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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수희 Jan 19. 2022

인과 없는 세상을 헤쳐나가는 법

김영하, <아이를 찾습니다>

설님.


편지 잘 받았습니다. 언제나 과분한 평가로 저의 앞날을 축복해주시는 설님. 설님이 말씀하시는 만큼 제가 괜찮은 사람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저 내가 즐거우면 남들도 즐겁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계속, 가능하다면 10년 후에도 계속 써보려는 마음입니다.(사실 10년 후에 멀쩡히 살아만 있어도……)


그렇지요. 나도 즐거워야 하지만 남들도 즐거워야 한다. 실은 제가 제목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도 그때문이에요. 제가 쓰는 글은 저 자신을 위한 것인 동시에, 타인을 위한 것입니다. 저 자신을 위한 글은 그저 일기장에 제멋대로 실컷 쓰면 그만이겠지요.(그런 일기장을 저는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타인에게 읽힐 것을 뻔히 알면서 그렇게 멋대로 쓸 수는 없다고, 그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저는 어쩐지 꽉 막힌 데가 있는 옛날 사람처럼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글을 쓸 때 저는 손님이 오기 전에 대문 앞부터 쓸어놓고, 방을 닦고 다과를 준비하고 음악을 선곡하고 화장실이 지저분하지는 않나, 현관에 신발이 어질러져 있지 않나 살피는 세심한 주인이 됩니다. 제목에서부터 서두로 시작해 본론과 결론까지, 제가 마련해놓은 방 안에서 잘 놀다가 가기를 온 마음을 다해 바라고 또 노력하지요. 그리고 10년 후에도 이 사람이 제 방을 찾아주기를 저는 희망합니다.


물론 이 편지글은 조금 예외적이기는 합니다. 이 글은 절반쯤은 개인적인 취미 활동이고 나머지 절반쯤은 누군가가 읽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글입니다. 저는 이렇게 써도 될까, 하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누가 뭐라고 생각하건 내가 알 바 아니지, 하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최소한의 틀은 갖추려 노력합니다. 제목을 정하고 단락을 나누고 흐름을 살피고 맞춤법을 교정하는 일을 글을 올린 후에도 저는 여러 번 다시 합니다. 이건 어쩌면 제 완벽주의 탓이기도 한데요, 지긋지긋한 제 완벽주의가 이런 일에는 꽤 도움이 됩니다.(그런데 왜 제 책에는 그렇게 오타가 많을까요!!!)


설님. 오늘의 편지에는 소설 이야기를 좀 해볼게요. 얼마 전에 저는 사람들과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했습니다. 제 주위에서는 소설은커녕 책을 읽는 사람조차 찾아보기 힘드므로(아, 제 딸이 저보다 소설을 더 많이 읽고 있기는 하네요) 저는 이런 이야기를 듣고 말하는 것이 무척 즐거웠습니다. 우리는 각자가 좋아하지 않는 소설들에 대해서(언제나 좋아하는 것보다는 싫어하는 것에 대해 말할 때가 더 즐겁지요. 으흐흐) 약간의 험담을 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제가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을 상대는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고 했고, 상대가 꽤 괜찮게 읽었던 소설을 저는 화를 내면서 읽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편지는 사적인 편지니까요, 저는 재미있게 읽고 상대는 읽을 수 없었다는 소설의 작가를 밝힐게요. 그 작가는 장류진입니다. 저는 장류진의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을 기쁘게 읽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들에 지나치게 예민하고 비대한 자아 대신, 살아 숨쉬는 사람들의 진짜 삶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건 바로 내 이야기야, 하고 느낄 수 있을 만한 진짜 삶 말이에요. 무엇보다 평범한 이야기인 듯 흘러가면서도 삶의 묵직한 부분을, 얼핏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우리의 매일 매일을 쥐락펴락하는 중요한 것들을 건드리는 작가의 솜씨가 탁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 이후에 읽은 이 작가의 장편은 저는 개인적으로 음? 하는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요, 그럼에도 단편을 쓰는 솜씨 하나만큼은 근래 활동하는 소설가들 중 가장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상대는 장류진의 소설이, 이런 것도 소설인가, 싶었다고도 했습니다. 저도 장편을 읽을 때는 비슷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단편에 대해서만큼은 장류진의 훌륭한 솜씨를 어떻게 해서든 옹호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또 반대로 상대가 좋아하는 소설을 저는 끔찍하게 싫어했기 때문에 이건 그저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는 것이지요.


집에 돌아오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장류진의 소설을 누군가는 좋아하고 누군가는 싫어할 수 있겠지만, 장류진이 끝내주게 멋진 공 하나를 던졌다는 사실만큼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겠구나. 과연 소설이란 무엇인가, 한국 소설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 라는 공을 말입니다.  


저는 한국 소설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논할 입장이 못됩니다. 심지어 저는 한국 소설을 별로 읽지도 않는 걸요. 다만, 저는 좋은 이야기는 에세이건 소설이건 논픽션이건 시건 논문이건 노랫말이건 대본이건 뭐건 간에 누군가의 마음에는 가닿는다고 믿습니다. 굳이 쟝르를 구분하는 것이 우스울 정도로 말이에요. 그리고 언제나 인간에게는 좋은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제가 믿는 것은 오직 그 두 가지입니다.


아무튼 그런 이야기를 읽고 싶어서 오랜만에 김영하의 책을 도서관에서 빌렸습니다.(그렇습니다. 장류진 이야기를 할 것 같았지만 김영하 이야기입니다.) 제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 김영하는 아주 센세이셔널한 젊은 작가였습니다. 소설 같은 건 도통 읽지 않던 저도 김영하의 소설은 읽었으니까요. 그 시절 그는 아주 근사했고, 그의 소설은 젊고 삐딱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있었습니다. 어느 순간 그도 나이를 먹어 중견작가가 되어버렸고, 저도 더는 그의 소설을 읽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그가 TV에 나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저 사람, 엄청나게 늙었구나.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지요. 아, 내가 40대구나.(남 늙는 건 알고 자기 늙는 건 모르는 파렴치한 여자…)


이번에 제가 빌린 책은 단편집 <오직 두 사람>입니다.그 중에서 저는 <아이를 찾습니다>라는 소설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요. 설님 혹시 이 책 읽어보셨어요? 저는 이 이야기를 드라마로 먼저 보았습니다. 한 드라마 시상식에서 들어본 적도 없는 단막극이 쟁쟁한 작품들을 제치고 작품상과 남우주연상을 받은 것을 보고 궁금해서 찾아봤습니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저는 가슴이 죄어드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대체 이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가려는지 긴장되어 견디기가 힘들었어요.(어떤 사람들은 이런 긴장감을 못 견디지만 저는 무척 좋아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구원을 받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저는 한번 보고 좋았던 것들은 두 번 보고 세 번 보고 네 번, 다섯 번도 더 보는 편인데요, 이 드라마도 두 번을 연달아 봤습니다. 아마 다시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소설도 역시 좋았습니다만 드라마를 먼저 보아서인지, 중반 이후부터는 소설의 밀도가 드라마에 비해 성기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드라마는 중반 이후부터의 이야기에 더 큰 무게를 둡니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끝까지 밀고 가지요. 그런 점에서는 드라마의 각본과 연출이 아주 훌륭했다고 봅니다. 이 정도 드라마화라면 작가도 정말 기뻤을 것 같아요.


소설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평범한 부부가 아이를 잃어버립니다. 마트에 갔다가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아이가 앉아 있던 카트가 사라져 버리지요. 그리고 11년이라는 세월이 흐릅니다. 예기치 못한 비극으로 인해 그들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남자는 굴지의 자동차회사 생산직으로 일했으나 현재는 공장의 경비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남는 시간에 아이를 찾는 전단지를 들고 전국을 누벼야 하기 때문입니다. 서점에서 일했던 아내는 조현병 환자가 되어서 제 앞가림도 하지 못합니다. 아이를 찾느라 그들은 아파트도 팔고 재개발 지역의 허름한 집에서 겨우 삽니다. 그럼에도 남자는 아이를 찾을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남자에게 아이를 찾았다는 연락이 옵니다. 그런데 이 아이에게 좀 문제가 있습니다. 소설은 그 다음, 잃어버린 아이를 찾은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아이만 찾으면 모든 게 다 예전으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아내의 정신도 돌아오고, 집안형편도 필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자신을 유괴한 여자를 친모로 알고 자란 아이는 새로운 가정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아내는 아이를 알아보기는커녕 누구냐며 무서워하지요. 그러다 아내가 갑자기 사고로 죽어버리면서 남자는 절규합니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런 일이 일어난 거냐고 말이에요. 드라마에서 이 절규는 아이의 절규와 겹치지요. 내가 뭘 잘못했는데요?! 내가 뭘?! 이 불행은, 지옥은 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죄를 물어야 할 사람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죽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 이 지옥 속을 영원히 헤매야만 합니다.


 이후부터 남자는 체념한듯 살아갑니다. 어느덧 고등학생이  아들은 말도 없이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제 남자는 아들을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지요. 어느날 어떤 여자애가 남자의 집을 찾아옵니다. 여자애는 그의 아들과 사귀는 사이였는데 아들이 자기  500만원을 가지고 달아나버렸으니  돈을 달라고 합니다. 남자는 아무  없이 돈을 가지러 방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가 밖으로 나왔을 , 여자애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리고 마루에는  아기가 있지요. 여자애가  쪽지에는 당신 아들의 아기라고, 자기는  키우겠으니 맡아달라고 쓰여 있습니다. 남자는 아기를 바라보고 아기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만져봅니다.


김영하는 이 소설집이 ‘그 이후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라고 설명했습니다. 고통스러운 상실의 이후에서도 사람은 계속 살아나가야 합니다. 이 소설 속의 이야기는 그 살아나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남자에게 주어진 아기는 또 한 번의 기회인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 남은 삶을 살아갈 희망, 모든 것이 불타고 재만 남은 벌판에 자라난 작고 푸른 싹. 아무런 잘못도 없이 모든 걸 잃어버렸지만, 신, 그리고 작가는 잃어버린 아이를 다시 돌려준 것으로 그를 다시 살게 해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설님. 얼마 전에 저는 넷플릭스의 <지옥>이라는 드라마를 정말 재미있게 봤습니다.(바쁘다 바쁘다 하면서 드라마는 엄청 보지요. 그래서 바쁜 거……) 이 드라마는 느닷없이 나타난 천사에게서 지옥으로 가는 일시를 고지받은 사람이 지옥의 사자들에게 고문당한 후 불에 타 죽는 사건이 일어나는 무시무시한 세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무서움은 바로 이유가 없다는 점입니다. 처음에는 저도 왜 저런 현상이 일어난건지, 지옥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이유를 찾으려 노력했지요. 과연 이런 일을 벌인 신의 의도가 무엇인지 찾으려는 드라마 속의 광신도들처럼요. 사실은 신이고 뭐고 아무런 이유가 없을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유를 찾으려 하다가 결국은 그 이유를 끼워맞추는 수준이 되어버리지요. 그 사람이 그렇게 갈기갈기 찢긴 뒤 불에 타 죽은 이유는, 그가 죄를 지었기 때문일 거라고요.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이유 없는 불행일 테니까요.


그런데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저는 감독이 짜놓은 그물에 걸려들었다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좋은 이야기는 독자를 관찰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 속에 참여하게 만들지요. 그러니까 이유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일들이 일어나버렸고, 일어나고 있으며,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고지는 무작위입니다. 이유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은 이 인과 없는 세상에 적응해 살아가야만 합니다.


드라마의 마지막에 지옥으로 간다는 고지를 받고도 제 부모의 희생으로 살아난 아기를, 희망의 증거를 품에 안은 여자는 택시에 오릅니다. 택시 운전사는 평범한 나이든 남자이지요. 그는 이미 수배선상에 오른 여자를 알아봅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던집니다. 신이고 뭐고 나는 모르겠고, 인간들의 일은 인간들이 알아서 해야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너무나 안심이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그 말 한 마디만으로도 구원받은 기분이 들었어요.


인과 없는 세상은 얼마나 무섭습니까. 우리는 억지로 인과를 세우려 노력합니다. 하지만 매번 실패합니다. 인생은 자기계발서에 나오는 것처럼 A를 하면 B가 되는, 그런 것이 아니지요. 착한 사람이 다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이 다 벌을 받는 것도 아니고, 살아야 할 사람이 죽고, 살 의미가 없는 사람이 천수를 누리기도 합니다. 이유 없는 불행 앞에서 사람들은 소설 속의 남자처럼 절규합니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내가 뭘! 그럼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이 인과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오직 그것뿐입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신도 아버지도 없는 세상에서도 우리는 나름의 질서를 찾아내어 인간답게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길을 걷다 갑자기 날아든 돌에 맞은 것처럼, 인과 없는 불행의 이후에도 우리 인간은 다시 한 발을 내딛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살아 있으니 계속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지옥>의 택시기사의 말과 <아이를 찾습니다>의 남자가 선물받은 아기는 그 의지와 희망의 표시일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김영하의 단편들을 읽으며 저는 오랜만에 이야기를 읽는 즐거움을 느낍니다. 누가 썼는지도 모를 비슷비슷한 소재와 그저 예민한 감정 일색인 이야기들이 아닌, 진짜 흥미로운 이야기를 읽는 즐거움 말입니다. 진짜 흥미로운 이야기는 계속해서 곱씹게 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닐까요. 아무래도 이 나쁜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여러 번을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그것이 귀찮기는커녕 즐겁기만 한, 그런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설님. 저 역시 이야기를 쓰고 있기는 합니다만, 저에게도 소설은 왠지 신들이 노니는 세계 같은 느낌이 듭니다. 소설가들은 왠지 어마어마한 사람들인 것 같고, 소설을 쓰려면 서울대에 입학하는 거나 비슷한 자격증을 따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주눅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아니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하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이야기지요. 자격증이 아니라, 좋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느냐 아니냐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도 소설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소설의 본질은 어쩌면 이런 것이 아닐까요? 라는 묻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독자로서도 즐거운 일이겠지요.


제게 소설이란 어떤 사람이 들려주는 끝내주게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재미있는, 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요. 아무튼 에세이건 소설이건, 그냥 ‘이야기’라고 생각했으면 합니다. 계속해서 좋은 이야기를 쓰고 싶고, 또 좋은 이야기를 읽고 싶고, 발견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문학의 고매한 이상 따위 개나 줘버려,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고 저는 볼멘소리로 계속해서 말하고 싶은 겁니다.


2022년 1월

드라마광 수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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