 담배를 한 대 피웠고, 그렇게 피우자마자 다들 ‘아유, 정말 싫다’ 하고 꺼버렸습니다. 아침에 헤어지기 전 카페에 앉아서 저와 친구는 책 이야기를 했지요. 저는 그날 친구에게서 몇 권의 책을 추천 받았습니다. 모두 읽고 싶어서 저장해 두었어요. 저는 남이 추천하는 책에 딱히 흥미가 가지 않는 편이지만, 그 친구가 추천해준 책은 왠지 믿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음, 무슨 이야기를 하려다 여기까지 온 거죠? 저는 사실 굉장히 가벼운 이야기를 가볍게 쓸 작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설님에게 편지를 쓰다 보면 왠지 슬퍼집니다. 이상하지요. 그런데 그 슬픔은 어쩐지 개운한, 누군가의 앞에서 눈물을 터뜨린 후 무언가가 해소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그런 슬픔입니다. 저는 좀처럼 누군가의 앞에서 눈물을 터뜨리지 않기 때문에 이런 기분은 참 신기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과연 사람들이 좋아할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하지만 이 편지는 누가 좋아할지 아닐지 신경 쓰지 않고 내 마음대로 써보기로 한 것이었으므로, 그냥 이렇게 가보겠습니다.


아무튼 요즘 저는 책 읽을 시간이 없습니다. 이렇게 쓰고 간신히 방향키를 돌려봅니다.


책 읽을 시간이 없는 제가 책을 읽는 유일한 시간은 화장실에 갈 때입니다. 화장실에 갈 때 대하소설이나 철학책을 들고 갈 수는 없는 법입니다. 쾌변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화장실에 갈 때는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책을 들고 갑니다. 아니, 가볍다는 것은 얄팍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쾌변만큼 가치있는 책을 들고 갑니다. 생각해 보세요. 밖에 나가서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날 좋아하고 존경하고 칭송해도, 만성 변비에 시달리는 인생은 얼마나 불행한가요. 쾌변은 인생의 복입니다.


얼마 전까지 저는 황정은의 <일기>라는 에세이집을 읽고 있었습니다. 미안합니다만 황정은 작가의 소설은 한 권도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사실 읽으려고 하면 읽을 수 있었겠지만 딱히 끌리지가 않았습니다. 이 에세이집을 읽으면서 제가 아는, 황정은을 좋아할 것 같은 사람들을 떠올렸습니다. 아, 이래서 이 작가를 좋아하겠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책을 읽는 내내 자꾸 머리를 쥐어박히는 느낌이 들었고 머리를 쥐어박히는 느낌으로 쾌변이라는 거사를 치르기는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갈아탄 책은 전에 사놓고 읽다가 만 가쿠다 미쓰요의 에세이 <행복의 가격>입니다. 저는 가쿠다 미쓰요의 에세이 몇 권을 재미있게 읽었고, <종이달>도 무척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전에 북토크를 하러 갔던 게으른 정원이라는 책방에서 구석자리에 쓸쓸히 꽂혀 있는 가쿠다 미쓰요의 에세이 두 권을 냉큼 집어왔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 책은 그냥 그랬습니다.


이 에세이집은 작가가 산 물건, 쓴 돈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기획이 너무 얄팍하다고 생각해서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굳이 이런 이야기를 책으로 낼 필요가 있나, 하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책을 사버렸네요. 아무튼 중간까지 읽다가 이 책을 더 읽는 것은 시간낭비다, 라는 결론을 내리고 덮어두었는데 쾌변을 위한 책을 찾던 중(매우 급한 마음으로) 이 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 적어도 머리를 쥐어박히는 기분은 아니겠지, 하고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습니다.(구체적이라 죄송합니다…)


그러다가 저는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발견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머, 어머, 이거 완전 내 얘기잖아, 싶은 그런 이야기를 말이에요.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만 이상하리만치 겁이 많다. 비행기도 정말 싫고, 낯선 동네에 가는 것도 무섭다. 몇 번이나 여행을 떠났지만 아직도 무섭다. 혼자서 여행을 다닌 지 벌써 10년이 넘었는데도, 티켓 판매원이 말한 대로 나는 여행이 익숙하지 않다.
무엇보다 내가 두려워하는 건, 뭔지 모를 불길한 예감 같은 거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이 사고나 재해를 당하기 직전에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라고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나? “뭘 까먹은 것 같아 그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어요. 그래서 전철을 안 탔는데, 바로 그 열차가 사고가 난 거예요.” 이런 이야기, 자주 듣지 않나? 바로 그거다.
-<행복의 가격>


실은 저도 이런 생각을 합니다. 비행기를 타기 한 달 전부터 일기예보 사이트에 접속해 매일 날씨를 확인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비행기를 타야 하는 날의 바람입니다. 강풍이나 돌풍 예보가 있으면 잠을 못 잡니다. 비행기를 타기 일주일 전부터는 징조들에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나면 ‘아아 곧 세상을 뜰 테니 이런 좋은 일이 일어나나 봐’ 하고 낙담하고,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나면 ‘그래,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 보면 역시 비행기가 추락할 거야’ 하고 낙담합니다.


내가 어디 어디로 여행 간다고 하면 이렇게 가슴이 철렁해지는 말을 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얼마 전에 여행을 갔을 때도 그랬다. 막 출발하려는, 친구가 “비행기, 조심해” 하고 지나가는 말투로 말하기에, 나는 언제나 그렇듯 가슴이 철렁하면서 “왜, 왜? 왜 다른 때는 그런 말 안 하면서 이번엔 비행기 조심하라는 거야? 뭐 안 좋은 예감이라도 들었어? 그렇다면 분명히 말해줘”하고 꼬치꼬치 따져 물었다. “왜라니… 뭐, 난 그냥…” 하고 친구는 별꼴이라는 표정으로 더듬거렸다.
멕시코 여행 때도 역시 티켓 판매원을 비롯해 정말 많은 사람들이 “괜찮겠어? 조심해…” 라는 말을 해주었다. 그런데 그 “조심해…” 라는 말이, 뭐랄까, 밝은 느낌이 없다고나 할까, “여행이라니, 너무 좋겠다!” 같은 울림이 담겨 있지 않다고나 할까, 전장의 최전선으로 떠나는 사람에게 “조심해…” 하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 것이다.
-<행복의 가격>


공항까지 가는 길의 모든 것들이 저에게 메시지를 보냅니다. ‘그 비행기를 타지 마!’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대기실에 앉아서 저와 같은 비행기를 탈 사람들을 둘러봅니다. 혹시나 그들 중에 신이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을지, 아니면 죽어 마땅할 사람은 없을지를 살핍니다. 어떤 여자의 머리에 꽂힌 흰 삔을 보며 ‘아아, 징조다!’ 하고 패닉에 휩싸이고, 봉사활동을 떠나는 활기찬 대학생 무리를 보면서는 ‘가슴 아픈 뉴스에 딱 어울려!’ 하고 절망합니다. 출발하기도 전에 기진맥진한 저는 비행기에 탄 내내 저 아래, 움직이지 않는 단단한 땅 위에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또 부러워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다시는 여행을 가지 않겠다고 다짐하지요.


그리고 수개월 후, 저는 다시 비행기에 올라 벌벌 떨고 있습니다. 아아, 저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어요. 어릴 때부터 사고에 대한 겁은 많았습니다만 비행기를 타는 것은 좋아했습니다. 20대 내내 수없이 비행기를 탔지만 무섭다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느 날 문득 이런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내가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과연 이 공포증을 치유할 수 있을까, 언젠가는 나도 즐거운 마음으로 비행기에 오를 수 있을까, 아니면 아예 비행기를 타지 않고 사는 것이 답일까, 늘 머리를 싸매고 고민합니다. 그러다가 저는 문득 깨닫지요. 아, 나는 어쩌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불안의 정도가 너무 높은 건지도 몰라.


저는 뭐든 제 힘으로 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남과 협업하는 것을 잘 못합니다. 혼자서 끙끙대며 뭐든 해결하는 것이 마음 편합니다. 그리고 두려워합니다. 나 혼자서 통제 못할 상황이 도래하는 것을요. 내 인생에 핵폭탄 같은 사건이 떨어지는 것을요. 그러지 않기 위해서 양치 후엔 열심히 치실을 하고, 매년 건강검진을 받고, 소화기를 사두고, 차간 안전거리를 유지하지만, 바보 같은 일이지요. 고작 그런 것으로 내게 닥칠지도 모를 모든 불행을 막을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은, 추락하는 비행기에서 안전벨트를 고쳐 매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마도, 추락 후에 대해서, 폭발 후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야 하리라고, 내가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죽지 않는다면  후에도 제게는 세월이, 아주 짧거나 또는 아주  세월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나의 친구는  고통의 시절을 견디고 끝내 살아남아서 건강한 얼굴로 나에게 책들을,  애가 새벽녘 홀로 읽는 책들의 제목을 읊습니다. 나는  제목들을 단단한, 흔들리지도 추락하지도 않는 땅인 것처럼 바라봅니다. 저에게 ‘ 살아서 돌아올 거예요라고 말해주는 선한 목소리들을 마음에 새깁니다.  말들을 기도문이나 주문처럼 외우고  외웁니다.


또 한 가지의 말. 얼마 전에 한 젊은이로부터 들은 말인데요, ‘밸런스는 혼자서 맞추는 게 아니죠’ 라는 말입니다. 그렇죠. 저는 혼자서 기우뚱 기우뚱하며 균형을 맞추려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내 인생의 밸런스는 나 혼자서 맞추는 게 아닙니다. 내가 기우뚱할 때 누군가가 옆에서 저를 들어올려줄 겁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기우뚱할 때 내가 그를 밀어올려줄 거예요. 그런 것을 믿어야 할 겁니다. 그런 것을 믿을 필요가 있을 겁니다. 이 비행기의 기장을 믿는 일처럼 말이에요.


멕시코에서는 길을 걷기만 해도 누가 권총을 들이대나요? 강도를 만나는 게 흔한 일이에요? 이런 멍청하기 짝이 없는 질문에 호시노 씨는 참으로 이성적이고 구체적이며 긍정적인 조언을 해주었고, 마지막으로 “분명 즐거운 여행이 될 거예요!” 하고 덧붙여주었다.
치안이니 유괴니 조심하라느니 하는 불안한 말을 수백 번이나 듣고 우울해하던 나에게 “분명 즐거운 여행이 될 거예요!” 라는 말은 눈부신 빛과도 같았다. 그래, 그래, 그래, 그래, 당연히 즐거운 여행이 돼야지, 하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행복의 가격>


그래서 이 편지의 결론은 무엇이냐 하면요, 어떤 책에 대한 평가는 너무 성급하게 내리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12월 23일

성급한 수희로부터










매거진의 이전글 책에 관한 편지를 쓰지 못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