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성커이)
수희님 안녕하세요.
놀랍게도 2021년은 딱 하루가 남았습니다. 짐작하시겠지만 저에게 올 한 해는 정말 엄청난 해였습니다. 분에 넘치는 평가도 받았고 웃을 일도 많았어요. 무엇보다 수희님을 알게 되었고 마침내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잖아요? 그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나에게 칭찬을 해주고 싶어요. 너란 놈 참 멋지다! 하고요. 문득 세월이 가는 속도를 몸으로 체감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봐요. 몸이 느끼는 속도감이 예상보다 빠르다면 한순간도 대충 보내는 시간이 없겠구나 하는 쪽으로 생각이 흐르자 순간 몸서리가 쳐지네요. 잠시도 여유를 부리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니까 끔찍해요. 자고로 사람은 적당히 부지런해야 합니다, 적당히요, 그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때로는 이틀 정도는 씻지 않고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밥을 해먹기도 귀찮아서 라면을 먹는 거죠. 매 끼니는 좀 심하니까 하루에 두 번 총 네 번 라면을 먹는 거예요. 같은 라면은 또 지겨우니까 신라면, 진라면, 진짬뽕, 너구리로 바꿔가면서. 라면의 종류가 바뀌면 매번 새롭게 맛있겠죠? 오른손으로는 경쾌하게 면치기를 하면서 나머지 손으로 기름진 머리를 벅벅 긁는, 빈 그릇은 치우지도 않고 적당히 옆으로 밀어놓은 다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책을 읽는 삶. 하..... 상상만으로도 카타르시스가 느껴집니다. 저는 오십 평생 동안 한 번도 그렇게 여유를 부린 적도, 게을러 본 적도 없는 것 같아요. 그렇게 지내는 상상은 천 번도 넘게 했지만 실행에 옮긴 적이 없어요. 나는 이게 적잖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수희 님 나는 좋게 말해서 부지런하고 나쁘게 말하면 사서 고생하는 사람입니다. 정리벽이 심해요. 정리의 개념 안에는 청소가 포함되어 있어요. 물론 정리와 청소는 항상 좋은 의도로 시작하죠. 하지만 뭐든 그렇잖아요, 의도가 좋다고 결과가 다 좋은 건 아니라는 것을요. 청소와 정리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해서 결국 나를 망치곤 했어요, 여기서 망쳤다는 건 자신과 주변을 피곤하게 만든다는 뜻이에요. 청소를 좋아하다 보니까 청소용 세제와 청소 도구에 애착이 심해요. 세제의 혁명이라는 모든 제품을 사용해 봅니다. 새로운 제품을 쓰면서는 매번 속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면서 또 사고 또 삽니다. 청소 앞에서는 정말 무분별한 인간이 됩니다. 아시잖아요, 내가 절대 순진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요, 그런데 거기에 쓴 돈을 생각하면 이건 순진함을 넘어선 어벙함 아닐까 싶어요, 그러니 분명히 병이지요, 땀을 뻘뻘 흘리며 가스 쿡탑의 상판을 윤이 나게 닦아놓고는 그걸 바라보며 배시시 웃고 있는 나를 내가 느껴요, 그럴 때면 나는 중독이라는 지독한 단어가 떠오릅니다.
중독. 좋은 의미보다는 안 좋은 의미로 많이 쓰이는 이 단어는 언뜻 절제의 반대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건 중독에 관한 사람들의 오해일지도 몰라요, 왜냐하면 중독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뭔가에 깊게 의존한다는 뜻이니까요. 절제하지 못하고 책임감도 없고 무능력하고 나약한 정신 때문에 술과 약물에 빠진 것이 아니라 중독자란 어쩌면 어딘가로부터 혹은 누군가에게 소외되어서 불안한 사람들인 거죠. 그 불안감을 안정감으로 바꿀 무언가를 찾게 되는 거고 그건 도박일 수도 게임일 수도 알코올일 수도 있다는 거예요. 우리 집에는 청소 중독자인 나 말고도 또 한 명의 중독자가 살아요. 남편은 요즘도 매일 막걸리 한 병을 마셔요, " 당신은 알코올 중독자야. 보건소에 가서 중독 진단을 받아야 하는 인간이라고!" 하면서 난리를 부리곤 하지만 솔직히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래 봤자 고작 막걸리 한 병인걸요. (그러고 보니 남편이 매일 술을 마시는 이유가 나 때문일까 싶네요) 나는 오히려 난감하고 지독한 중독은 인간 중독이 아닐까 생각해요.
수희 님 나에게는 동네 친구가 딱 한 명 있는데요. 그 친구를 참 좋아해요. 인간적으로 존경하는 마음도 있어요. 독실한 기독교인인 그 친구는 신을 믿지 않는 나에게 교회에 가자거나 하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간다는 말 같은 건 한 적이 없어요. 뜻하지 않게 공돈이 생겨도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에 응답을 해주셨다는 말로 저를 갸우뚱하게 하지도 않아요, 한 번은 누군가가 그 친구에게 터무니없는 싸움을 건 적이 있었어요, 그때 조용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차근차근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화가 난 상대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말로 오해를 풀고 서로가 기분 좋게 상황을 마무리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요, 참 보기 드문 사람입니다. 얼마 전부터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남모르게 도움을 주고 있더라고요,
며칠 전 한동안 연락이 없던 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한밤 중에 전화를 해서는 어떤 여자를 도와줄 수 있냐는 거예요. 남편에게 지속적으로 폭력을 당하는, 남편에게 맞아서 온 몸에 피멍이 든 여자가 퇴원을 하고 집에서 요양 중이고 음식을 만들 여건도 아니고 보살펴야 할 두 아이는 편의점 도시락을 먹은 지 한 달 넘었다고. 아이들 얘기를 듣고 나는 무조건 가겠다고 했어요. 소고기 뭇국을 끓여 아이들에게 주고 기름을 뺀 참치로 죽을 끓여 한 숟갈 뜨는 걸 보고 그 길로 나가 마트에서 장을 본 뒤 배달을 받아 냉장고를 채웠습니다. 다시 오겠노라고 말하는데 금방이라도 툭 하고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그렁그렁한 그녀의 눈을 봤어요.
집으로 오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울었습니다. 눈물은 속수무책이었어요. 그녀에게 묻고 싶었어요. 당신에게 결혼은 뭐냐고, 당신은 당신의 삶이 괜찮냐고요. 당신을 만나고 나는 왜 삶이 이토록 지랄 맞게 느껴지는지, 당신의 고달픔을 해결해 주기에는 내 삶도 충분히 힘들다고, 그런데 당신은 어쩌자고 그 고통스러운 결혼 생활에 주저앉아 있는지, 그렇게 살만한 가치가 있는지, 남편에게 맞으면서까지 당신이 지키려는 게 무엇인지, 당신의 삶의 중심엔 도대체 뭐가 있냐고요.
수희 님, 그것이 인간 중독일까요? 고독과 맞설만한 내면의 힘이 없어서 마음의 빈 곳을 사람으로 채울 수밖에 없는 것. 그녀는 남편이라는 사람 자체를 사랑한다기보다 사랑이라는 허상에 중독되어 있는 경우일지도 몰라요. 생각해 보면 부부만큼 상대에게 확실한 가해자가 될 수 있는 사이도 없는 것 같아요. 사랑한다는 착각 때문에, 애정이라는 미명 하에 아무렇지도 않게 목을 조르고 죄의식 없이 폭력을 행사하고 심지어 쉽게 용서도 하죠. 사랑은, 그 지랄 맞은 인간 중독은 객관적인 진실에는 관심이 없어요. 상대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오해하게 만들어요. 사람 보는 눈을 가리고 상대를 쉽게 과대평가하는 거죠.
수희 님 나는 읽어도 남는 게 없는 책이 꽤 있어요. 성커이의 [중독]이라는 책을 처음 읽을 때 그랬어요. 이게 뭐야? 도대체 무슨 내용이지? 싶었어요. 책을 기억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필사도 하고 독후감도 쓰는 나 같은 사람도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는 책이었어요. 책이 조금 선정적인데요. 촌스럽게 표현된 에로스와 가부장의 결합이 불편하게 느껴졌어요. 읽으면서 이건 무슨 삼류 막장 드라마인가 해서 덮어버릴까도 생각했어요. 루쉰 문학상을 수상하고 신인 작가상을 수상했던, 중국 내에서는 참신하다는 평가를 받는다는 성커이가 쓴 소설이라서 끝을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었죠. 중반 이후에는 뭔가 뒤통수를 확 때리는, 나에게 각성을 주는 이야기가 있겠지 하고 기대했지만 마지막도 흐지부지 끝이 난 기억이 나요. 그런데 며칠 전 문득 성커이의 중독이 생각나는 거예요. 그래서 이번에 처음부터 다시 읽었어요,
확실히 그때와는 다른 느낌이었어요. [중독]은 어딘가 묘한 구석이 있더라고요, 한 문장만 읽어도 나라는 존재가 점점 뚜렷해지는 거예요. 문장이 특별히 좋거나 내용이 참신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책에서 빛이 나와요, 어두운 무대 한가운데 서있는 나에게 조명을 비추는 것처럼, 빛은 점점 내게로 다가와요. 아니라고, 이건 내 얘기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어도, 내 삶과 평소의 내 생각과는 완전히 딴판이라고 마음속으로 외쳐도 소용없어요, [중독]이라는 소설 속의 등장인물 중 한 명이 나로 보여요. 그렇게 생각하니 중독은 무엇보다 좋은 소설이네요. 나는 책의 맨 앞 장을 열면서 항상 생각해요. 내가 사는 세상이 아니고 완전히 다른 생소한 곳으로 가고 싶다고, 부디 그런 곳으로 나를 데려가라고요. 그런 마음으로 책에서 책으로 옮겨 다니지만 결국 나와 내 친구 아니면 이웃의 이야기더군요, 결국 좋은 소설이란 건 사소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쓴 것이더라고요.
[중독]의 주인공 줘이나는 세 명의 남자에게 휘둘립니다. 그녀의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 아니라 훼손하는 사랑이에요. 자신을 훼손하고 남자들에게도 훼손당하는 사랑이에요. 당연한 얘기지만 세 명의 남자 누구와도 평온하지 못해요. 그러면서 끝없이 사랑을 의심하고 사랑을 확인받기 위해 몸부림쳐요, 그게 너무나 지독해서 읽는 내내 나는" 아.... 지긋지긋하다... 지긋지긋해..." 했어요. "어째 이 여자는 지치지도 않냐.." 했는데 왠 걸요 이 책이 말하려고 하는 게 바로 그거더라고요. 부부, 결혼, 이혼, 재결합, 지독함, 지긋지긋함, 끔찍함, 끝이 없는 싸움과 돌고 돌아 결국 제자리인 사람들의 이야기요. 그런 사람들과 그런 감정들에 중독되는 이야기였어요. 처음에는 책의 내용과 제목이 일치하지 않아서 영 못마땅했어요. 제목을 왜 중독이라고 지었을까. 그 의문은 쉽게 가시지 않았지만 이야기가 끝을 향하면서 알아차렸죠. 이것이야 말로 끔찍한 중독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요.
이쯤에서 문득 버트런드 러셀의 [결혼과 도덕]에서 읽은 구절이 생각나네요. 저는 처음 이 문장을 읽을 때 정말 천재적인 통찰력이라고, 행복한 결혼에 대해 누가 이보다 더 깔끔한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었어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문명사회의 남성과 여성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루는 것은 가능하다. 물론 이것이 가능하려면 수많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부부 쌍방이 완벽히 평등하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하고 서로의 자유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부부 사이에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완벽한 친밀감이 형성되어야 하고 가치의 기준이 어느 정도 일치해야 한다. 이런 모든 조건이 충족된다면 결혼은 두 명의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가장 유익하고 가장 중요한 관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수희 님. 나는 올해 적어도 지난해보다는 계산적으로 살려고 용을 썼어요. 매일 인간의 바닥을 보는 것과 동시에 내 바닥까지 보고 추락하지 않으려고 애쓰느라 진이 다 빠지기도 했고요. 그래도 어쨌거나 여기까지 잘 왔고 내년에도 조금씩 글을 쓰고 나름의 즐거움을 찾도록 노력하며 잘 지내려고요. 수희 님, 나의 작가님! 2022년에도 건강하시고요. 나랑도 계속 놀아주세요. 그럼 내년에 만나요.
2021.12.30
김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