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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 Mar 23. 2022

저자를 걱정하는 독자들에게

아니에르노의 책들


수희님 안녕하세요?

나는 요즘 한가합니다. 오늘 아침에는 늦잠을 잤어요. 흠... 가만히 생각해보니 늦잠이라는 표현이 딱 맞는 표현이 아니네요. 현재의 내 생활은 시간이 정해져 있는 일이 아예 없으니 늦다와 이르다는 단어가 별 의미가 없으니까요. 그냥 다른 날보다 수면 시간이 길어졌다는 말이 정확하겠어요, 잠을 많이 자다 보니 새벽에 우연히 잠이 깨어 바로 잠들지 못하는 날이 좀 많아요. 어제도 새벽 3시에 깨어 뒤척이다가 길에서 살던 어떤 개가 캐나다로 입양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을 시청했어요. 캐나다로 떠나기 전 임시 보호자와의 이별을 감지한 개의 행동이 결국 저를 울게 만들었어요. 나는 오밤중에 귀신처럼 흐느끼면서 곤히 잠든 우리 집사(고양이 이름)를 쓰다듬으며 혼잣말을 했어요. 나는 너를 사랑해. 절대 너를 불행하게 만들지 않을게....라고요. 그러면서 행복한 잠에 빠져있는 고양이를 굳이 깨웠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사과 한쪽을 잘라 아주 천천히 깎아서 먹어요. 얼마나 천천히 깎느냐면 말이죠.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저 사람 어디 아픈 거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할 정도로 천천히 깎아요. 내가 깎은 한 조각의 아침 사과는 그래서 예쁘고 정갈합니다. 그걸 다시 작은 조각으로 자른 뒤에 하나씩 입에 넣고 아주 천천히 씹습니다. 인간 착즙기가 된 심정으로 입속에서 즙을 내어 먹어요. 사과 한쪽을 대략 십 분 동안 먹고 나면 이번에는 50그램 정도 크기의 삶은 고구마와 우유 한 잔을 먹기 시작합니다. 이번에는 인간 믹서기가 됩니다. 고구마와 우유를 먹는 내 얼굴은 아마도 멍 때림이란 어떤 것인가를 증명해 보이는 얼굴일 거예요. 그렇게 우유와 고구마까지 천천히 먹고 나면  한 시간은 족히 지나가 있어요. 네, 나는 천금 같은 아침 시간을 그렇게 하릴없이 보내고 있어요. 그다음 순서로 고양이랑 잠깐 놀아주다가 잠든 걸 확인하고는 노트북을 들고 카페로 나와 글을 쓰거나 노닥거립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고요? 그냥 자랑하는 거예요.ㅎㅎ


수희 님도 아시겠지만 나는 요즘 사생할 속 사생활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연재하고 있어요, 어떤 글을 쓰기 시작하면 의식처럼 하는 질문을 있어요. "너는 이 글을 왜 쓰려고 하니?" 이번에는 몇 가지 질문이 더해지더군요. 너 혹시 넋두리를 하고 싶은 거니? 그게 아니라면 지난 시절에 겪은 불행을 굳이 꺼내는 이유가 뭐니? 두 가지 질문이 더해진 이유는 아마 사생활 속 사생활에 쓰게 될 이야기의 대부분이 나와 남편이 얼떨결에 만든 작은 사회, 바로 결혼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일 거예요. 그만큼 내밀한 이야기를 담게 될 테니 저로서도 망설임이 적지 않았어요, 사실 이 편지를 쓰는 지금도 결혼이 나의 행복을 위협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고민은 여전하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써보자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어요.


그리고 마침내 독자들을 걱정시키는 저자가 되었습니다. (아니러니 하게도 이건 저의 오랜 꿈이기도 했어요. 나의 책[사생활들]에 이미 밝혔었죠.) 얼마 전에는 독자의 우려 섞인 편지를 받기도 했어요. 편지의 내용 인즉은 내가 지나치게 솔직하다는 거예요. 정말 그런 걸까요? 그러나 나라는 인간은 그나마 이 솔직함마저 없으면 정말 장점이라고는 없는 사람일지도 모르는데  솔직함이 지나치다고 하니 당황스럽더군요. 솔직함이라는 것은 과하게 쓰이면 순식간에 단점이 된다는 것쯤은 나도 알아요, 번짓수를 잘못 찾아 들어가면 난감한 일이 좀 생긴다는 것도요. 아무 의도 없이 솔직하게 한 말과 글에 어떤 사람은 서운함을 느끼고 상처를 받고 반감을 품기도 하니까요. 독자들은 내가 쓴 글로 내 남편이 상처를 받을 거라는 확신이 있는 것 같고 혹시 그 상처로 인해 저자인 나와 남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사건 같은 게 생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는 듯해요. 저는 독자들의 걱정이 기분 나쁘기는커녕 내심 즐기고 있는 것 같아요. 나쁜 저자.


 "솔직하면 다냐?' '그렇게 다 털어놓으면 시원해?' 이렇게까지 말하는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했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비슷한 환청이 들리는 것 같아요. 예상보다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분도 있고 반대로 숨겨진 이야기가 더 있을 거라는 짐작을 하며 다음 글을 기다리는 분도 있네요. 어쨌거나 이런저런 말들이 많이 오가는 걸 보면서 내가 쓰는 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건 사실이에요. 나는 왜 이런 글을 쓰고 싶은 걸까?

오늘은 그 얘기를 좀 해보고 싶네요




수희 님

나는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내가 가야 할 길이 명확해질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요. 특히 결혼 생활에 대해서는 더욱 믿는 구석이 있었어요, 내가 하는 사랑이 순수한 것임을 믿었고 사랑의 가치를 약간은 종교처럼 여기기까지 했으니까요. 나는 사랑을 그렇게 배웠던 것 같아요. 그저 추상적이고 신비로운 개념으로. 내가 하는 사랑은 깨끗하고 숭고한 것이라는 착각도 했던 것 같아요. 내 사랑에 대한 지나친 믿음과 찬양이 결국 나에 대한 찬양이라는 것도 그때는 알지 못했어요, 배우자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를 사랑하는 나를 사랑한 거죠. 나라는 인간에 대해 그렇게 무지한 상태로 시작한 결혼이 원하는 대로 흘러갈 리 없겠지요. 나의 결혼 생활은 나의 민낯을 확인하는 불쾌한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 생활을 하면 할수록 행복과 기쁨으로부터 멀어지기만 했죠, 어느 날부터는 남편의 사소한 단점이 덮어지지 않고 머릿속의 계산기가 돌아갔어요. 내가 해준 것과 받은 것을 따지기 시작했고 그와 살고 있는 내가 아깝다는 생각까지 했어요. 벌이가 없는 그가 내가 버는 돈에 기대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런 남편의 욕망과 무능함을 비난했고 마음속에는 미움이 무럭무럭 자랐어요. 행복으로부터 점점 멀어진 것이 명백한 사실이 되었으니 고민이 점점 커져갔고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어 졌어요. 어떻게 하면 이혼을 할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은 아니고 어떻게 하면 결혼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요? 였어요. 돌아오는 대답은 뻔했죠. 주로 이러저러한 것들을 시도해 보라는 답이었어요.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해라. 모두가 부부의 사랑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답변들이었어요. 시간이 약이다.나이가 들면 저절로 해결된다. 등등.


남편과의 결혼 생활 중에는 이상한 일도 많이 일어났어요, 내가 한 일도 아닌데 내 잘못이 되어버린 일. 아무리 생각해도 따져 물어야 할 일인데 다른 여자들이 참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나도 참았던 일. 맞을 일이 아닌데 남편에게 어이없게 맞았던 일, 이건 아니지! 하고 눈을 부라리며 따지고 싶은 일 등. 그런 일을 당해도 늘상 참았어요. 여건이나 상황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핑계를 댔지만 사실은 밖으로 드러낼 용기가 없었어요. 40이 넘으면서는 나잇값을 못한다는 자책까지 더해져 끝내 입을 다물었어요. 딸아이에게 부끄럽다는 생각에 눈물을 머금고 화를 삭인 적도 있고요. 급한 대로 두툼한 담요 같은 걸로 덮어 놓았어요. 그러는 동안 결국 속병이 났는데 그 이유가 내 고약한 성격 때문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어요. 그렇게 나는 느긋함을 모르는 조급한 사람이 되어 갔어요. 제 성질대로 못해서 병이 나는 거라고 그러니까 성격을 고치라는 말을 들으며 내 성격까지 싫어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나는 이상한 방향으로 참는 인간이 되었어요. 느긋하지 못해서 병이 나는 인간이 아니라 참지 말아야 할 것도 참아서 스스로 병을 만드는 인간이 탄생하게 된 거예요


한편 나의 노력은 계속 이어집니다. 남편을 다시 제작하기 시작했어요.고쳐 써보려고 무던히 애썼어요, 눈에 거슬리는 것을 고치고 내가 원하는 인간으로 개조하려는 일방적인 폭력이었어요. 나를 위한 것이면서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속이면서요. 성과가 있을 리 없는 일에 에너지를 쓰면서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남편에게 무책임하다 불성실하다는 비난을 서슴지 않았어요. 물론 악의는 없었죠, 잘 살아보려는 노력이라고 생각했어요, 그에게 있던 결함을 들춰내느라 내 결함은 알지 못했고요. 이쯤 되면 그와 나를 위해서 이별의 수순을 밟을 법도 한데 그것도 쉽지 않았어요. 우리 사이엔 아이와 지나친 책임감과 어리석음이 존재했으니까요 급기야 남편과 나는 각자 자기 연민에 빠지게 됐고 불행이 일종의 습관이 되었어요.


나와 남편은 정말 오랫동안  흘리고 아프고 울고 불고 난리를 쳤어요, 그렇게 엉망으로 세월을 보내고 이제는 행복을 찾았다는 것을 자랑하려는 것도 아니에요. 게다가 행복하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에는 여전히 아픈 곳도 있고요. 나는 나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각자가 행복해지기 위한 노력을 지금까지 하는 중이고요. 이제 우리는 서로에게 향한 시선을 거두었어요. 우리가 보낸 끔찍한 시간에서 배운 것은 두가지예요. 행복한 사람만이 상대를 행복하게 한다는 . 그러므로 상대에게 행복을 구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에요.  하나는 이혼이  불행이라는 관념에서도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과 우리가 이혼을 실패로 보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에요. 사는  대체로 불행하고 가끔 행복한  같아요. 결혼 생활은 가뭄에  나듯 행복하고 대체로 많이 불행하다는  인정하면 되는 것이었어요. 행복은 그렇게 드물고 귀한 것이에요. 그러니 나와 남편과 자식 모두가 동시에 함께 행복할 거라고,  그런 방향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우선 나부터 행복해져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그러다가 모두가 불행해지면 이혼으로 가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 이것이 내가 사생활  사생활을 쓰는 이유랍니다.


수희 님 문학이란 모든 것을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기이한 영토라고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말했다고 해요. 나도 내 기이한 영토에 어울리는 이야기를 담고 싶어요. 내 삶은 언제나 최선이었고 또 최악이었기에 이상하고 야릇한 사실들이 가득하거든요. 때때로 과장하고 축소하겠지만 어디까지나 진실을 기반으로 한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 아니 에르노처럼 내가 겪은 것만 쓰는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한 건 그래서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누군가는 그런 나를 염려하겠죠. 자기 세계에 갇힌 사람, 오로지 자신을 위한 글을 쓰는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 일기 같은 것만 쓰는 사람. 불특정 다수를 설득하지 못하는 글을 쓰는 무능력한 작가. 내 이야기를 쓰다가 내가 먼저 우는 주책바가지.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속을 뒤집어 보이겠다는 욕망에 나는 늘 이끌리고 마지막엔 체면에 발목이 잡혀요. 빙의된 무속인처럼 쓰고 제정신이 돌아오면 덜컥 겁이 나기도 하고요. 중요한 담론도 없고 예리한 통찰도 찾아보기 힘든 내 글이 밤에 쓴 일기 같을까 봐 걱정도 돼요. 다음 날 아침이면 부끄러워지지만 내 삶의 한 장면이 잠시 동안 누군가에게 닿았다가 부스러진다 해도 좋을 것 같아요. 하지만 나의 이야기를 쓰기 전에 항상 같은 의문은 남네요  담백하게 쓰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담백하게 쓰고 싶어요, 그러나 솔직히 자신이 없네요. 그래서 나는 아니 에르노의 책을 교과서라고 생각하고 읽어요.

아니 에르노가 책에 기록한 삶이 아니 에르노 개인의 기억이면서 다수의 기억이듯이 내가 쓴 글도 나의 이야기이면서 동시대를 함께한 여자의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고통스럽게 흘려보낸 것은 나 혼자 산 세월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온 세월이 되는 것이죠.




20223.23

 김설

 

덧. 남편에게 물었어요. 우리의 이야기를 써도 괜찮은가. 그 속에 당신이 부끄러워할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다행히 괜찮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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