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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 Jan 16. 2022

아이를 보내는 길목

김숨의 소설[국수]



곤히 잠든 식구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살금살금 일어나 주방으로 나왔습니다. 싱크대 아래 있는 간접 조명을 켜고 전기포트에 물을 올립니다. 놀라울 만큼 빨리 물이 끓어요. 가만히 찻잔에 물을 부어 식탁에 앉습니다. 아마 나는 코를 골았을지도 몰라요. 아니 분명히 골았을 거예요. 어제는 말도 못 하게 피곤했거든요. 그저께 밤엔 꿈에서도 글을 썼어요. 아마 새로 시작한 연재 때문일 거예요. 수희 님과 내가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편지를 쓰자고 의기투합한 것처럼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연재를 시작했어요. 잠시 미쳤었던 거죠. 중요한 일이 늘어나면 자면서도 걱정을 한다는 나쓰메 소세키의 말이 생각나는 며칠을 보냈어요. 지금은 새벽 4시예요. 곤한 잠을 자고 일어난 직후라 산발이 된 머리를 고쳐 묶고는 한 김 식은 찻물에 마른 목을 축입니다. 집에서 글을 쓸 때는 매번 비슷합니다. 쓰는 행위는 대체로 아무 때나, 그때그때 여건이 되는대로 시작되고 내 의지로 끝내는 경우는 드물어요. 끝내고 싶지 않지만 끝낼 수밖에 없는 잡다한 이유들이 발생해요. 지금은 글을 쓸만한 여건이 만들어졌으니 이제부터 편지를 쓰려고요.


수희 님의 편지를 받고 마음에 작은 바위 하나가 쿵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제목 때문이었어요.  제목 쓰기에 진심인 수희님이 10 년 후에도 쓰고 있을까요?라고 쓰셨으니까요. 지체 없이 대답했죠. 암요, 그렇고 말고요. 당연히  쓰셔야죠! 나는 수희 님이 예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지함) 그렇기 때문에  점수를 매길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머리로만 하는 생각일지도 몰라요. 속으로는 우열을 가리고 싶은지도 모르겠어요. 글로써 선택받은 작가, 그러니까 승리한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니까요. 이를테면 글로 생계가 온전히 해결되는 작가들이 있잖아요. 수희 님이 부러워하던 것처럼 책으로 둘러싸인 방과 너른 책상과 오래 앉아 있어도 허리가 아프지 않을 것이 분명한 의자와 청탁과 출판에 관한 의논을 함께 해주고 글쓰기에 관련된 참고 서적을 미리 사다 놓는 비서, 게다가 온종일 글 쓰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여건. 극히 일부에게만 허락된   세계가 분명히 존재하죠. 그 세계를 오랫동안 지켜봤어요. 끝내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고 사라져 가는 작가도 봤고 작가로서의 정점을 찍고 성공의 환희와 감동을 주는 작가도 봤어요. 나는 수희 님이 그 과정의 끝 어디쯤에 서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정점에 이르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그러니까 계속 쓰셔야 합니다. 10년 후에도, 그 후에도 계속이요.




아참, 새해 인사가 늦었네요. 수희 님에게 올해는 다른 무엇보다 마음이 편한 한 해가 되기를 바라요. 흠.... 어쨌거나 나이를 또 한 살 먹었어요. 사실 이제는  해가 바뀐다는 것도  별 느낌이 없어졌어요. 54년을 먹고 보니 나이 먹는 일도 대수롭지 않게 돼요. 그래서 새해 계획이라는 걸 새우지 않게 되더군요. 자연스럽게 그렇게 변했어요. 한때는 거창 헸었는데 말이죠. 매년 지키지 못할 수많은 계획을 세우고 아등바등 살다가 어느 순간 덫에 갇혔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덫을 만든 사람이 다름 아닌 바로 나라는 걸 인식하고 나니까 그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유롭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어요. 어떻게 하면 자유를 쟁취할 수 있을까 고심했어요. 자유라는 건 말이죠.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마음속으로 프리덤!!! 하고 외치는 건 쉬워요. 그걸 현실에 적용하기가 너무나 어렵다는 거죠. 그러려면 가장 먼저 직업의 굴레를 벗어던져야 했어요. 나는 지금도 그게 어른이 되어 내릴 수 있는 가장 어려운 결정이 아닐까 생각해요. 아, 물론 나의 경우를 말하는 겁니다.

삶에는 이것 아니면 저것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일은 왜 그렇게 많은지. 경우의 수를 따져야 하는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순간들은 또 왜 그리도 많은지요, 확실한 게 하나도 없기 때문에 불안을 숙명처럼 떠안고 살아야 하는 게 힘들었어요. 해가 바뀌면 늘 생각을 했었죠.

"작년은 어찌어찌 견뎠는데 정말 죽을 뻔했어." "올해는 좀 나아질까?" 올해는 조금 나아지는가에 대한 절박한 질문에 대답을 듣고 싶어 지더군요.

돈을 조금 주고서라도 말이죠. 어떻게든 하루하루를 견디고 현실을 재구성하기 위해서  그래서 가끔 철학관을 갔었더랬죠.

지난주에 딸도 자신이 다니던 대학교 근처에 있는 철학관에 다녀왔다고 하더군요. 젊은 애가 철학관이라니, 타로도 아니고 철학관이라니, 그 아인 나를 닮은 게 분명한가 봐요. 아마 묻고 싶은 게 많았을 거예요. 뻔한 질문과 빤한 대답의 시간이라는 걸 지금의 나는 알지만 딸은 아직 거기까지 가지 못했을 테니까.



수희 님 사주에 대해 아십니까? 이렇게 말하니까 도를 아십니까? 하며 접근하는 사람들이 생각나서 웃음이 나네요. 아무튼 수희 님은 모르실 테지만 그 사주라는 것이요. 참 신기해요. 나의 생년월일시를 기준으로 풀이하는 거라서 그렇겠지만 딱 정해져 있어요.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 건 다른 곳에 가서 사주를 보더라도 결과가 같다는 점 때문이에요.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 이야기를 해주는지 놀랍거든요. 사주가 미신이 아니라 과학이라는 우스개 소리도 그래서 있는 건가 싶어요. 사주가 불변하다는 건 좋은 사주를 타고 난 사람들에게는 참 좋은 일이죠, 좋은 인생을 살 거라는 게 어는 정도 정해져 있다면 얼마나 안심이 되겠어요. 나는 사주를 보고 나면 항상 찰스 부코스키의 외계인들이라는 시가 떠올라요.


믿기지 않겠지만 갈등이나 고통 없이 평탄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말 있다. 그들은 잘 차려입고 잘 먹고 잘잔다.그리고 가정생활에 만족한다.슬픔에 잠길 때는 있지만 대체로 마음이 평안하고 가끔은 끝내 주게 행복하기까지 하다. 죽을 때도 마찬가지다. 대개 자다가 죽는 것으로 수월하게 세상을 마감한다믿기지 않겠지만 그런 사람들이 정말 존재한다.나는 그런 부류는 아니다. 천만에, 아니고 말고,
나는 그런 부류와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지만 그런 부류는 엄연히 존재한다.


반대의 경우는 좀 암담하지요. 그래서 나쁜 얘기를 듣고 나면 사주를 바꾸고 싶어 지는데 그건  태어난 생년월일시가 바뀌지 않는 한은 불가능한 일인 거죠. 어디까지나 이론상으로요, 하지만 나쁜 사주로 인해 인생이 좋은 쪽으로 바뀌지 않는다는 건 너무나 야박한 일이라서요. 거기서도 사람들은 희망을 말합니다.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타고난 사주를 극복할 수 있다고,  사주 같은 것에 연연하지 말라고요. 그럼요. 뼈를 깎는 노력을 하면 안 되는 일이 어디 있겠어요. 뼈를 깎아야 하는 게 문제라면 문제인 거지요.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피나는 노력으로 타고난 팔자를 바꾼 그야말로 신화를 쓴 인물들이 있기는 한 모양이고요. 나도 한때는  사주를 바꾸고 싶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철학을 봐주는 사람에게 용기를 내어 물었어요. "저기요.................. 팔자를 바꿀 수도 있지 않나요?" 그 순간 철학을 봐주시는 분의  표정을 잊지 못해요. 눈은 반달이 되고 눈동자는 슬픔과 안타까움이 담겨있고 입술은 비틀어졌던 얼굴, 그리고 나온 대답  " 다른 도망은 다 가도 팔자 도망은 못 간다는 말이 있어요."  "아.................... 네..............."


내가 연초부터 심난한 사주팔자 얘기를 왜 하냐면 말이죠. 아이가 철학관에서 이런 말을 들었대요. 나(엄마)와 자기(딸)는 깊은 인연의 관계로 맺어졌는데 그건 단순히 엄마와 딸의 인연과는 조금 다른 더 깊은 인연이다. 쉽게 풀이하자면 엄마에게 자신은 딸이기도 하고 남편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엄마에게 딸은 엄청난 의미다. 엄마는 딸에게 크게 기대하고 막무가내로 기댄다, 그러므로 딸은 운명적으로 엄마가 힘들다. 되도록 빨리 집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 그래야 네(딸)가 편안하다.

나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가 아니라서 놀라지는 않았어요. 딸아이는 많이 놀란 것 같고요.




수희 님 부모와 자식의 인연이라는 건 뭘까요? 어느 날 무작정 찾아온 자식이라는 존재. 내 새끼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존재 말이에요. 절대적이고 절실한 존재. 살아가게 하는 힘이자 내 존재의 이유라고까지 말하는 자식이 뭘까요? 사람들은 자식을 남편과 이어주는 끈이라고 말하지만 그 정도라고 말하기엔 그 끈이 너무나도 질겨요. 세계와 이어 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지도 몰라요. 나는 고백하자면 엄마가 된 것이 실수였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있었어요.  아이를 낳고는 나와 조금도 닮지 않은 아이를 보면서 정말 낯설었고요.  몸조리를 하러 집으로 가는 길, 소중한 보물을 안고 가는 것처럼 온몸으로 아이를 보호하느라 살짝 웅크린 엄마의 등을 바라보면서 엄마가 된 것을 후회하기도 했어요. 이제 어떡하지? 아이의 인생을 어떡하지? 이 무거운 책임을 어떡하지 싶었어요. 그러면서 나는 내 모성애가 부족하다는 걸 실감했고 그런 내가 싫기도 했고 딸의 행복이 걱정도 됐고 죄책감을 느꼈었죠. 그제야 나는 왜 엄마가 되었을까 생각했어요. 주변 사람들이 모두 아이를 낳아서, 나도 아이를 낳을 때가 되었다고 느껴서, 결혼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아지려고 했다면 엄마가 되는 일도 마찬가지로 그냥 단계를 밟은 거더라고요. 아이를 낳고 보니 뭐가 좋은 건지 도통 모르겠고 힘들기만 했고 후회가 많았는데 언제부터 모성애가 생긴 건지, 나도 모르게 모성애가 강한 엄마로 변한 걸까요? 아니면 이왕 이렇게 된 거 자식에게 헌신하자고 마음먹었던 걸까요?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내가 왜 이런 엄마가 되었는지요. 분명한 건 딸아이를 떠나보낼 때가 왔다는 거고 다행인 것은 이미 보낼 준비가 다 되었다는 사실이에요. 지금부터는 그저 각자의 인생을 살아갈 일만 남았어요.




수희님 이 책 읽어 보셨어요? 딸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어수선하던 며칠 동안 김숨의 소설 [국수}가 생각났어요. 자기 속으로 난 자식 하나 없는 어떤 여자가 남의 자식을 거두며 살게 돼요. 새엄마를 맞이한 딸은 새로 들어온 엄마가 처음 만들어준 국수를 먹으면서 국수발을 숟가락으로 뚝뚝 끊어버려요. 어린 마음에 그 국수의 면발을 끊으면 새엄마와의 인연이 끊기고 도망간 엄마가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자기를 낳아준 엄마는 끝내 돌아오지 않아요. 밀가루 반죽을 밀어서 달걀지단 하나 없는 밍밍한 국수나 끓여주는 말없는 새엄마와 살게 되지만 그녀는 새엄마를 엄마로 인정하지 않아요. 새엄마가 끓여준 면발을 끊어내며 새엄마와의 인연을 억지로 끊어냈던 딸이 결혼을 합니다. 그녀는 아무리 노력해도 아이가 생기지 않아요. 몇 번의 인공 수정을 하고 실패를 거듭하면서 오래전에 끊어낸 면발을 떠올리게 돼요. 그러고는  아이가 들어서지 않는 탓을 새엄마에게 돌리게 됩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엄마로 인정하지도 않았던 여자의 탓을 합니다. 그 여자가 자신의 운명을 지배한다고 믿고 싶었던 거죠. 국수발이 익을 때 젓가락으로 제대로 풀어주지 않아서 엉겨 붙은 국수발처럼 둘의 인연도 불행하게 엉겨 붙은걸 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사실{국수}이라는 소설은 재밌는 소설이라기보다는 어찌 보면 지루한 소설이에요. 국수를 만드는 장면이 소설의 거의 대부분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거든요. 김숨 작가 특유의 리듬이에요. 이야기는 결국 한 그릇의 국수를 만들어 새엄마와 함께 나눠 먹는 것으로 끝나지만 그 여운은 정말 오래오래 남습니다. 국수를 치대 자식들에게 생명을 주는 엄마와  디시 국수를 치대  병든 새엄마에게 주는 딸, 엄마와 딸, 그리고 만들어진 인연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에요. 소설이란 참... 문학은 참.... 대단해요. 내가 알지 못하는 숨은 방으로 나를 데리고 가 슬그머니 안아주네요.




2020.1.16


소설에게 안겨있는 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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