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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수희 Mar 31. 2022

윗집과 아랫집 사이에서

정소현 <가해자들>

설님, 안녕하세요.


얼마 전에 인스타그램에서 엄청나게 웃긴 걸 읽었습니다. 저는 바보 같이 웃긴 이야기를 좋아해서(남편 말에 따르면 유머 취향이 저급한 스타일), 그런 이야기를 발견하면 혼자서 눈물을 흘리며 웃다가, 또 혼자 생각하면서 웃곤 합니다.


그 이야기는 이런 겁니다. 누군가가 ‘병원인데 문자 주세요’ 라는 문자 메시지를 받습니다. 모르는 번호입니다. 이상하지요. 병원에서 왜 이런 메시지를 보내는 걸까요. 그는 ‘어느 병원이신가요?’ 하고 묻습니다. 그런데 상대는 똑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병원이니 문자 메시지를 보내 주세요. 그는 의심스러워서 다시 어느 병원이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상대가 갑자기 이렇게 답합니다. ‘멀리 있습니다.’ 갑자기 오싹해지지요.


처음에는 병원인지 아닌지 긴가 민가 하다가, 스팸 메시지인가 싶어 화가 나다가, 미친 사람인가 싶어 무서워집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묻습니다. 대체 어느 병원입니까? 그리고 자신이 아는(아마도 그가 다니고 있을) 병원의 이름을 대며 그 병원이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상대는 그런 걸 왜 묻느냐고, 내 병원을 왜 물으시는 거냐고 되레 따지지요.


아아, 그제야 그는 깨닫습니다. 방금 전에 부동산에 전화를 걸었다가 받지 않아 끊었는데, 부재중 전화로 뜬 자신의 번호를 보고 부동산 사장이 문자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는 사실을요. 미친놈한테 온 메시지인 줄 알았는데 사실 자기가 미친놈이었던 겁니다.


끝까지 다 읽고 나서 처음으로 돌아가 저는 그 메시지를 상대편, 그러니까 부동산 사장의 입장에서 다시 봅니다. 정말 무섭습니다. 내가 병원에 있다는데 자꾸만 어느 병원이냐고 캐묻는 미친 사람. 저는 이 메시지들을 세 번인가 네 번을 보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웃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재미있는 구석은 어느 순간 미친놈과 정상인이, 가해자와 피해자가 역전된다는 점입니다. 둘 다 그럴 의도가 없었음에도 그렇게 되어버리고 말지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저는 얼마 전에 읽은 소설 <가해자들>을 떠올렸습니다.


설님, 이 책 읽어 보셨어요? 이 소설은 층간소음에 관한 소설입니다. 이 소설의 대단한 점은,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소재를 붙들고 책 한 권을 기어이 써냈다는 점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저는 작가의 정신력과 투지에 감탄하고 맙니다. 왜냐하면 층간소음이라는 것을 생각만 해도 저는 가슴이 쿵쾅거리고 살기가 싫어지거든요. 이런 우울한 이야기를 끝내 완성해 내다니,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제가 층간소음이라는 것에 이렇게 신경질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저 역시 층간소음의 피해자이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 아파트에서 살다가 자취를 하면서부터는 허름한 주택들을 전전했고, 결혼 후 다시 아파트 생활을 좀 하다가 또 허름한 주택과 빌라를 전전했습니다. 정말이지 저는 다시는 아파트 같은 곳에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만, 어쩔 수 없이 2년 전에 이 아파트로 이사를 오게 되었지요. 이건 어디까지나 임시 거처일 뿐이라고 못박으면서요.


제가 아파트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저 재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맞는 생활 방식을 영위하기에는 집이 너무 플랫하다, 그러니까 납작하고 평평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별스럽지요? 하지만 한번 사는 인생, 자기가 살고 싶은 집에서 살아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저는 어릴 때부터 집에 대한 상상을 유별나게 많이 했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은 빨강머리 앤과 말괄량이 삐삐를 섞어놓은 것 같았지요. 매일 산으로 들로 기찻길로 냇가로 뛰어다니고, 땅을 파헤치고, 비밀기지를 만들고, 위험한 놀이를 했습니다. 그리고 방에 엎드려 달력 뒷장에 그림을 그리면서 별의별 공상을 다했어요.


그 시절 우리는 아파트라고 부르기도 뭣한 3층짜리 작은 아파트의 3층에 살았는데, 어느날 주인이 아무런 말도 없이 집을 내놓는 바람에 화가 난 엄마가 새 집을 알아보러 다닌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최종 낙점한 집은 낡은 주택이었어요. 우리가 가진 돈으로 구할 수 있는 최선이었지요. 그 집은 심지어 화장실과 욕실이 집 바깥에 있었습니다. 엄마는 기가 막히다는 듯 대체 한겨울에는 어떻게 목욕을 하느냐고 투덜거렸어요. 엄마는 목욕을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거든요.


그래서 아빠는 부엌 쪽의 문에서 욕실까지 이어지는 통로를 나무와 비닐로 만들어주겠다고 엄마를 꼬셨습니다. 아빠는 이것저것 혼자서 잘 만드는 사람이었거든요.(지금은 방에 앉아 인터넷만 합니다만…) 저는 한겨울에 목욕을 마치고 수건을 몸에 두른 채 소리를 지르며 그 통로를 뛰어가는 제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너무 너무 즐거울 것 같았어요. 그러나 그 집의 가장 멋진 점은 꽤 너른 다락이 있다는 거였어요. 엄마는 기운을 내려는 듯 “그래, 여기다 수희 침대를 넣으면 되겠다” 하고 말해줬습니다. 저는 너무나 기뻤지요. 다락방의 침대라니!(사실 그때까지 제게는 침대가 없었거든요.)


우리는 결국 그 집으로 이사를 가지 않았습니다. 집 주인이 통보도 없이 집을 내놓은 것을 사과한 후 아파트에 계속 살 수 있게 되었거든요. 저는 너무 아쉬워서, 학교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마다 일부러 그 집을 지나치며 친구들에게 말했지요. “내가 저 집에서 살 수도 있었는데! 저 집이 우리 집이 될 수도 있었는데!”


저는 이사를 좋아합니다. 이사온 지 2년도 채 안 되었는데, 요즘도 심심할 때마다 네이버 부동산에 들어가 어디 좋은 집이 없나 살피지요. 얼마 전에는 2층짜리 주택이 무척 싼 가격에 나온 것을 봤는데 준공년도가 무려 1930년대였어요. 적산가옥이더군요. 저는 그 집에 홀딱 반해버렸습니다. 2층으로 올라가는 좁은 계단과 벽장, 나무로 된 천장 같은 것들. 그러고 보면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결코 늙지 않는 건가 봐요.(하지만 이사에 수반되는 그 모든 골치 아픈 절차는 너무너무 싫어합니다.)


또 쓸데없는 이야기만 잔뜩 해버렸네요. 자 자, 아파트의 층간소음 문제로 다시 돌아가볼게요.  제가 이사온 아파트에도 층간소음이 있습니다. 지금껏 저는 층간소음이라는 것이 이렇게 끔찍한 것인지를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분명 예전에도 아파트에서 산 적이 있는데 그때는 몰랐어요. 대체 왜일까요. 이 아파트가 유독 층간소음이 심한 아파트인 걸까요. 아니면 제 신경이 점점 예민해지고 있는 걸까요.


층간소음의 가장 끔찍한 점은, 이게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점입니다. 사실 윗집은 그렇게 소음이 심한 집은 아닙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분이 사는 집이에요. 발소리를 쿵쿵거리며 걸어서, 이른 아침이면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지 눈에 그리듯이 훤히 보일 정도로 잘 들리긴 합니다만, 밤 9시가 넘으면 아주 조용합니다. 아마 일찍 주무시는 것 같아요. 문제는 이 집 손자들입니다. 딸들이 근처에 살며 오후부터 저녁때까지 아이들을 데리고 옵니다. 저녁까지 먹고 가는 것 같은데, 이 놈들이 무지막지하게 뜁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천장에서 돌이 구르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립니다.


층간소음은 그저 소음이 아닙니다. 진동입니다. 머리가 울리고 심장이 벌렁거리는, 그야말로 사람 환장하게 하는 진동입니다. 그래서 괴로운 것입니다. 아이들이 잠깐씩 뛰어가는 것이야 어쩔 수 없지요. 그런데 얘들이 아주 운동장에라도 온 듯 뜁니다. 조금만 참자. 조금만 참아보자. 그러다가 30분이 넘어가고 한 시간이 넘어갑니다.


견디다 못해 위층으로 올라갑니다. 조금만 조심해 주실 수 있을까요? 서너 명의 꼬마들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를 하고 있습니다. 어른들 중 누구도 제지하지 않습니다. 슬리퍼도 신기지 않고, 매트도 깔지 않습니다.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않습니다. 미안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애들 금방 갈 거예요, 라고 말합니다. 그게 지금 할 말인가 싶습니다. 할머니는 급기야 이렇게 말합니다. 이웃끼리 그런 것도 못 참으면 아파트에서 어떻게 살어? 할머니의 입장에서 저는 할머니의 이웃이고, 할머니는 저의 이웃이 아닌가 봅니다.


한 번은 그 집에서 우리 집까지 내려와서는 어디 얼마나 큰가 봅시다, 라고 한 적도 있습니다. 기가 막힙니다. 세 번째쯤 올라갔을 때는 고성이 오가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쪽에서 먼저 소리를 질렀습니다.(저는 생각보다 싸움을 못 하고 싸움을 싫어합니다.) 인간적으로 이런 시간에는 안 올라와야 하는 거 아니에요?! 하는 할머니 앞에서(그때가 저녁 7시였는데 세 시간째 뛰고 있었습니다) 어버버버, 하다가 돌아와 버렸지요.


퇴근 후 집에 돌아올 때면 가슴이 벌렁거립니다.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하고 편하게 쉬고 싶은데, 오늘은 또 얼마나 뛸까 싶어서 가슴이 오그라듭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급하게 라디오를 큰 소리로 켭니다. TV도 켭니다. 저 진동을 조금이라도 듣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미움에는 너무나 큰 에너지가 듭니다. 저는 제 소중한 에너지를 그런 데 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우리가 위층을 미워하는 만큼, 아래층도 우리를 미워하고 있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이사 온 지 한 달쯤 되었을까요, 현관문 앞에 쪽지 한 장이 붙어 있었습니다. 가능한 한 예의를 차려 쓴 그 쪽지의 내용은, 이사 전 인테리어 공사 때도 많이 참았다, 공동주택에서 밤 11시 이후에 조용히 하는 것은 예의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아, 아찔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유는 있었습니다. 인테리어 공사 때는 다른 도시에 살아서 우리가 와볼 수가 없었고, 아파트는 이미 비어 있는 상태였고, 그러는 동안 인테리어 사무실 사장님이 한 달 내내 찔끔찔끔 와서 공사를 하는 바람에 오랫동안 소음이 상당했을 겁니다. 밤 11시 이후에 소리를 낸 것은 십중팔구 남편의 모기 잡기 때문입니다. 집이 숲과 면해 있는데다 방충망도 엉망이라 모기가 정말 많았습니다. 이 사람은 꼭 모기를 점프를 해서 잡습니다. 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는데(남편이라는 사람들은 늘 정말 대체 왜 저러는지 모를 짓들을 하지요…) 그때는 그게 그렇게 큰 소리가 날 줄 몰랐습니다. 아파트에 너무 오랜만에 살게 되어서이기도 했지요. 아무튼 우리 가족은 밤 10시 즈음이면 모두 침대에 눕기 때문에 소음은 모두 이 남자 때문입니다.


너무 너무 괴롭고 미안하고 아무튼 그런 마음으로 무조건 잘못했고, 슬리퍼 신고 다니겠다, 밤에는 더 주의하겠다는 내용의 장문의 편지를 쓰고, 빵까지 사서 그 집 문고리에 매달아 두었습니다. 층간소음의 말 못할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알기에, 한번 올라와서 얼굴 맞대고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날부터 우리는 슬리퍼를 신고 다니거나 발을 질질 끌고 다니거나 아예 발꿈치를 들고 다닙니다. 바닥에 뭔가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서로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립니다. 의자 다리에도 모두 소음 방지용 캡을 씌웠지만 소리를 내면 주의를 줍니다. 남편의 덩크슛 모기 잡기도 끝났습니다. 아이들이 자기도 모르게 뛰어가면 득달같이 소리를 지릅니다. "뛰지 마!"


그런데 어느 밤엔가, 무척 드문 일이지만 손님이 온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한 일이라고는 부엌 식탁에 앉아서 이야기를 한 것뿐입니다. 그러다가 화장실에 몇 번 왔다갔다 한 것뿐입니다. 그들이 돌아가고 아이가 소파에 앉다가 소파가 뒤로 밀리면서 끼익,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러자 밑집에서 천장을 쿵쿵쿵쿵 하고 두드리더군요. 깜짝 놀랐습니다. 이렇게 잘 들리는구나. 우리 집 소리도, 그 집 소리도. 저렇게 두드리기까지 얼마나 참았던 걸까.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윗집에서 아이들이 심하게, 오랫동안 뛸 때마다 천장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랫집은 우리집 바닥을 두드리고, 우리는 윗집 바닥을 두드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미워합니다. 이것이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서로 조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조심합니다. 슬리퍼를 신고, 발을 끌며 걷고, 의자를 살며시 들어 옮깁니다. 그러다가 내 집에서 쿵쿵거리면서 걷지도 못하는, 뛰지도 못하는, 의자도 못 끄는 이것이 무슨 내 집인가 싶습니다. 내 집에서 계속해서 아랫집과 윗집을 의식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도대체 뭔가 싶습니다. 아파트가 싫습니다.


<가해자들>의 첫 장 ‘1111’에는 1111호에 사는 여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자는 층간소음으로 고통받고 또 고통받지요. 하지만 아무도 이 고통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저는 이 여자의 마음이 제 마음 같아서 소름이 끼쳤습니다. 해결할 수 없는 나의 고통을 타인에게서 목격하는 일은, 그렇게까지 위안받거나 후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숨이 막혔습니다.


나는 계속 견디는 중이었다. 아래층에 사는 사람이라 견디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내가 이른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위층 사람들은 분주히도 움직였다. 거실에서 주방으로, 화장실로 큰 발이 바닥을 쿵쿵 찍으며 오갔고, 몇이나 되는지 모를 작은 발들은 방에서 거실로 다다닥, 다다닥, 콩콩하며 뛰어다녔다. 아이들이 달리건 점프를 하건 뛰어내리건 부모가 전혀 주의를 시키지 않는 것 같아 난 더욱 화가 났다. 나는 텔레비전을 크게 틀어놓고 노래를 부르며 소음을 떨쳐버리려 했지만, 그소리까지 더해지니 더욱 힘들어졌다. 식탁에 앉아 있자니 맥박이 심하게 뛰고 숨이 가빠져 밥을 먹을 수 없었다.


괴로워하는 아내를 남편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니, 이해하려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늘 참는 것이 익숙하던 여자는 시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온 상처로 별의별 특이한 신체적 고통을 겪습니다. 결국 십년이 넘게 문도 열지 못하고 바깥 출입도 할 수 없고 감각이 지나치게 예민해지다 못해 들리지 않는 소리까지 들리는 지경에 이르지요. 아이는 아이대로 엄마로 인해, 불행한 가정 생활로 인해 고통받습니다. 그들 사이의 갈등은, 좋은 상황이라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을 연약한 관계의 사슬은 조금씩 삭아가기 시작합니다. 결국 남편은 집을 나가버리지요.


“아기도 어린데 골치 썩이지 말고 그냥 이사 가세요. 사과하고 부탁들 한다고 들을 사람들이 아니에요. 저런 집이랑 붙어 살면 잃는 게 더 많아요. 아기가 운다고 난리 치는 사람이 어디 정상입니까?”
나는 그의 말에 위로를 받았다. 위층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사라지고 나자 두려움도 옅어지는 것 같았다. 성빈이가 울면 위층은 계속 음악을 틀고, 바닥을 두드리고, 발뒤꿈치로 쿡쿡 찍으며 온 집안을 걸어 다니고, 공을 튀기고, 줄넘기하고, 실내에서 할 수 없는 일들을 했다. 남편은 이 집에서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했지만, 이상하게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윗집에 미안한 마음이 없다 보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었다. 나는 청소 밀대를 길게 빼 들고 소리가 나는 천장을 찾아 쿵쿵 치며 이제 괜찮아, 속이 시원해, 라고 했을 때 남편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1111호에서 시작된 미움은 천장을 타고, 바닥을 타고, 벽을 타고, 배관을 타고 흐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견디지 못해 아파트를 떠납니다. 1111호의 모녀만이 남아서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습니다.


쓸데없는 문제에 대해 쓸데없을 만큼 진지하게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 저는, 그럼에도 머리가 나쁘고 생각이 짧아서 그 결론이 그다지 새로울 것도, 대단할 것도 없는 저는, 왜 이 집에서는 이렇게 층간소음이 크고 괴롭게 들리는 걸까, 하고 생각해봤습니다. 예전에 아파트에 살 때도 이 정도였나?


그때는 우리 집 주방 벽이 옆집 주방 벽과 맞닿아 있어서 그 집 아주머니가 지르는 소리까지 다 들릴 지경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새벽마다 깨어서 악을 쓰며 울 때가 있었고, 아침이면 죄인처럼 옆집 사람들 얼굴을 마주하곤 했었지요. 그들도 저에게 “애가 좀 우네요” 라고 씁쓸하게 웃으며 한 마디 했을 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대충 넘어갔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운이 좋았는지 어쩐지 한밤중에 윗집에서 에어로빅을 하는 것 같은 비상식적인 일은 겪지 못했습니다.


주택에 살 때도, 빌라에 살 때도 윗층에 다른 가족이 살아서, 그들이 쿵쿵거리는 소리가, 안마기의 진동 소리가, 휴대폰의 진동 소리가 다 들렸습니다. 좀 거슬리네, 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게 그렇게까지 고통스럽지는 않았습니다. 워낙 바닥이 부실한 집이라 우리 집 발소리에 아래층 아저씨가 괴로워해서 두꺼운 러그도 사다가 깔고, 슬리퍼도 신고, 발도 들고 다닌 적이 있었습니다만, 아무튼 그 집에서는 소음이라는 것이 이 정도로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층간소음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가슴이 울렁거리는 소음입니다. 왜일까? 대체 왜일까? 그러고 나서 생각해 보니 이 집은 샤시가 너무 튼튼합니다. 샤시가 너무 튼튼해서 베란다 샤시를 닫고, 거실 샤시를 닫으면 바깥 소리가 웬만큼 크지 않고서야 전혀 들리지 않습니다. 이상하게도 숲이 코앞인데 왜 새 소리가 하나도 없지? 예전 집에서는 새 소리가 어마어마하게 잘 들렸는데? 하고 샤시를 열어보니 그제야 새 소리가 들릴 정도였습니다. 예전 집의 샤시는 너무너무 부실해서 바깥의 소리가 다 들어왔습니다. 바깥의 소리가 뒤섞인 사소한 층간소음은 그렇게까지 고통스럽지는 않습니다.  


아무 소리가 없는 것 같은 공간에도 소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 촬영을 할 때, 녹음을 따로 하는 경우에는 꼭 룸톤이나 앰비언스라는 것을 따로 녹음해 둡니다. 스튜디오에서 대사를 녹음하는 경우 그 공간의 룸톤이 없기 때문에 어색해지거든요. 거리와 카페와 방의 아무 소리도 없는 소리를 녹음해둔 후 그 위에 대사를 얹어야 자연스럽습니다. 샤시를 꼭꼭 닫아둔 집안은 마치 스튜디오처럼, 진공 상태처럼 고요합니다. 룸톤이라는 것이 사라집니다. 그 진공 상태 속에서 위층의 발소리가 울립니다. 소리는 꽉 닫힌 집안에서 마치 동굴에서처럼 더 크게 울립니다. 그 사람은 그저 자기 집에서 걷고 있는 것뿐인데 증오심이 솟구쳐 오릅니다.


나는 집에 혼자 남았다. 이렇게 되고 보니 엄마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외로움이 만들어낸 실체도 없는 소리가 엄마의 삶을 잡아먹었다. 나도 머지 않아 그것에 먹힐 거다. 옆집 아줌마는 무슨 소리를 듣는 건지 엄마처럼 계속 벽을 두드리고 있었다.


외로움이 만들어낸 실체도 없는 소리. 이 이야기는 정말로 끔찍한 악몽 같습니다. 그러나 이 아파트 공화국에 사는 사람들은 매일 악몽 속에서 잠들고, 악몽 속에서 깨어납니다. 층간소음은 내가 만든 완벽한 진공의 세계의 침입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됩니다. 편지의 첫머리에 적었던 우스갯소리처럼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바꾸는 것으로, 서로 조심하는 것으로 세상은 달라질 수 있을까요. 저는 늘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었습니다. 남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것보다 내가 달라지는 것이 빠르고 나은 방법이라고요. 나를 바꾸는 것도 이렇게 어려운데 남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것이 쉬울 리가 없다고요.


그러나 층간소음을 생각하면서, 층간소음으로 사람이 죽고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는 이 세상을 생각하면서 저는 그걸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윗집의 아이들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아이들은 뛰어다니는 존재입니다. 아랫집 사람들에게도 죄가 없습니다. 집에서는 누구나 고요히 쉬고 싶습니다.


문제는 아파트입니다. 아파트가 문제입니다. 건축비를 아끼기 위해서, 그냥 싸게 올려서 많이 집어넣고 비싸게 파는 것만이 목적인 아파트가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안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발소리를 내면서 걷고 뛰고 의자를 끌고 물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은 이들이 문제입니다. 그것을 우리의 인류애와 정신력으로 이겨내라고 말할  없는 겁니다. 더는  된다고, 층간소음을 해결하라고, 층간소음을 해결하지 않은 공동주택에 허가를 내주어서는  된다고, 소리 높여 외쳐야 하는 겁니다. 이러다  죽는다고, 이게 사는 거냐고 말해야 하는 겁니다.


제가 사는 동인천에는 아파트가 많지 않습니다. 어차피 이 구석까지 들어와서 살 사람들도 없습니다. 재개발이 한창이지만 과연 그게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제가 사는 아파트도 오래된 산동네를 허물어 만든 아파트입니다. 지금은 저 멀리, 서해가 보일 정도로 낮은 주택들이 주욱 늘어서 있지만, 아마 곧 그 집들도 다 허물리고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설 것입니다.


이제 곧 사람들은 번듯한 새 아파트에 입성한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그리고 곧 윗집 사람이 쿵쿵대기 시작할 것입니다. 아랫집 사람이 천장을 치기 시작할 것입니다. 관리사무소에서는 서로간에 예의를 지키자고 외칠 것입니다. 그 아파트에 살 사람들은 다들 행복할까요? 행복이란 것은 고요한 내 집에서 그저 고요하게 쉴 수 있는,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2022년 3월 31일

수희 드림


추신. 삼성물산에서 층간소음 방지 공법을 개발했다고 합니다. 이제 층간소음 방지법인지 뭔지도 생겼다고 합니다. 환영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여전히 그 많은 아파트가 필요한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파트를 지어대는 것으로 억지로 끌어올린 경기는 곧 한계에 봉착할 것입니다.(이미 봉착했습니다.) 아파트가 늘어선 동네에는 문화가 없습니다.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없다고 단호히 말하겠습니다.


아파트도 있고, 빌라도 있고, 주택도 있고, 맨션도 있는 그런 동네에서 저는 살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집에도 살고 저런 집에도 사는 그런 동네에서 살고 싶습니다. 부자도, 부자가 아닌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어울려 사는 동네에 살고 싶습니다. 제각기 사는 모양이 다 달라서 남의 다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동네에 살고 싶습니다. 이런 사람도 살고 저런 사람도 사는 그런 동네에 그렇게들 좋아하는 ‘다양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파트에는, 적어도 21세기의 아파트에는 지나친 자기애와 획일성, 그리고 고립감과 층간소음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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