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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 Jan 27. 2022

웰컴 투 휘게 라이프

편안하게 함께 따뜻하게


수희님 안녕하세요.

정말 놀라워요. 시간은 어쩌면 이렇게 빠르게 갈까요? 편지를 쓴 지 며칠이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또 편지를 쓰는 날이 왔네요. 이번 주는 설 명절을 앞두고 있어서 마음이 부산스럽지만 이 주고받음이 즐거우니까 기쁜 마음으로 편지를 씁니다. 게다가 이번 편지만큼은 무엇을 쓸 것인가를  꽤 오래 생각해 왔거든요, 나는 사실 어떤 책을 소개할 건지 미리 정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요, 그저 의식의 흐름대로, 책이 떠오르는 대로 편지를 썼었죠.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어요. 꼭 마음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수희 님! 지난번 만남에서 말이에요. 수희 님이 무심하게 했던 말이 좀처럼 잊히지 않고 아무 때나 문득문득 생각났어요, 내가 상대를 뚫어지게 바라본다던 말 기억나세요? 별 의미 없이 한 말인 줄 아는데 나는 그 말을 듣고 마치 불에 덴 듯 뜨끔 했었거든요. 다른 사람이 나를 그렇게 물끄러미 바라보는 건 잠깐도 견디지 못하면서 나는 왜 상대의 모든 걸 꿰뚫어 보겠다는 듯 쳐다볼까. 어쩌다 그런 습관이 생긴 걸까. 줄곧 그 생각을 했어요. 그건 일종의 버릇일 텐데 그 고약한 버릇을 고치기 쉽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도 했어요, 그렇다면 내가 그렇게 뚫어지게 바라보는 대상은 과연 누구일까. 찬찬히 생각해봤죠, 흠... 그들은 사랑의 대상이기도 하고 극복의 대상이기도 하더군요. 호감이기도 하고 어색함일 때도 있고 호기심일 때도 있어요. 더 나아가 미움의 대상이기도 해요. 그런데 나는 그 대상들에게 항상 주눅이 들어있었나 봐요. 호감의 대상에겐 호감이 커져서 사랑의 대상에겐 사랑하기 때문에 극복의 대상에겐 극복하지 못할까 봐 두려웠던 거죠. 결국 그 모든 것들을 이겨내기 위해 그 대상들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수희 님, 나는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만 그렇게 뚫어지게 바라보는 건 아니었어요, 때때로 심하게 나를 바라봐요.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그 순간 나는 둘로 나눠져요, 겉으로 보이는 나와 숨어있는 내면의 나로 갈라집니다. 그  둘은 서로를 감시해요. 내면의 나는 겉으로 보이는 나를 믿지 못하고 보이는 나는 내면의 나를 못 미더워해요.


나는 왜 이런 사람일까. 나는 어쩌다 이런 사람이 되었을까. 정말 어쩌다가 나 자신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그  이유를 말하라면 딱 뭐라고 말할 수 없어요. 하지만 이렇게 된 지 오래되었다는 건 알아요. 아주 어릴 때부터였어요.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부터 나는 믿어서는 안 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조숙한 아이였어요. 어른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서 믿지 못할 것들을 알아냈어요. 어느 날은 선을 또 어느 날엔 악을, 그다음은 동정심을, 그다음은 새끼손가락을 걸고 하는 약속을, 또 다음은 남녀의 사랑을. 어린 내가 본 손바닥 만한 세상에서 믿을 거라고는 하나도 없었던 거예요. 그리고는 당돌하게 섣부른 결론을 내리고 말았죠. 아무것도 믿으면 안 된다.


어른이 되는 동안 나는 세상이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아이였던 내가 느꼈을 두려움의 크기는 짐작조차 안돼요. 하지만 나는 살아야 했고 살려면 사람과 세상을 알아야 할 뿐 아니라 그들을 이해해야 했어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야. 내가 그 입장이라면 나라도 그랬을 거야" 하면서 이해하고 싶었어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사람과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낼 수 없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을 믿어주지 못하는 내가 싫었어요, 수희 님이 말한 대로 나는 인과관계없는 세상이 두려워서 인과를 찾으려고 무던히 노력했어요. 오래 아주 오래 바라봤죠. 그러면 인과가 희미하게 보이는 경우가 꽤 있으니까요. 그리고 나는 지금 딸아이에게 내가 살면서 겪어온 이야기를 특히 고생한 이야기를 구구절절 말하는 어른이 되지는 않았어요. 사람이 사람을 상하게 하고 사람이 만든 세상이 결국 지옥이라고 말하는 어른이 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는 부모를 둔 자식은 세상이 정말 공포스럽지 않겠어요? 어릴 때의 나처럼 말이죠.



수희 ! 그래서 말이죠. 나는 오늘 편지에 그래도!  대해 말하고 싶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한 , 그래도! 우린 살아간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한다는 이야기가 담긴 책을 소개하려고 했었는데 말이죠. 바로 오늘 아침에 마음을 바꿨어요. 삶에 대해, 세상에 대해 똑똑한 척하며 의미를 곱씹고 주접을 떨지 말자는 생각이 들어버렸던 거죠. 그러고는 쾌활한 편지를 쓰자고  마음을 먹었어요. 그건 아침에 눈을 뜨고 경건한 마음으로 손을 씻고  방울의 피를 짜내 혈당을 재는 순간에 떠오른 생각이었어요. 포트에 찻물을 올리고 명상 비슷한  하고 현미밥 75그램을 꼭꼭 씹어 먹고 더러는 바나나를 먹고 날마다 책을 읽고 이상한 문장을 만들어내고 밤이면 향이 좋은 초를  두고 가끔은 꽃병에 꽂을 꽃을 사고  하루에  시간 산책을 하는  휘게로운 삶에 수희 님을 초대하자.  아픈  따위는 집어치우자.

 


그나저나 휘게는 설명하는 게 아니라 느끼는 거라는데 그 느낌을 편지로 잘 전달할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자신은 없지만 휘게 라이프에 함께 하자고 손을 내밀고 싶습니다. hygge life라고 쓰지만 사실 대단한 것도 아니고요. 수희 님은 어쩌면 이미 휘게한 삶을 살고 계신지도 모르죠, 휘게로운 삶이란 새것보다는 오래된 것 화려한 것보다는 단순한 것 자극적인 것보다는 은은한 것을 추구한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잠옷을 입고 영화를 보거나 좋아하는 차를 마시면서 창밖을 바라보거나 향초를 피우고 은은히 퍼지는 향을 느끼는 것. 바로 그런 분위기가 휘게로운 삶이라는 거죠. 별건 아닌데 그게 또 막상 하려면 쉽지 않아요, 우린 너무 바쁘고 지나치게 소비적인 삶을 사니까요. 조금 더 휘겔리 하려면 소비를 줄여야 하는데 그 또한 쉽지 않죠,  샴페인보다 차를 마시는 게 더 휘겔리하고 마트에서 산 비스킷보다 집에서 만든 쿠키를 먹는 게 더 휘겔리 하다는데 뭐... 굳이 더 휘겔리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요 조금만 느리고 단조롭게 살면 되지 않을까요? 휘게한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되는 10가지가 있다고 해요. 그중 우리가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한 가지가 포함되어 있더군요, 바로바로 책입니다. 그리고 빈티지한 물건 또는 도자기 찻잔이랍니다. 저는 휘게 와는 무관하게 예쁜 찻잔에 차를 마시는 걸 좋아하는데요. 이게 휘게 라이프에 도움이 된다니 이참에 수희 님에게 선물을 하려고 오래된 찻잔 하나를 꺼냈습니다. 세월을 덕지덕지 입은 찻잔인데요. 80년대의 감성을 좋아하는 수희 님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정성껏 포장을 해두었습니다. 사실 휘게 라이프는 핑계고요. 선물을 하고 싶어서 길고 긴 헛소리를 했습니다. 정신없이 바쁜 어느 날 무심히 창밖을 바라볼 때 이 찻잔을 꺼내 뜨거운 커피를 드신다면 참 좋겠습니다. 휘게랑 상관없이요.



봐, 곧 햇빛이 날 거야. 붉은 태양과 기우는 달. 그녀는 나를 위해 샤워를.하네. 함께 있기에 좋은 사람인 나. 이게 우리가 가진 전부이기 때문에 삶은 살만해. 그리고 커피는.아직 따뜻하지. -스반테의 시 행복한 하루-


만나서 드려야 할 텐데 우리 언제 만날까요?




2022.1.27


김설


p.s: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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