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르벨 바르데츠키 <따귀맞은 영혼>
안녕하세요, 설님.
해야 할 일들이 많아서 쫓기는 기분이 한가득인 금요일입니다. 바쁘게 지내는 것이나, 생활의 리듬이 흐트러지는 것을 싫어하는 편이라서 더 예민해져 있는 것 같아요. 그 와중에 오늘은 목에 생긴 쥐젖…(이름도 혐오스럽군요)을 제거하러 동네 산부인과(!)에 다녀왔습니다.
피부과에 가면 하나에 만원이라길래, 이러다 200만원은 족히 깨지겠군, 피 같은 내 돈! 하고 미루고 미루었는데, 우리 동네 시장통 옆 산부인과에서 점이나 검버섯, 쥐젖을 1000원에 제거해 준다는 고급 정보를 입수하였습니다. 동네 할머니들의 점, 검버섯 제거 핫플레이스라고 하는데, 누군가의 후기를 보니 결제하면서 미안해질 정도였다고 하더군요. 1000원, 1000원이라니….
그리하여 저는 수년간 미루고 미루었던 일을 오늘 해치웠습니다. 아니, 이 후진 동네의 이런 자리에 왜 산부인과가? 싶은 자리에 있는 산부인과에 가서 레이저로 저의 쥐젖들을 쥐 잡듯이 지진 대가로 총 6만원을 납부하였습니다.(몇 개인지 계산이 가능하시지요?) 레이저로 수십 개의 쥐젖을 지지는 것은 새로운 형태의 고통이었습니다.(한두 개 제거할 때의 그냥 살짝 따끔한 정도와는 차원이 다르더군요.) 어떤 것을 제거할 때는 목구멍이 뚫리는 게 아닐까 싶었고, 심지어 의사는 마취크림을 바르지도 않은, 턱 부위에 있는 점이 보기 싫다며 그냥 들입다 지져 버리기까지 했습니다.(독한 사람...)
그러나 저러나 일 처리는 신속해서 5분쯤 지나니 고문은 끝이 났고, 저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비틀거리면서 병원을 빠져 나왔습니다. 목에 뭘 붙여주지도 않고, 연고 사서 바르라는 처방전과 커다란 습윤밴드 하나만 달랑 주더군요. 집에 와서 보니 목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습니다. 그래, 그래도 1000원인데 뭘, 땡큐지.
아아, 그런데 저는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실은 해야 할 일들 때문에 화롯불 위에라도 올라앉아 있는 것처럼 엉덩이가 들썩들썩, 속이 타서 쓸 데 없는 이야기라도 하며 긴장을 풀고 싶어서입니다.
설님. 지난번 설님이 보내주신 편지는 특별히 좋아서 한 번 읽고 두 번 읽고 세 번 읽는 내내 뭉클했습니다. 어쩌면 이 이야기야말로 촘촘하게 디테일들을 쌓아올려간, 가슴 깊은 곳에서 울리는, 이야기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바로 그런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어요. 어쩌면 설님이 그렇듯이 저 역시 집에 관한 이야기를 너무나 좋아하기 때문에, 이 편지가 유독 좋았는지도 모릅니다.
지난번 편지에 제가 말씀드렸듯이, 저는 요즘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자주 하고 있습니다. 가급적이면 좋은 이야기를 쓰고 싶은데, 대체 좋은 이야기란 무엇이고 좋지 않은 이야기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에 몰두해 있다 보면 머리가 어질어질합니다.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느낌입니다. 길을 잃었는데, 제가 어디에 있는지도, 무엇을 찾아가는지도 모르는 기분이 듭니다. 그런데 그 느낌은 이상하게도, 질투의 감정과, 그 뒤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자괴감과 닮았습니다.
어떤 책을 읽으면서 저는 ‘흥! 이딴 책이 잘도 베스트셀러가 되었구나!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고 화를 냅니다. 저는 하루 종일 배가 아픕니다. 도대체 저 사람에게는 있고, 내게는 없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면 '내게는 무언가가 없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지요. 그렇게 저는 자괴감의 늪에 빠져 허우적댑니다.
그래서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 더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질투와 시기는 대체 왜 생기는가? 질투심과 시기심은 어떤 이가 실제로 가진 것보다 더 후한 평가를 받고 있다고 느낄 때, 그 사람의 명성이 부당하다고 느낄 때 스물스물 피어나는 감정 같습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가 하면, 정말로 좋은 책이나 글을 읽을 때는 그런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행복하고 감사한 기분이 들 정도지요.(지난번 설님의 편지를 읽으면서 꼭 그랬습니다.) 그러나 제가 별로 좋지 않게 평가하는 글이 찬사를 받을 때면 속이 쓰릴 때가 다반사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저라는 사람을 질투할 수도 있겠지요. 별 대단치도 않은 일기 나부랭이를 써놓고는 이런 걸 책으로 내다니 얼씨구,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저는 제 질투심이 아니라, 타인의 질투심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합니다. 완전히 반대의 입장에 서보는 거지요. 저는 그 질투하는 사람에게 말합니다. ‘내가 당신보다 나아 보이는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겠지. 당신은 인정하지 않을지 몰라도, 분명히 무슨 이유가 있을 거야. 아니, 어쩌면 이유 따위는 없을지도 몰라. 그저 내가 당신보다 운이 좋았던 거겠지. 아니면 최소한 나는 남을 질투할 시간에 뭐라도 썼잖아? 썼으니까 이렇게 되었겠지. 그러니까 질투하고 시샘할 시간에 그냥 당신 걸 하세요.’ 그리고 저는 반대로, 저 자신에게 그 말을 고스란히 돌려줍니다. 마음이 쓰립니다.
설님, 이 책 읽어보셨어요? 이번에 저는 제 책장에 꽂힌 오래된 책 <따귀맞은 영혼>을 다시 훑어보았습니다. 이 책은 독일의 심리치료사 베르벨 바르데츠키의 책으로, ‘마음의 상처에서 벗어나는 법’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아주 오래 전에, 그러니까 30대 초중반 즈음에 읽었습니다. 저는 그때 어떤 책이라도 읽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신문이건 잡지건 인터넷이건 누군가 추천하는 책들은 기억해 두었다가 도서관에서 빌려 열심히 읽었습니다.
지금은 이런 심리학 책을 잘 읽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사실, 너무 많이 읽었거든요. 몇 권을 읽고 났을 때는 맞아, 그래서 내가 그렇게 힘들었던 거였어, 엄마가 나를 조금만 덜 잡았더라면 내가 이렇게 자존감 낮은 인간으로 자라지는 않았을 텐데! 라고 생각하며 애꿎은 엄마를 미워했지요.
그런 책들은 당신이 그러한 상태에 있는 것은 문제이다, 그리고 그 문제에는 이유가 있다, 문제를 극복하고 자신을 사랑하면 당신은 최상급의 자존감을 갖게 되고 그 다음부터는 어떠한 난관이 닥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된다, 고 말합니다. 어느 순간부터 그게 좀 이상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책을 아무리 읽어도, 자존감은 높아지지 않는 것 같았고 난관이 뭡니까, 누군가가 던진 무의미한 말 한 마디에도 밤잠을 못 이루며 괴로워하는 일이 태반이었거든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책을 한 권 읽은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면서요? 동의합니다. 특히 어떤 책이 자신의 마음을 완벽하게 대변해주는 것 같을 때가 가장 위험하지요. 그것은 그 책의 의견일 뿐이니까요. 하나의 책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닌, 하나의 의견에 불과합니다.
스물한 두 살 무렵에 저는 친구가 선물해준 오쇼 라즈니쉬의 <배꼽>이라는 책에 푹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꽤 과격한 친구였어요. 걔는 아마 정신 차리고 살라는 의미에서 제게 그 책을 선물한 것 같습니다.) 그 책을 읽은 저는 그제야 제가 구하던 답을 발견한 기분이었으며, 제가 알게 된 것을 아직도 모르고 있는 세상 모든 인간들이 멍청해 보이기 시작했지요.
저는 방학 때 집에 내려가서 아직 고등학생인 남동생에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라며 일장연설을 했고, 부모님과 함께 강원도로 놀러가는 차 뒷좌석에 구멍난 츄리닝 바지를 입고 누워서 내내 그 책을 읽고 있었어요. 부모님은 저게 미쳤나, 저거 저러다가 망가지면 어떻게 하지, 하고 걱정하셨을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저보다 더 그 책을 더 열심히 읽은, 그러다 못해 한 코미디언이 운영하는 라즈니쉬 명상센터인지 뭔지 하는 데 가서 명상을 한다는 학교 선배를 만났습니다. 그 선배는 제게 명상센터에 같이 가서 명상을 하자고 권하더군요. 그러면서 그 언니는 사람은 명상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던가, 명상을 해야 제대로 살 수 있다던가 뭐 그런 말을 했는데, 그 언니의 순수하고 맹목적인 표정을 보는 순간 저는 정신이 번쩍 들었지요. 아, 이건 아니다. 그래서 저는 말했습니다. “언니, 사는 게 명상이에요.” 저의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에 언니는 “아아” 하면서 뭔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고, 그래서 저는 그 언니가 더 무서워졌습니다.
얼마 전에 저는 넷플릭스에서 라즈니쉬와 그 추종자들의 사이비 행각을 고발한 다큐멘터리를 발견했어요. 오래 전의 그 <배꼽>을 떠올리면서 보니 무척 흥미로웠지요. 그들, 구루라는 존재를 만들고, 그 존재를 추종하던 무리들은 순수하고 오만했습니다. 순수하고 오만했던 사람들은 곧 맹목적으로 변했고, 무자비해졌고, 잔인해졌습니다.
라즈니쉬가 죽고 모든 것이 끝난 지금, 그들은 각자의 평범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과거를 회상할 때, 그들은 다시는 되찾을 수 없을 완벽하게 아름다운 것들을 그리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저는 그들이 무서웠습니다. 저는 순수하고 오만한 사람들을 무서워하는 편입니다. 아무튼 저는 오래 전 제게 <배꼽>을 선물해준 친구에게 그 다큐멘터리 이야기를 했고, 친구는 어쩐지 부끄러운 것 같은 표정으로 웃었습니다. 우리는 다행히 미치지도, 망가지지도 않았습니다.
인간의 심리에 관련된 책들은 우리의 상처와 문제점들을 들여다보게 하는 교재가 되지요. 그러나 셀프 진단, 셀프 치료는 위험한 법입니다. 그리고 자칫 잘못하면 자신의 문제에 함몰되게 할 수 있지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내가 제일 아픈 사람, 이라는 자기 연민에 빠질 위험도 있습니다.(제가 그랬던 것처럼요.) 이런 사람들은 이 심리학 책을 읽고 그 다음에는 저 심리학 책을 읽으며 자신의 문제를 넘어서, 세상 모든 사람의 문제를 지적하고 해결하려 노력합니다.(저처럼요.)
그런 바보 같은 짓을 십수년간 해온 결과 저는 그때처럼, 라즈니쉬 명상센터에 가자고 했던 선배를 보며 ‘이건 아니다’ 라고 깨달았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 문제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보다 나 자신이 그렇게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기도 했고요, 그보다 더 시급한 일들이 널려 있었기 때문에 마치 전쟁통에 자살률이 줄어드는 것처럼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기도 했고요, 남들에게 과분한 칭찬을 들을 기회가 조금씩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자존감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따귀맞은 영혼>이라는 책을 여전히 제 책장에 꽂아두고 있는 이유는, 이 책이 사이비 구원을 약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감정이라든가 마음의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약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신 이 책은 그것조차 삶의 일부라고 말해줍니다. 이 책의 논지는 다분히 과학적이고, 그래서 저는 안심이 되었습니다.
마음이 상하는 건 삶의 한부분입니다. 마치 우리가 매일매일의 생활에서 자신의 자존감에 공격을 받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비판받고 거절당하고 따돌림당하는가 하면, 버림받기도 하고 배척당하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는 남들에게 사랑받고 받아들여지고 칭찬받고 선망받기도 합니다. 물론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진심으로 바란다 해도, 남들의 거부를 겪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저는 오래 전에 제가 밑줄을 그어둔 구절들을 다시 읽어봅니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과 호오에 전전긍긍했던 어린 제 모습이 보여서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여전히 좋은 구절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40대가 되어 이 책을 다시 읽어보니, 저는 다른 구절들보다 이 구절에 더 마음이 갑니다.
마음상함은 기대가 어그러졌을 때 나타나는 반응입니다. 마음을 잘 다치는 사람은 시간을 갖고 기다릴 능력이 없습니다. 무엇에 대해선가 인정을 받고 싶을 때, 그것을 당장 받아야지 나중까지 기다릴 수 없습니다. 마치 나중에 받는 칭찬은 지금 당장 받는 칭찬보다 가치가 떨어지기라도 한다는 듯이 말입니다. 기대하는 대신 희망을 품는다면, 시간을 넉넉히 잡고 끈기 있게 기다릴 수 있다면, 마음상함은 피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태도를 나는 느긋함이라고 부릅니다. 느긋할 때 우리는 자기 감시를 그치고 자신을 신뢰합니다. 우리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건 그냥 흘러가게 놔둘 뿐, 우리 영향권 바깥에 있는 일을 좌지우지하겠다고 힘을 낭비하지 않지요.
느긋함이라니. 그랬구나. 나는 늘 초조했구나. 내가 마음을 잘 다쳤던 이유는 시간을 갖고 기다릴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구나.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들까지 내 힘으로 어떻게 해보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일을 그르치거나, 할 수 있었던 일도 하지 못했구나. 나의 20대와 30대는 그러했구나.
그러고 보면 질투심과 시기심도, 열등감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들까지도 내 손으로 끝장을 보고 싶어서, 저는 전전긍긍합니다. 왜 그 따위 책이 인기를 끄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모두 내 이해의 아래에 있는 것은 아니지요. 세상이 내 마음대로 흘러가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저는 올해의 목표를 무엇보다도, ‘느긋함’으로 정했습니다. 저는 매년 하나의 목표를 세우는 편인데 사실 세우고 나서 바로 까먹기는 합니다만, 그 목표는 마음 한구석에 남았다가 이런 저런 문제들이 있을 때마다 슬며시 나타나서는 ‘올해는 이렇게 살아보기로 했잖아?’ 하고 저를 채근하지요.
저는 올해 무엇보다 느긋하게 살아보기 위해 노력할 작정입니다. 시간보다 빨리 움직이려 하지 않을 계획입니다. 무엇이든 천천히 하고, 공을 들이려고 합니다. 결과가 금방 나오지 않더라도, 결과가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조급해하지 않고 가던 길을 계속 가보려고 합니다. 제가 어떤 사람이 될지에 대해서는 아주 오랜 후에 시간이 알려주리라는 것을 믿어보려 합니다. 기대가 아닌 희망을 품어보려 합니다. 흉측한 쥐젖 제거처럼 단돈 6만원에 일망타진할 수는 없겠지만, 수십년간 쌓여온 제 마음의 조급함들이 서서히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2022년의 마지막에, 제가 어떤 인간이 되어있을지 지켜봐 주십시오.
2022년 3월 18일,
오늘부터 느긋해질 수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